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초대자가 지옥에서 살아남는 법-52화 (52/61)

〈 52화 〉 51. 구하린

* * *

그렇게 날 뜨거운 눈길로 바라보던 구하린은 갑자기 입을 맞춰왔다. 기습적인 키스에 나는 그대로 입을 벌릴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혀가 내 입으로 들어와 거침없이 입안을 유린했다.

그런 구하린에 저돌적인 공격에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무언가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꼈다.

시야가 조금 흐릿해지며 머리가 멍해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으로 인해 당황한 몸이 점점 풀어졌다. 그와 함께 내 몸에 밀착한 구하린의 몸이 더없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조금씩 몸을 움직이며 호응하는 나를 보며 구하린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

몽롱한 정신은 내 판단력을 떨어뜨렸다. 지금 어떤 이유로 인해 내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은 자각했다. 하지만 별다른 행동을 할 수 없었다. 아니, 하기 싫었다.

어느새 나를 구속하던 마기는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구속되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구하린이 인도하는 대로 몸을 맡겼다.

이런 게 악마의 유혹인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거절하기 힘들만큼 달콤하고 매력적이다.

“후훗.”

그런 나의 상태를 본 구하린이 웃으며 나를 끌어 안았다. 기분 좋은 감촉이 온 몸을 감쌌다. 한동안 나를 안고 있던 그녀가 흐느적 거리는 나를 끌어다 침대에 뉘였다.

나는 별다른 저항도 없이 침대로 쓰러졌다. 이어서 몸을 일으킨 구하린이 내 위로 올라왔다.

말을 타듯이 내 위에 올라 탄 구하린이 허리를 숙여 나와 입을 맞추었다. 서로의 혀가 뒤섞이는 격렬한 타액의 교류가 오고 갔다.

“그럼... 할게요?”

구하린이 입고 있던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며 말했다. 나는 여전히 흐릿한 정신 상태에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구하린의 손이 내 바지를 벗기려던 때였다.

째앵 ­ !

무언가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은 구하린이 벌떡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폈다.

잠시후 갑자기 어디선가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내 방을 가득 매우고 있던 마기가 조금씩 물러났다.

구하린의 마기에 저항하는 빛은 갈수록 양이 많아졌다. 그 빛을 본 구하린이 인상을 찌푸리며 빛을 노려보았다.

“천사들의 개들... 생각보다 빨리 들켰네요.”

구하린은 잠시 어떻게 대처할지 고민하더니 나를 들쳐매었다. 여전히 제정신을 못 차리는 나는 그대로 구하린의 어깨에 얹혔다.

그렇게 나를 확보한 구하린이 자리를 이탈하려는 순간, 내 방 한 쪽 벽에서 커다란 폭음이 들렸다.

콰아아아아앙 ­ !

박살난 벽을 넘어 들어온 것은 빛이 넘실거리는 창을 든 남자였다.

남자의 눈에서 노란색의 빛이 형형하게 뿜어졌다. 그와 함께 강렬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날개 한 쌍과 빛나는 월계관이 보였다. 전체적인 생김새가 천사와 상당히 유사했다. 마치 내가 전투 천사 강림을 사용했을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남자의 난입을 확인한 구하린은 즉시 땅을 박차며 이동했다. 앞을 가로막은 창문이 구하린의 손짓만으로 가루가 되어버렸다. 훤히 트인 창 밖으로 그녀가 몸을 던졌다. 물론 어깨에 들쳐매어진 나도 함께였다.

“멈춰라! 변절자놈!”

우리가 도망가는 것을 확인한 남자가 곧바로 쫓아왔다. 남자가 창틀을 박차고 뛰어넘자 남자의 날개가 펄럭이며 움직였다. 그러자 남자의 몸이 떠오르며 날기 시작했다.

저 남자의 날개는 장식만이 아니라 진짜 비행 기능도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전투 천사 강림을 사용할 때 나오는 날개는 그냥 장식에 불과한데 말이다.

그렇게 날아서 우리를 쫓아오는 남자를 신기하게 보고 있자니 문득 우리도 날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아작난 내 방이 빠르게 멀어지는 걸 보니 상당한 속도로 날고 있는 것 같았다.

놀란 마음에 옆을 바라보니 커다란 검은색 날개가 구하린의 등 뒤에 솟아 있었다. 짙은 마기가 느껴지는 걸 보니 마기를 형상화해서 만든 것 같았다. 마기로 날개를 만들어 날다니. 그것만으로도 구하린이 얼마나 실력자인지 알 수 있었다.

잠시간의 추격전이 이어졌지만 남자와 우리의 사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거기다 남자는 힘에 부치는지 속도가 떨어지고 있었다. 분에 찬 남자가 뭐라뭐라 악을 썼지만 거리가 꽤 벌어져서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렇게 구하린의 어깨에 얹혀진 상태로 비행하던 나는 고개를 내려 아래를 바라보았다. 이미 꽤 높은 고도까지 올라온 건지 사르비나 거점의 전반적인 모습이 보였다.

