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46. 카마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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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과 함께 지칠줄 모르던 흡수가 조금 잦아들었다. 그렇게 조금씩 기세가 줄어가던 마력흡수는 정말 딱 죽지 않을 정도만 남기고 멈추었다.
나는 온몸에 마력이 동난 상태가 되었다. 상당한 탈력감이 전신을 지배했다. 그렇게 침대에 대자로 뻗어있으니 카마엘이 다시 말을 걸었다.
‘그럼 이제 준비 됬지?’
‘네? 무슨 준비요?’
‘된 것 같네. 그럼 이쪽으로 부를게~’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혼이 뽑히는 듯한 느낌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
영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쓰러지고 나서 얼마 후, 내 의지와 상관 없이 두 눈이 번뜩 떠졌다.
분명해진 시야와는 다르게 온몸의 감각은 붕 뜬 것처럼 불분명했다. 그렇게 생소한 느낌 속에서 허우적 대면서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을 보니 내 숙소의 풍경이 흐릿하게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그 모든 풍경이 일그러지더니 점차 사라졌다. 사라지는 풍경의 뒤로는 하얀색의 방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방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저 하얀색만이 가득찬 공간이 내 눈에 가득 들어왔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듯한 공간의 한가운데에 내가 서 있었다.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나는 얼이 빠진 채 멍하니 주변을 둘럽보았다.
잠시 생각해보니 지금 상황이 묘하게 익숙했다. 지난번에 기술세트를 전수받을 때도 이런 새하얀 공간으로 끌려왔었다. 윤곽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아서 마치 무한한 공간처럼 보이는 것도 비슷했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기묘한 통로를 겨쳐서 온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공간이 바뀌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감각도 시각 말고 다른 감각까지 유지 되고 있었다. 또한 이런 저런 움직임을 시도해보니 내 마음대로 몸을 움직이는 것도 가능한 것 같았다.
그런 점들을 보아 아마도 이 공간은 지난번에 갔던 공간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공간 같았다.
그렇게 몸을 움직이며 주변을 둘러보던 중, 하얀 방의 한중간에서 무언가가 일그러지는 듯한 모습이 보였다. 나는 지난번의 경험을 토대로 저것이 누군가가 이쪽으로 이동할 때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와중에 갑자기 이쪽으로 넘어올 누군가라면 한 명 밖에 없었다. 아마 날 이곳으로 부른 카마엘일 것이다.
방 가운데의 일그러짐은 점차 커지며 하나의 인영을 만들어냈다. 그후 조금씩 뚜렷해지면서 마침내 완전한 형상을 갖추었다.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는 역시 카마엘이었다. 저번에도 한 번 본적이 있는 카마엘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일단 눈앞에 쏟아지는 빛은 여전했다. 머리 뒤의 후광과 온 몸에서 발산되는 은은한 빛이 눈을 간지럽혔다. 머리 위에 떠 있는 월계관과 등 뒤의 세 쌍의 날개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지난번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못 봤지만 이번에는 그녀의 생김새가 확실히 눈에 들어왔다.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황금색 머리칼과 그와 비슷하게 금색을 띠는 커다란 눈동자. 장난기가 많아 보이는 인상이지만 눈부시게 아름다운 얼굴. 상당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미드와 완벽한 수준의 몸매까지.
자세히 보니 정말 이상적이라고 할만큼 아름다웠다. 천사라서 그런걸까? 그렇다기엔 저번에 본 남천사는 그렇게 잘 생기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런 생각들을 하며 넋을 놓고 카마엘을 바라보다가, 문득 지금 내가 그녀와 한참 눈을 마주치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멍하니 바라보던 내가 갑자기 당황스러워 하니 카마엘의 눈매가 긴 호선을 그렸다.
“왜 그리 빤히 쳐다보는 거야? 혹시 너무 예뻐서 반했어?”
카마엘이 귀호강을 시켜주는 아름다운 미성으로 나를 놀렸다. 입꼬리도 올라간 채 히죽 거리며 날 바라보는 게 정말 악동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또다시 나갈 뻔한 넋을 간신히 붙들고 대답했다.
