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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자가 지옥에서 살아남는 법-49화 (49/61)
  • 〈 49화 〉 48. 조심해야 해

    * * *

    즉 이번 전쟁은 맛보기 수준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어.

    본대라고 볼 수 있는 더 강한 악마들이 침입해오면 우리는 분명히 패배할 상황이었지. 겨우 신격의 악마 하나에 군주급 스무명 정도를 겨우겨우 이겨냈으니까. 심지어 그것들도 결국 다 내가 처리한 거였고.

    이대로라면 뭘 해보지도 못하고 우리보다 월등히 강한 악마들에 의해 싹 쓸려나갈 판이었어.

    그래서 난 한 번 더 목숨을 던지기로 했지.

    ***

    목숨을 버려가며 무엇을 했냐고?

    뭐겠어. 당연히 돌격이지.

    난 이번에도 무모한 돌격을 하기로 결심했어. 역시 이번에도 따라오겠다는 6명의 정예 천사들을 데리고 말이야.

    사실 나는 딱히 천계에 엄청난 애착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어. 숭고한 사명감에 가득 차서 목숨을 초개처럼 내던지려는 것도 아니었고. 악마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증오를 가지고 있다거나, 내가 소중히 여기는 누군가가 그들에게 죽어서 복수를 하려는 것도 아니었어.

    근데 왜 목숨을 던지려고 했냐고?

    별거 없어. 그전까지, 그러니까 전쟁이 있기 전까지는 너무 지루했거든.

    천계에는 짜릿한 느낌을 주는 전투도, 목숨을 위협하는 위기도, 실력을 견주어볼 상대도 없었으니까.

    다른 천사들도 전쟁에서 활약하고 나서야 나를 영웅처럼 대우했지, 그전까지는 그저 통제 안되는 골칫거리 취급만 받았어.

    그렇게 따분하고 무료하게 생을 이어나가느니 화끈하게 불태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었지.

    아마 나를 따라왔던 다른 놈들도 비슷한 생각이었을 거야. 그것들도 고지식한 천사들 사이에서 나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별종들이었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나를 포함한 7명의 정신 나간 결사대는 그대로 지옥을 향해 돌진했어. 다른 천사들은 우리더러 전투에 미쳐서 이성을 잃어버렸다고 비난을 했지만, 남들이 뭐라 하든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았어.

    그렇게 우리는 우리를 가로막은 삼두견부터 썰어버린 다음 지옥문을 박차고 들어갔지.

    파죽지세로 악마들을 도륙하며 제 4 계층에 다다르니까, 그때부터 슬슬 군주급 악마들이 기어나오더라. 그래서 보이는 족족 썰어주었어.

    6계층에 다다랐을 때는 레뭐시기의 72악마들이 단체로 기습을 해왔어. 처음 마주친 막강한 상대였지. 그래도 어찌어찌 이길 수 있었어.

    그렇게 9계층까지 도달했어.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신격급 악마들이 나서더라. 그중에는 내가 천계에서 악마 군단을 부수고 다닐때 제일 먼저 발을 뺐던 루시퍼도 있었어.

    그렇게 한계에 부치는 싸움을 이어가다보니 이제 슬슬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렇게 마침내 10계층에 도달했을 때, 나는 다른 6명의 천사들에게 말했어. 나는 남을테니 일단 너네끼리 돌아가라고 했지. 그 말을 들은 6명은 바로 반발했어. 무슨 소리냐, 우리도 끝까지 따라갈 거다, 온갓 비장한 말들을 늘어놓으며 나랑 떨어지지 않으려 했어.

    하지만 나는 기어코 걔들을 돌려보냈어. 나는 여기서 죽더라도 걔네까지 죽으면 정말 천계에는 희망이 없을 것 같았거든. 천계에 놔두고 온 내 파벌 애들이 있긴 하지만 그 애들로는 한참 부족했으니까.

