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초대자가 지옥에서 살아남는 법-53화 (53/61)
  • 〈 53화 〉 52. 구하린

    * * *

    “그게 너무 궁금하단 말이지. 그래서 나도 한 번 해보려고 해.”

    구하린은 이게 대체 무슨 개소리인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당연했다. 나는 실제로 개소리를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완전히 의미 없는 말은 아니었다.

    “그럼 나도 떨어져볼게.”

    ‘전투 천사 강림 ­ 오파님(Ophanim)’

    ‘진체 해방’

    그 말과 함께 내 몸에서 눈부신 빛이 쏟아졌다.

    ***

    ‘끄으으으으윽!!’

    온 몸의 마력이 거칠게 빨려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스톡에 남아있는 한 줌의 마력까지도 모조리 검을 향해 모여들었다.

    나는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진체 해방과 전투 천사 강림을 모두 사용하긴 했지만, 내 마력의 한계 때문에 전투 천사 강림은 불발되었다. 40 레벨이 되고 꾸준히 수련하여 늘어난 마력량으로도 둘 모두를 발동시키기에는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아니, 오히려 진체 해방 하나만으로도 상당히 버거웠다. 마력의 총량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늘었으나 전체 마력의 90/100 정도가 소모되었다.

    “꺄아아아아아악!!”

    내 몸에서 터져나오는 빛에 직격당한 구하린이 비명을 질러댔다. 온 몸에 화상이라도 입은 듯이 괴로워하던 구하린은 나를 팽개치듯이 땅에 던져버렸다.

    나는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일단 구하린을 떨어뜨리기 위해 한 짓이기 때문에 알아서 던져 주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와중에 나는 내가 들고 있는 검을 바라보았다. 부러진 검은 어느새 찬란한 성화에 둘러싸인 대검이 되어있었다. 하얗고 성스러운 불에 둘러싸인 검은 자신의 예전 모습을 조금이나마 되찾은 듯 했다. 지금 내 손에 들려있는 이 검만 있다면 무엇이든 벨 수 있을 것 같은 전능감이 몸을 지배했다.

    하지만 나는 순간의 감정에 휘말리지 않았다. 지금 내 눈앞의 여자는 루시퍼의 계약자이다. 루시퍼는 악마나 천사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던 나도 들어봤을만큼 유명한 악마이다. 그렇다면 가지고 있는 힘도 상상을 초월할 가능성이 컸다. 검의 진체를 잠시 해방 시켰다고 해서 목숨을 건 도박을 할 수는 없었다.

    실수로 나를 집어던진 구하린은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다시 나를 보았다. 흉신악살 처럼 일그러지던 그녀의 얼굴은 내가 들고 있는 검을 보자마자 경악으로 물들었다.

    “네.. 네가 어떻게..?”

    구하린은 마치 세상이 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처럼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본 내가 히죽 웃음을 짓던 순간이었다.

    무언가 커다란 천같은 것이 등을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트램펄린 같은 것 위에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그 천은 내가 떨어지는 힘을 상당 부분 받아내고는 찢어져버렸다. 부욱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땅바닥에 안착하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예상대로 도시에서 가장 큰 시장 한가운데였다. 애초에 이곳에 떨어질 것을 노리고 기술을 사용한 것이었다. 시장 한가운데 위치한 천막은 예상대로 낙하하는 충격을 상당히 감소시켜주었다.

    떨어진 다음 일어서자마자 정신 없이 달렸다. 뒤는 돌아보지도 않고 최대한의 속도로 질주했다.

    ‘단계별 가속 ­ 3단계’

    3단계 가속은 여전히 몸을 가누기가 힘들지만 지금은 물불 가릴 때가 아니었다. 평범한 인간의 속도를 아득히 초월한 신속으로 거리를 주파했다.

    그렇게 달리는 와중에 뒤통수를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마기가 느껴졌다. 고개를 살짝 돌려 뒤를 보니 구하린이 바로 뒤에 따라붙고 있었다.

    내가 진체 해방을 했을 때의 충격은 금방 가신 것인지 표정은 한없이 냉담했다. 마기로 이루어진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무서운 속도로 나를 추격하고 있었다.

    “좋게 모셔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나오신다면 저도 어쩔 수 없지요!”

    어느새 길고 검은 채찍 하나가 구하린의 손에 들려있었다. 미소를 지은 구하린이 마기를 채찍에 주입하자 마치 철편과도 같은 날붙이들이 채찍에서 돋아났다. 잔인한 흉기로 변한 채찍이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공기를 갈랐다.