“음... 네, 정말 예쁘시네요.”
“어, 엇... 음.. 그, 그치? 내가 좀 예쁜 편이야.”
내가 솔직히 대답하니 오히려 카마엘이 더 당황하는 것 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거짓말로도 예쁘지 않다고 할 수 없었다. 정말 상상 속의 여자를 눈앞에 데려다 놓은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진짜 비현실적으로 예뻐요.”
“아으.. 으음, 그래?”
당당하게 내 눈을 바라보던 천사는 어디갔는지 카마엘은 몸을 베베 꼬며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원래 천사들은 다 그렇게 예쁜가요?”
“으음, 아니? 내가 좀 특히 예쁜 거야.”
카마엘은 허리에 손을 얹고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살짝 진위가 의심스럽긴 하지만 대충 그렇다고 치기로 했다.
“아, 아무튼! 내가 널 부른 건 한 번 얼굴이나 보려고 부른거야. 이제 앞으로 쭉 함께할텐데 서로 생긴건 알아야 하지 않겠어?”
어느새 다시 장난스럽고 당당한 천사로 돌아온 카마엘이 말했다. 그런 그녀의 말에서 나는 한가지 의문스러운 점을 발견했다.
“앞으로 쭉 함께한다구요?”
“응. 앞으로 쭉.”
“음... 어떤 의미로 함께한다는 거죠?”
“말 그대로야. 이 지옥에서 쭈욱 나와 함께한다는 거지. 아마 죽을 때까지 갈 걸? 이미 넌 내 계승자가 되었으니까 말이야.”
뭔가 오싹한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온 것 같다.
“죽을 때까지요? 아니 그보다, 계승자라뇨?”
“몰랐어? 아, 그러고 보니 누가 말해줄 일이 없었겠구나? 내가 말해준 적도 없을 거고.”
카마엘은 미처 생각을 못했다는 듯이 말하곤 내게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진운 너는 나, 카마엘의 계승자야.”
“...계승자요?”
“응. 네가 내 계승자가 된 건 네가 입문자의 시험에서 얻은 그 검 때문이고.”
“그 부러진 검 말씀이신가요?”
“응. 그게 내 조각이나 파편같은 거거든.”
나는 일단 인벤토리에서 부러진 검을 꺼내보았다. 최근에는 직접 싸울 때는 쓰지 않고 인벤토리에 넣어두기만 했던지라 오랜만에 제대로 잡아보는 느낌이었다.
“이게.. 카마엘님의 파편이라구요?”
내구도가 무한에다가 정보들이 죄다 잠겨 있으니 뭔가 심상치 않은 무기라는 생각은 했었다. 그런데 이게 천사의, 그것도 상당히 높아 보이는 천사의 파편같은 것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응. 그리고 그 파편은 좀 특별한 편이야. 다른 일반적인 파편이랑 다르게 그 검은 열쇠같은 역할을 수행하거든. 말하자면 다른 모든 파편을 다 모아도 그게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야.”
심지어 그냥 파편도 아니고 아주 중요한 파편인 모양이다.
“근데 파편이란 게 뭐죠? 이런게 지옥 여기저기에 숨겨져 있는 건가요?”
“음, 이건 설명하자면 조금 긴데... 뭐, 네 마력이 생각보다 많아서 시간은 많으니까 이야기 해줄게. 어차피 나랑 동반자가 된 마당에 너가 알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고.”
카마엘은 잠시 다른 곳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하는 듯 보였다. 그로부터 잠시 후 생각을 마친 카마엘이 다시 말을 꺼냈다.
“너, 일단 천계라는 곳이 있다는 건 알아? 나같은 천사들이 있는 곳 말이야.”
“음... 일단 천사들이 있는 걸 봐서 지옥 말고 다른 곳이 있다는 건 예상하고 있었어요.”
“그래? 천사를 어디서 또... 아, 그 기술세트 받을 때 봤겠구나?”
“네.”
그때도 남천사 하나와 카마엘 말고는 못 봤지만 어쨌는 본 건 본 것이었다.