“홀리...”

거점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거점의 한가운데에선 거구의 악마가 초대자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수시로 하얀색의 뇌전이 번뜩이는 것으로 보아 총책임자 오웬스가 참전한 모양이었다.

거점의 곳곳에서는 검은색의 마기와 밝은색의 마력이 충돌과 폭발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우리를 쫓아오는 남자와 비슷한 모습을 한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변절자들과 천사들의 계약자들 간의 전투로 보였다.

그리고 이런 갑작스러운 혼란으로 대피하는 초대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사람으로 이루어진 물결이 급하게 여러 대피소로 흐르고 있었다.

날아가면서 나와 같은 장면을 본 구하린이 말했다.

“휘유, 난장판이군요.”

그런 난장판을 만든 장본인 중 하나가 말하니 어이가 없었다.

“...변절자들이 단체로 습격한 건가?”

“맞아요. 물론 딱히 함께 오기로 정한 건 아닙니다. 다들 회의 끝나고 부랴부랴 달려오다 보니 겹친 거지요.”

“그 말을 믿으라고?”

“안 믿으시면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게 사실입니다.”

“.....”

정신 없이 진행되는 상황에 머리가 따라가지를 못했다. 얼마 전까치 내일 있을 무작위 소환에 대비하여 방에서 쉬고 있었는데, 지금은 변절자 어깨에 업혀서 하늘을 날고 있다. 그리고 거점 전반에서 변절자들과 천사의 계약자들이 전투를 벌이고, 초대자들이 거점에 출현한 상급 악마를 토벌하고 있다.

미치겠는 것은 이 개판의 주된 원인이 나라는 것이다.

나에 대한 합의가 끝나자 마자 몸이 달아서 습격하러온 악마들이 줄을 선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악마들을 저지하기 위해 천사들도 제 계약자들을 무더기로 보낸 것이고.

그런 생각을 이어가던 나는 그냥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열심히 궁리하고 걱정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나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하는 수 밖에 없다.

그와 함께 좀 뻔뻔해지기로 했다.

따지고 보면 이 난장판의 원인이 나인 것은 아니다. 내가 카마엘의 파편을 얻고 싶어서 얻은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냥 우연히 내 손에 들어왔고, 나는 내가 살아남기 위해 그것을 잘 활용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걸 노리고 악마들과 천사들 등 여러 놈들이 달려드는 거다.

앞뒤의 사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나를 탓할 수 없다.

그러니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에 대해 스스로를 탓할 생각은 없다. 그래봤자 상황 개선에 전혀 도움이 안 될 뿐더러 정말 나는 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고 나니 머리가 조금 맑아졌다. 그와 동시에 주변의 상황이 좀 더 속속히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노파심에 드리는 말씀인데, 허튼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어떤 반항을 하든 제게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뭔가 낌새를 느낀 듯 구하린이 말했다. 나는 일단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진심은 조금도 담지 않았다.

잠시 상황을 지켜보며 어찌 할지 고민하던 나는 아래에서 어떤 장소 하나를 발견했다.

그 장소를 보니 상당히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그 생각을 바탕으로 나는 빠르게 계획을 세웠다.

계획을 세우고 보니 조금, 아니 상당히 불안정하고 도박성 짙은 계획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에서는 그것 외에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잠깐 고민하던 나는 이내 결심을 마치고 계획을 실행하기로 했다.

구하린이 날아가면서 점점 그 장소가 가까워졌다. 내가 고른 장소가 구하린이 날아가는 방향 쪽에 위치해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그 장소가 바로 위까지 도달했다.

나는 구하린에게 말을 걸었다.

“너, 루시퍼의 계약자라고 했지?”

“네, 맞습니다. 상당히 강력한 신격의 악마시죠.”

“그 루시퍼가 원래 천사였다가 타천한 악마 맞나?”

“...맞습니다만 그 이야기는 하지 마십시오. 혹시라도 루시퍼님이 듣는다면 당신을 죽이려 하실지도 모릅니다.”

구하린의 살벌한 경고에도 나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 루시퍼가 하늘에서 떨어질 때 말이야,”

나는 구하린의 얼굴을 보면서 씨익 미소 지었다.

“얼마나 스릴 있었을까?”

“... 네?”

“그게 너무 궁금하단 말이지. 그래서 나도 한 번 해보려고 해.”

구하린은 이게 대체 무슨 개소리인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당연했다. 나는 실제로 개소리를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완전히 의미 없는 말은 아니었다.

“그럼 나도 떨어져볼게.”

‘전투 천사 강림 ­ 오파님(Ophanim)’

‘진체 해방’

그 말과 함께 내 몸에서 눈부신 빛이 쏟아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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