    나는 달리는 속력은 유지한 채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검을 뒤로 뻗었다. 저 채찍에 무방비하게 맞으면 좋은 꼴을 못 볼 것이 뻔했기 떄문이었다.

    그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구하린의 손이 멈추며 채찍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구하린의 눈이 뒤집히면서 새까맣게 물들었다.

    “흐으으으으윽?”

    갑작스런 비명 소리를 내지른 구하린이 머리를 감싸쥐었다. 머릿속을 누가 헤집기라도 하듯이 한껏 인상을 찌푸리며 고통을 드러냈다.

    “아.. 그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이상한 비명소리를 내던 구하린은 누군가에게 정신없이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

    그 돌발적인 상황에 나는 계속 달리면서도 멍하니 뒤를 바라봤다. 뭘까? 갑자기 미치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누군가 구하린의 정신에 수작질을 부리는 건가?

    한동안 그러고 있던 구하린은 갑작스레 행동을 멈추고는 마기를 거두었다. 그와 함께 그녀의 손으로 채찍이 빨려들어가듯이 사라졌다. 옷깃을 추스르며 자세를 바로잡은 구하린은 예의 그 냉담한 표정으로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계속 달리고 구하린은 중간에 추격을 멈추었기 때문에 둘 사이의 거리는 이미 상당히 떨어져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하린의 말은 내 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제가 잠시 흥분해서 과격한 행동을 했군요. 돌발적인 공격에는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뭐?”

    “상황이 상황인지라 혼란스럽게 해드린 모양입니다. 제 주인이신 루시퍼님은 당신을 강제로 데려가려 하시는게 아닙니다. 그저 진운님이 그분의 그늘에 들어오기를 바라시는 것이죠.”

    “..방금까지의 행동을 보고도 그 말을 믿으라고?”

    “그에 대해서는 거듭 사과를 드립니다. 제가 루시퍼님의 명령을 잘못 이해한 탓에 벌어진 불상사였습니다.”

    허리를 숙이며 다시 사과한 구하린이 말을 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적절치 않고 저도 추태를 보였으니 물러가겠습니다. 그러나 조만간 또 볼 일이 있을 겁니다. 그때 다시 이야기 하도록 하죠.”

    “그게 무슨..”

    그 밀과 함께 구하린은 마기에 휩싸임과 동시에 사라졌다. 갑자기 나타난 만큼 갑자기 사라지는 사람이었다.

    ***

    구하린이 물러가자 잠시 내 주변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니, 사실 정적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도시 곳곳에서 여전히 무언가 파괴되는 소리, 싸우는 소리, 악마가 부르짖는 소리 등이 들려왔으니까.

    잠시 멍 하니 있던 나는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구하린은 당장 물러갔지만 아직 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직 도시 한복판에는 어떤 권위 높은 악마가 보낸 상급 악마가 날 뛰고 있었고, 그 혼란을 틈타 파견된 악마와 천사의 계약자들이 서로 싸우며 난장판을 만들고 있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도시 내에서 몸을 숨길 곳은 생각나지 않았다. 기껏 숨는다고 숨어봤자 도시를 이잡듯이 뒤져서라도 나를 찾으려 할 것이 뻔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나는 먼저 시선을 잔뜩 끄는 진체 해방을 해제했다. 불타오르는 검을 들고다니는 것은 내가 카마엘의 계승자라고 광고하고 다니는 꼴이었으니까.

    그후 가속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서 정문을 향해 달렸다. 지나친 가속의 사용으로 몸에 무리가 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양옆으로 난장판이 된 도시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문의 모습이 보였다. 정문 근처에서 사람들이 분주하게 무언가를 하고 있었지만 무시하고 빠르게 지나쳤다. 내가 달려가는 것을 본 사람들이 뭐라 말하며 나를 붇잡으려 했지만 내 속도가 너무 빨라서 의미가 없었다.

    도시는 이미 나를 노리는 불특정 다수로 가득 찼다. 그렇다면 내가 향할 곳은 한 곳 뿐이었다.

    정문 바깥으로 끝없이 펼쳐진 대수림이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색과 자주색의 잎사귀들로 가득한 수해가 내 시야를 가득 매웠다.