“그럼 이야기가 편해지겠네. 너가 생각한 천사들이 있는 공간이 천계거든? 그런데 너도 보다시피 나는 그 천계에 소속된 천사야. 아니, 천사였지.”
천사였다고? 왜 과거형인걸까?
“천사였다는 건.. 지금은 아니라는 건가요?”
“응. 맞아. 지금은 사실 천사도 뭣도 아닌 상태지. 사실 실재로 존재한다고 보기도 어려우니까.”
내가 무슨 소리냐는 듯 아리송한 표정을 짓자 카마엘이 황급히 말을 이었다.
“이해가 잘 안되는 건 아는데, 일단 내가 하는 설명을 들어줬으면 좋겠어. 이게 다 사연이 있거든.”
“.....”
나는 궁금한 게 많았지만 일단 그녀 말대로 조용히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그 후 조금 더 생각을 정리한 카마엘이 입을 열었다.
“음, 사정을 설명하려면 먼저 5만년 전 쯤으로 돌아가야 해. 거의 태초 시절과 가까운 때의 이야기거든.
나는 그 시절 상당히 잘 나가는 천사였어. 그래봤자 미카엘이나 가브리엘처럼 인기 많고 리더쉽 있었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날 따르는 천사는 많았지. 왜냐하면 내가 천계에서 가장 강한 천사였으니까.
그 당시에 나는 나 자신의 강함에 취해 있는 상태였어. 적어도 천계 내에서는 나를 대적할 존재가 없었거든. 심지어 군단장이라는 미카엘도 나를 당해내지 못했다니까? 뭐 그 녀석이 천사들의 통솔은 더 잘 할지 모르지만 무위는 나보다 한 수 아래였지.
그러다 보니 나는 내가 뭐든지 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에 차 있었어. 거기다 멋대로 사고 치고 다니고 싸움질도 많이 하고 다녀서 천계에서는 망나니로 유명했지. 딱히 크게 문제 될 일은 한 적 없는데 말이야.
아무튼 그렇게 천계에서 꽤나 지루한 나날을 보내던 도중, 아주 갑작스럽게 큰 사건이 하나 벌어졌어. 온 천계가 다 뒤집어질 만한 일이었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누군가가 천계를 침범하기 시작했거든.
놈들은 침범하는데 그치지 않고 천사들을 죽이거나 천계의 환경을 망치고 다녔어. 천사들은 곧바로 그들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조사를 했고, 곧 그들이 악마들이었다는 사실을 알아냈어.
타천사 루시퍼를 선두로 한 악마들은 자신들의 정체가 탄로 나자 마자 천계에 전면전을 걸어왔어. 우리는 거기에 죽어간 천사들의 복수를 하겠답시고 호기롭게 응전했어. 악마들이 해봐야 얼마나 하겠냐는 식으로 방심에 물들어서 군단 몇 개만 동원해서 그들을 쫓아내러 갔지.
그 다음엔 어떻게 됬겠니? 맞아. 처참하게 패배해 버렸어. 전투에 동원되었던 천사들은 대부분이 죽었어. 죽지 않은 천사들은 악마들의 손에 떨어져 타천사가 되어 버렸어. 문제는 타락한 그 천사들이 군단의 중요한 핵심 전력들이었다는 거야. 천계에서도 얼마 없을 정도의 인재들이었지.
그렇게 한 번 크게 패배하고 나자 전세는 겉잡을 수 없이 기울어졌어. 미카엘은 그제야 부랴부랴 천사들을 챙겨서 악마들에게 대항했지만, 이미 너무 많이 밀린 상태라 별 소용이 없었어. 의미 없는 희생만 계속 이어질 뿐이었지.
그렇게 천계를 지켜낼 수 있다는 희망도 옅어져 갈 때, 나는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어. 워낙 내가 멋대로 행동하는 기질이 있다보니 군대에는 동원이 안된 상황이었어. 괜히 전선을 깨뜨리거나 아군의 명령 체계를 혼란시킬 수 있다고 말이야.
그래서 나는 결국 혼자서라도 나서기로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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