    그 녀석들도 나와 지옥에서 깽판을 치면서 느낀 게 있는 건지 어찌어찌 발을 돌리긴 하더라. 본인들이 보기에도 지옥과 천계의 전력 차이는 너무 컸었나봐.

    그렇게 다른 애들을 돌려보낸 나는 지옥의 제일 깊은 최심부까지 들어갔어. 나도 나름 격이 높은 일품천사인데 마기를 감당하기도 벅찬 곳이더라구. 거기서 총 4명의 신격급 악마와 11명의 군주급 악마를 마주쳤어. 예상한대로 끝을 맺을 수 있을 정도의 전력이었지.

    그렇게 절망적인 전력차를 두고 열심히 분전하던 나는 거의 힘이 다한 상태가 되었어. 악마들은 드디어 나를 제압하고 힘을 흡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싱글벙글한 표정이었어. 하지만 나는 놈들에게 먹여줄 마지막 엿을 준비한 상태였지.

    나는 그대로 검을 들어 내 심장을 찔렀어. 정확히는 나의 격 그 자체를 찔렀지. 그 다음 산산히 부서지는 내 격을 각각 파편화 해서 지옥 전체에다 뿌렸어. 그 과정에서 검이 부러졌어. 수많은 군주급 악마들과 신격의 악마들을 베어 넘기던 검도 내 격을 수십 갈래로 쪼개는데 힘을 다 쓴거지.

    그런 나를 바라보던 악마들의 표정이 멍해지더라. 뒤늦게 정신을 차린 놈들이 내 행동을 저지하려 들었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어.

    나는 격을 쪼개서 뿌리는 데 그치지 않고 내 자아를 부러진 검에다 담았어. 그리고 그 검도 지옥 어딘가로 던져버렸지. 훗날 언젠가 이 검을 얻은 존재를 내 계승자로 삼을 것을 다짐하면서 말이야.

    그렇게 악마들은 손해만 잔뜩 보고 내 힘은 한톨도 흡수하지 못했어. 그렇게 미쳐 날뛰는 악마들을 놔두고 나는 지금까지 그 검에서 잠들어있던 거야.

    그렇게 세월아 네월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내 너라는 계승자가 나타난 거지. 진짜 반가워서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 심지어 그 계승자가 이렇게 훈남이라니!

    흠흠... 아무튼 그렇게 된 거야. 네가 어쩌다가 이 검을 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검을 얻고 여기까지 능력을 해금했다는 것만으로도 내 계승자가 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는 뜻이야.

    이정도면 어떤 사정으로 내가 여기에 잠들어 있었고, 어쩌다 너를 계승자로 삼았는지 알겠지?

    그렇게 되었으니, 앞으로 서로 손발 맞춰가며 오순도순 잘 지내보자구.

    알았지, 훈남 계승자?

    ***

    카마엘의 이야기를 다 들은 나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듣고 ‘아 그렇구나’라고 하기에는 너무 엄청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저 말이 다 사실이라면 카마엘은 생각보다 엄청난 거물이었던 것이 된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던져놓은 검을 얻은 나도 엄청난 행운아인 것이고.

    “그러니까... 어...”

    “으응?”

    “으음...”

    “왜? 내가 한 말들이 잘 안 믿어져?”

    “살짝 그렇기도 하지만 거의 다 믿기는 해요.”

    “음, 정말?”

    “네. 일단 카마엘님이 저한테 굳이 거짓말을 칠 이유도 없고, 무엇보다 지난번에 다른 천사가 카마엘님을 보고 엄청 놀라거나 어려워 하는 걸 봤으니까요.”

    “흐응...”

    “그러니 일단 카마엘님이 들려준 이야기는 거의 사실이라고 봐야겠죠. 그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했을 때 앞뒤가 다 맞으니까요.”

    카마엘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내가 손쉽게 믿지 않을 거라 예상한 모양이다.

    “그런데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 다 말해봐. 우리 훈남 계승자에게 못 해줄 말은 없으니까.”