    1계층의 환란의 숲, 이 기괴하기 짝이 없는 장소가 나를 숨겨줄 안전한 장소가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참으로 인생은 예측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인 것 같다. 특히 이 지옥에서는.

    망설임 없이 숲으로 뛰어들어 정신없이 달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 숲 속을 질주하던 도중 익숙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진운, 멈춰봐.’

    카마엘이었다.

    ‘이제 어느 정도 안전해. 쫓는 사람도 없는 것 같고.’

    그 말에 나는 달리기를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얼마나 달려온 것인지 도시는 더이상 보이지도 않았다.

    ‘일단 앉아서 숨 좀 골라. 몸 쓰는 것도 마력 사용도 너무 무리했어.’

    확실히 더이상은 누군가 추적하는 것 같진 않았기에 나는 카마엘의 말대로 쉬기로 했다. 거의 바닥을 드러내는 마력이 조금씩 차오르고 혹사 당해서 슬슬 통증이 올라오는 다리 근육도 풀어져갔다.

    ‘악마들이 생각보다 훨씬 빨리 행동에 나섰어. 게다가 무언가 시도할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과감한 짓들을 벌일 줄이야...’

    카마엘도 지금의 상황이 상당히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서로 알아서 하도록 두는 것은 악마들 답지만, 이렇게 막나가는 악마가 있을 줄은 몰랐어.’

    이 난리를 친 것이 악마라는 전제를 깔고 보아도 이 상황은 무리수나 다름이 없었다.

    ‘이 일을 터뜨린 게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꽤나 많은 견제를 받을거야. 특히 아까 루시퍼의 계약자가 말했던 너를 회유하려는 쪽은 대놓고 훼방을 놓을지도 모르지.’

    ‘악마들끼리도 서로를 방해하는 거야?’

    ‘그럼, 그놈들이 얼마나 자기 이익을 잘 챙기는데. 같은 악마에게 제지를 가하거나 수작질을 부리는 건 일도 아니야.’

    ‘그건.. 그나마 다행이네’

    ‘이 일을 벌인 놈은 아마 적지 않은 대가를 지불했을거야. 그럼에도 너를 죽인다는 목적을 이루지 못했으니 큰 타격을 입겠지. 그 모습을 본 다른 악마들은 이렇게 막나가는 선택지는 피할 확률이 높아.’

    ‘이번이 좀 특이한 돌발상황인거야?’

    ‘그렇지. 다른 곳도 아니고 1계층에서 일을 쳤으니까. 계층을 나누는 저지력을 거스른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거든. 아무튼 그래도 악마들이나 천사들이 너를 확실히 노린다는 사실은 알게 되었네.’

    ‘...앞으로 꽤나 피곤해질 것 같은데.’

    ‘그렇겠지. 이렇게 난리를 치진 않더라도 우회적인 방법은 얼마든지 사용할테니까. 그래도 그렇게 걱정할 것은 없어.’

    목소리만 들리기 때문에 카마엘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마치 그녀가 히죽 웃는 표정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너는 내 계승자야.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아직 감이 잘 안 잡히겠지만, 곧 알게 될거야. 그것만으로도 지금 네가 갖는 불안함이나 걱정은 다 떨쳐버려도 돼.’

    그녀의 말대로 카마엘의 계약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직 잘 모른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는 말을 듣는 것 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무작위 소환까지 이제 조금 남았네. 여기서 잠깐 시간 죽이며 있다보면 곧 이동되겠어.’

    ‘그렇네. 팀원들.. 다른 애들은 별 일 없겠지?’

    ‘걔네도 각자 충분히 한가락 하는 것 같던데? 네가 걱정 안 해도 알아서 잘 버티고 있을거야.’

    ‘그랬으면 좋겠네.. 하긴 다들 어디 가서 맞고다닐 애들은 아니니까.’

    ‘그래. 하지만 소환 이후에 또 무슨 일이 있을지는 몰라. 그러니까 항상 정신 차리고 다녀. 어디 가서 아무 것도 아닌 놈들한테 픽 죽어버리지 말고.’

    걱정과 경고가 뒤섞인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얼마 동안 시간을 보내다 보니 눈앞에 메세지 창이 떠올랐다.

    [제 1계층 무작위 소환 시작]

    [모든 초대자는 무작위로 계층 지대 어딘가로 이동한다.]

    [초대자들에게 축복과 행운이 함께하길.]

    [5]

    [4]

    [3]

    [2]

    [1]

    [소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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