소설리스트

초대자가 지옥에서 살아남는 법-54화 (54/61)

〈 54화 〉 53. 파멸보단 혼돈이 낫다

* * *

‘그래. 하지만 소환 이후에 또 무슨 일이 있을지는 몰라. 그러니까 항상 정신 차리고 다녀. 어디 가서 아무 것도 아닌 놈들한테 픽 죽어버리지 말고.’

걱정과 경고가 뒤섞인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얼마동안 시간을 보내다 보니 눈앞에 메세지 창이 떠올랐다.

[제 1계층 무작위 소환 시작]

[모든 초대자는 무작위로 계층 지대 어딘가로 이동한다.]

[초대자들에게 축복과 행운이 함께하길.]

[5]

[4]

[3]

[2]

[1]

[소환.]

***

사방에서 눈부시게 쏟아지는 빛, 마치 온 세상이 하얗고 순수한 빛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순백색의 기둥들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고, 바닥에 깔린 대리석은 한 점의 티끌조차 없었다.

하늘 높이 이어지는 계단을 지나 그곳에 다다르면 그 장엄하고 찬란한 모습에 누구나 탄복을 할 것이었다.

마치 상상 속 빛의 궁전같은 그곳의 입구를 지나 걷다보면, 벽과 천장 모두를 하나의 화폭으로 삼아 성화(?)를 그려놓은 복도가 나온다. 위대한 존재와 그 존재가 일으킨 이적들, 또한 그를 찬양하고 보필하는 천사들이 그려진 성화. 그 성스럽고도 거룩한 모습에 이를 보는 이들은 모두 넋을 잃을 만했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성화도 끝을 맺는 곳, 길고 웅장한 복도가 끝이 나는 곳에서부턴 넓디 넓은 회랑이 모습을 드러낸다. 하얀색의 백옥이 깔린 둥근 모양의 회랑은 12개의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언뜻 보면 금빛으로 빛나는 것 같다가, 빛이 반사되는 각도에 따라 붉은색, 초록색, 자주색 등 오색찬란한 빛을 뿜는 기둥들이었다. 각 기둥에는 위대한 존재의 면전에 서서 그의 말씀을 듣는 어전천사(Angels of Presence)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인간에겐 전해지지 않는 성스러운 문자로 기록된 그 이름들은 이름의 주인들의 영원한 영광을 반영하듯 빛이 바래는 법이 없었다.

눈부신 회랑의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원탁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원탁에는 역시 12개의 자리가 있었고, 각 자리마다 백금과 수정으로 정교하게 장식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모두 저마다 여섯 장의 날개를 가진 천사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천사들의 머리 위에는 저마다 개성있으나 아름다운 월계관이 씌워져 있었다. 세 쌍의 날개는 곱게 접혀 상반신을 살짝 가리는 듯 했고, 몸에 자연스럽게 걸쳐진 로브나 세마포는 은은한 빛을 흘렸다.

그런 천사들 중 뒤편에 커다란 검을 띄워 놓은 남천사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다른 천사들을 한 번 둘러보고 무언가 영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은 천사는 꽤 오래 유지된 정적을 깨기로 했다.

“그래서... 다들 왜 모였는지는 알고 있겠지?”

허리 밑까지 내려오는 백금발의 여천사가 남천사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그럼요. 수천 년만에 어전천사가 전부 회랑에 모였어요. 그 일 말고 달리 무엇이 있겠어요.”

남천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옥과 천국 모두가 들썩이는 상황이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미카엘.”

꽤나 날카로운 인상의 여천사가 남천사의 이름을 부르며 물었다.

“어전천사를 전부 모았다는 것은 이미 대천사들끼리 의논이 끝났다는 말이겠지?”

미카엘은 잠시 질문을 던진 여천사를 바라보다 대답했다.

“그래, 사라카엘. 대천사들끼리는 이미 의논을 끝냈다.”

“역시.”

이번엔 다소 작은 키의 남천사가 비아냥대듯 말했다.

“그럼 굳이 우리를 불러모으는 이유가 뭐야? 어차피 그 의논에서 나온대로 다 할거면서. 대단하신 대천사님들에 뜻에 따르는 것 말고 선택지가 있나?”

“파누엘, 입 조심해라.”

근엄한 인상의 다른 남천사가 한마디 했으나 파누엘의 조소어린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확실히..”

그때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백금발의 여천사가 다시 말을 꺼냈다.

“수천 년이라는 시간 동안 해오던 대로 대천사들의 의논으로 끝내지 않고, 12명의 어전천사를 전부 모았다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 같군요.”

그렇게 말하며 알게 모르게 미소를 짓는 아카트리엘을 바라보며 미카엘이 입을 열었다.

“그래. 이번에는 확실히 이례적인 상황이 맞다. 대천사들만으로.. 결론을 내기 힘들 정도로 말이지.”

미카엘의 말에 나머지 11명의 어전천사들이 전부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대부분이 놀라거나 심각함을 인지한 표정이었다.

그 시선들을 받을 미카엘이 잠시 침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다소 무거운 어조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다들 알다시피 얼마 전에 카마엘의 조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그 힘이 약하다지만 존재한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무엇이 계기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하나의 조각이 깨어났고, 아마 다른 조각들도 조만간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불과 어젯밤에 지옥 1계층에서 상급 악마 하나가 난동을 부렸다. 그 혼란 속에서 파견된 우리와 악마들의 계약자들이 전투를 벌이기도 했지. 이런 상황을 볼 때 악마들도 진작에 알아차리고 행동에 나서는 중이라 보아야 한다.”