    “으음...”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그럼 카마엘님은 제게 원하는 게 무엇인가요?”

    “응?”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제게 원하는 것이요. 제가 카마엘님의 계승자가 되었으니 뭔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것 아닌가요?”

    카마엘은 내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는 듯 보였다. 그렇게 허공을 바라보던 카마엘의 입꼬리가 어느 순간 살짝 올라갔다. 그로부터 잠시 후 그녀의 입이 열렸다.

    “없어.”

    “...네?”

    “없어.”

    “...”

    전혀 상상도 못한 대답에 내 말문이 막혀버렸다.

    “없어. 바라는 거.”

    “바라는 게 아무 것도... 없으시다구요?”

    “응. 그냥 너 하고 싶은대로 하면 돼.”

    난 잠시 동안의 뇌정지를 겪은 후 간신히 다시 말을 꺼냈다.

    “왜요?”

    “응?”

    “이렇게 큰 힘을 물려주었으니 악마들을 죽이라던가, 지옥의 끝을 보라던가, 천계를 지키라던가... 하는 요구는 안 하시는 건가요?”

    카마엘은 내 질문을 듣고는 더 진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계승자는 내가 그런 것들을 요구했으면 좋겠어?”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됐어. 너가 하고 싶지 않은데도 할 필요는 없는 거야. 애초에 요구할 생각이 없기도 했고.”

    나는 아직도 카마엘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이렇게 엄청난 것을 물려주면서 원하는 게 없다구? 이게 무슨 세상에 다시 없을 정도로 혜자스러운 말인가. 이건 마치 평범하게 살던 소시민에게 재벌이 찾아와 대뜸 전재산을 넘겨주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고 그냥 살고 싶은 대로 살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당황스러워 하는 날 보던 카마엘이 추가로 말을 꺼냈다.

    “정말 나는 너에게 무언가 요구할 생각이 없어. 네게 뭔가 시키거나 강요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야.”

    “으음...”

    “상황이 어찌 되었든 나는 나고 너는 너야. 어쩌다보니 우리가 오랫동안 함께할 파트너가 되었다지만, 그런 이유로 상대의 미래와 인생을 좌지우지 하려 하면 안된다고 생각해. 그래서는 서로 불행해질 뿐이니까.”

    “그런가요...”

    “정 네가 내 힘을 공짜로 받는 것에 보답을 하고 싶다면, 천사들을 너무 멀리하지 않는 걸로 충분해. 네가 내 힘으로 천사들과 적대하는 모습을 보이면 나도 조금 씁쓸할 것 같으니까.”

    “그럴 일은 없을 거에요. 그들이 먼저 저를 해치려 들지만 않는다면요.”

    “그래.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땐 어쩔 수 없는 거지. 그땐 나도 말리지 않을게.”

    카마엘은 자신을 바라보는 나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우리 계승자, 얼굴만 잘 생긴게 아니라 인성도 괜찮은 것 같네. 5만년 씩이나 기다린 보람이 있는데?”

    그렇게 내 머리를 쓰다듬던 카마엘은 잠시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더니 다시 말을 꺼냈다.

    “이제 슬슬 시간이 다 되어가네?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길 말을 해줘야겠는걸?”

    “다음에 다시 못 만나는 건가요?”

    “아니? 만날 수 있어. 다만 이렇게 얼굴 보고 만나는 건 일주일에 한 번 정도만 가능할 거야.”

    다행히 이번이 마지막이라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잠시 후에 밖으로 나가면 꽤 많은 것이 달라져 있을거야. 너 자신과 그 부러진 검도. 훨씬 강해져 있을테니 빠르게 익숙해져서 온전히 사용하길 바랄게.”

    “네, 알았어요.”

    “그리고 이건 꽤나 중요한 말이야.”

    다소 굳은 표정이 된 카마엘이 이어서 말했다.

    “진운, 이제부터 악마들과 천사들을 조심해야 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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