카마엘은 진지한 분위기로 자신의 말을 듣는 천사들을 둘러보며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카마엘의 조각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딱히 강조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라 생각한다. 5만년 전 악마들이 이곳을 침략했을 때 속절 없이 밀리던 전황을 단숨에 뒤집은 것도, 그후 최소한의 정예 천사들만 이끌고 지옥으로 돌격하여 그곳을 쑥대밭으로 만든 것도 모두 카마엘이었다.

그런 카마엘의 격이 흩어져 만들어진 조각이 나타난 것이다. 만일 조각들의 힘을 악마들이 흡수한다거나, 어떤 수작을 써서라도 그들이 그 힘을 통제하게 될 경우에는... 상상도 하기 싫은 끔찍한 일이 벌어지겠지.”

여기까지 말한 미카엘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놓인 순금 잔에 담긴 포도주로 목을 축였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사라카엘이 질문을 던졌다.

“...그렇기 때문에 카마엘의 조각을 반드시 회수해야 하지. 이건 이 자리에 있는 모두 이견이 없을 거다. 그렇다면 미카엘, 네가 꺼내고자 하는 말은 그 방법에 대해서인가?”

순금 잔을 원탁위에 다시 내려놓은 미카엘이 그녀를 한 번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 그 방법에 대한 이야기이다.”

드디어 본론이 나오자 어전천사 모두가 미카엘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사라카엘의 말처럼 우리는 그 조각들을 반드시 얻어야만 한다. 우리가 5만년 전, 악마들에게 유린당했을 때보다 훨씬 강해졌다지만 카마엘의 힘이 그들에게 넘어가면 대책이 없지. 그러니 반드시 그들에게서 되찾아와야 하는 것인데..

불행히도 조각들이 위치한 곳은 지옥이다. 우리들보단 악마들이 훨씬 개입하기 좋은 곳이지. 우리의 계약자들이 아무리 분전한다 한들 분명 한계가 있을 것이고, 악마들과 달리 우리는 권속을 보내지도,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도 없다.

게다가 카마엘의 조각에 대한 그들의 집착은 우리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이다. 직접 그녀의 힘을 겪어보았으니 어떻게든 그것을 빼앗거나 파괴하고자 하겠지. 이런 상황을 고려해볼 때 사실 우리가 악마들보다 먼저 조각을 얻기는 요원하다고 볼 수 있다.”

모두가 알고는 있지만 언급하지 않는 불리한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천사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면서도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미카엘에게는 무슨 방법이 있는 것인가 하는 궁금증을 안고 그를 바라보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현재의 상황이 계속된다면, 말이다.”

시종일관 진중한 표정으로 말하던 미카엘의 입가에 약간의 미소가 맺혔다.

“이대로 가면 조각을 빼았기고 상황은 돌이킬 수 없어질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얌전히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과, 혹은 판을 뒤집어 엎어서라도 반전을 꾀해보는 것이 있다. 나는, 그리고 나를 비롯한 대천사들은 모두 후자가 더 낫다고 결론을 내렸다.”

“...판을 뒤집는 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요?”

의미심장한 말에 처음부터 눈을 감고 고요함을 유지하던 여천사, 예페피아가 질문을 던졌다. 질문을 받은 미카엘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무얼, 판을 엎는 것이라곤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예페피아가 무언가 직감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성전(?戰)이다.”

“...”

“...”

“...”

12명의 어전천사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숨길 수 없는 경악이 모두의 얼굴에서 여실히 느껴졌다. 태연하게 다시 순금 잔을 들어 포도주를 홀짝이는 미카엘 외에는 누구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미카엘은 자신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들을 느낄 수 있었다. 미친놈을 보는 듯한 시선, 진심인지 아닌지 가늠하는 듯한 시선, 묘한 흥분과 희열을 감춘 듯한 시선, 이미 다 알고 있던 것처럼 묵묵히 바라보는 시선.

그 모든 시선을 받아내는 미카엘을 차분하게 응시하던 한 남천사, 산달폰이 입을 열었다.

“...진심인가?”

미카엘은 기울이던 잔을 다시 내려놓고 대답했다.

“물론이다. 내가 이런 자리에서 허언을 할 이유가 없지 않나.”

“그리 쉽게 입에 담을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만.”

“쉽게 입에 담는 것이 아니다. 천계 전체의 존망이 달린 일이며, 나아가 이 세상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일이다.”

“...”

“너희도 알고 있을텐데. 빛과 어둠의 균형은 깨져선 안된다. 어느 정도 기우는 것은 가능할지라도, 그것이 한 쪽의 파멸로 이어지는 것은 재앙을 불러온다. 늘 바깥에서 이 안을 주시하는 외해(外?)의 존재들에게 개입할 빌미를 주게 될테니까.

하지만 저 머저리같은 악마들은 이를 고려할 생각이 눈곱만치도 없지. 그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맹목적인 놈들 투성이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뿐이다.”

“..정말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인가?”

“그럼 이 상황을 극복할 다른 타개책이라도 있나?”

“...”

미카엘은 다양한 감정과 고뇌 속에 파묻힌 천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합당한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지금 제기해라.”

“...”

“...”

그 뒤에 이어진 긴 정적은, 누군가가 내뱉은 탄식이 나오기 전까지 유지되었다.

“피할 수 없는 혼돈이 도래하겠구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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