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초대자가 지옥에서 살아남는 법-44화 (44/61)
  • 〈 44화 〉 43. 갑론을박

    * * *

    사실상 입지 측면에서나 무력 측면에서나 이만한 악마들을 휘어잡고 모임을 진행할 수 있는 악마가 사탄이 유일했다.

    또한 이 자리에 있는 악마들은 모두 제 주제를 잘 알고 또 자기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이들이었다.

    사탄은 마기를 이용해 심플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상석을 만들어냈다. 그곳에 자연스럽게 앉은 사탄이 말을 꺼냈다.

    “그럼 지금부터 카마엘의 조각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도록 하지.”

    ***

    상석에 자리한 사탄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손가락을 한 번 튕겼다.

    딱 ­

    경쾌하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아가레스의 심처에 있는 모든 마기가 사탄의 의지에 따르기 시작했다. 다른 대악마의 마기를, 심지어 심처에 있는 마기를 뺐거나 점유하는 것은 본래 해당 악마에 대한 중한 모욕에 해당했다. 하지만 심처의 주인인 아가레스는 조금도 개의치 않아 했고, 사탄도 이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사탄은 악마들에게 그러한 존재였다.

    사탄의 손짓에 따라 막대한 양의 마기가 움직였다.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던 마기는 조각조각으로 갈라져서 주변으로 펴져나갔다. 흩어진 마기의 조각들은 저마다 특정한 모양을 만들었다. 잠시후 사탄이 움직인 마기는 전부 고풍스러운 롱 테이블과 의자들, 그리고 실내 장식들이 되어 심처를 연회장으로 탈바꿈 시켰다.

    사탄과 종종 모임에 참석해본 악마들은 알아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았다. 사탄과 별로 연이 없는 악마들도 잠시 벙 쪄 있다가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았다.

    이내 마기로 만들어진 연회장의 모든 자리가 악마들로 가득 찼다.

    “모두들 자리에 앉은 것 같으니 논의를 시작하겠다.”

    사탄의 웅혼한 목소리가 연회장 전체로 퍼져나갔다.

    “이번 대악마들의 비정규 논의는 얼마 전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 때문이다. 그저 그런 사건이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일도 없었겠지.”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아가레스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다들 알다시피 최근 제 1 계층에서 변절자들이 인간 초행자들을 습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물론 그들이 독단으로 벌인 일이 아니라 어떤 대악마의 지시를 받아서 한 일이었지. 여기까지는 딱히 문제될 것이 없다. 다소 적극적으로 나서는 악마들은 언제나 있어 왔으니까. 하지만,”

    사탄이 뿜어내는 마기가 아주 살짝 날카로워졌다.

    “공교롭게도 습격받은 초행자 사이에 아주 특별한 녀석이 섞여있었다. 무려 광천사 카마엘의 조각을 가진 초행자였지. 5만 년 전에 이곳으로 쳐들어온 그 카마엘 말이다. 그 광천사의 조각이, 그것도 1 계층에서 등장한 것도 놀라운데 거의 나타나자마자 습격을 받았다.”

    사탄의 시선이 느릿하게 아가레스에게로 옮겨졌다.

    “누군가 발 빠르게 눈치를 채고 손을 쓰려 한 것이지. 이토록 중대한 사안을 다른 대악마들과 아무 논의도 없이 말이다.”

    시선을 받은 아가레스가 고개를 살짝 들어 사탄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생각하지, 아가레스? 이 일에 가장 크게 연루된 것으로 보이는 네 의견이 듣고 싶군.”

    그러자 연회장 안의 모든 악마들이 아가레스를 주목하였다. 아가레스는 그 모든 시선을 받으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아가레스를 바라보는 릴리스의 눈에 불안감이 깃들었다. 사탄이 주도해서 상황을 이끌어 가는 지금 그가 지목 받았다는 것은, 사탄이 아가레스를 모두의 앞에서 일을 저지른 악마로 내세웠다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가레스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렇게 쏟아지는 시선들 속에서 잠시 동안 닫혀 있던 아가레스의 입이 열렸다.

    “이미 다들 알고 계신 것 같으니 더 이상 숨기지 않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번에 제가 카마엘의 조각을 가진 자를 발견하였고 그를 제거하고자 변절자들을 이용해 초행자들을 습격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실패하였죠.”

    아가레스의 과감한 인정에 악마들이 조금씩 술렁거렸다. 다들 그가 최대한 회피하고 빠져나가려는 움직임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아가레스의 시인을 들은 사탄이 질문했다.

    “광천사의 조각을 제거하려 움직인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허나 왜 다른 대악마들과의 상의는 전혀 거치지 않고 일을 벌인거지? 다른 일도 아니고 그 카마엘이 얽힌 일은 혼자만의 판단으로 행동할 일이 아닐텐데?”

    그러자 그 질문을 예상했다는 듯 아가레스가 막힘 없이 대답했다.

    “물론 그만큼 중대한 사안을 저 혼자 독단으로 처리한 것은 잘못입니다. 하지만 저도 아무 생각 없이 그리 행동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이 일을 모두에게 알리고 공개적으로 일을 처리할 경우, 불순한 움직임을 보이는 이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불순한 움직임이라면?”

    “카마엘의 조각이 나타났다는 사실이 퍼질 경우, 저는 분명히 악마들 중 누군가는 그 힘을 취하려 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조각을 탈취하여 자신의 힘으로 만들려고 하던, 조각의 소유자와 계약하여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던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힘에 눈이 멀어 행동하는 자들이 일을 그르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 후환이나 변수가 없도록 없애야 마땅한 것을 취하려 하니 필시 좋지 않은 미래를 불러올 것이라 보았습니다.”

    아가레스가 고개를 들어 모든 악마를 둘러보며 말을 맺었다.

    “그래서 저는 홀로 조각 소유자를 처단하려 했습니다. 이상입니다.”

    아가레스의 말이 끝나자 또다시 악마들 사이로 술렁임이 번져나갔다. 아가레스가 잘못을 인정했을 때보다 훨씬 소란스러운 수준이었다.

    손을 들어 웅성거리는 악마들을 조용히 시킨 사탄이 아가레스에게 물었다.

    “흠. 아가레스 네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한 것인지는 알겠다. 그런 이유로 하나 묻고 싶은데, 그럼 너는 광천사의 조각과 그 소유자를 무조건 죽여야 한다는 입장인가?”

    “물론입니다. 카마엘은 5만 년 전에도 우리의 허를 찌르는 공격을 수도 없이 해왔습니다. 그런 그녀가 남긴 조각 역시 무슨 수작이 부려져 있을지 모릅니다. 따라서 저 광천사의 조각은 반드시 소멸시켜야 합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욕심을 위해 사용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하핫!”

    아가레스가 자신의 의견을 정리해서 밝히자 어디선가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숨길 생각도 없는 듯이 노골적인 수준의 웃음이었다.

    아가레스의 미간이 구겨지며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조소를 날린 것은 세 쌍의 검은 날개를 가진 악마, 루시퍼였다. 루시퍼는 아가레스를 바라보며 기분 나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뭐가 웃겨서 웃는 거지?”

    아가레스가 분노를 절제하며 말했다. 질문을 받은 루시퍼가 사탄 쪽을 바라보았다. 모임을 진행하는 악마가 사탄인 지금은 사탄이 발언권을 주어야 말할 수 있었다.

    사탄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루시퍼가 발언을 시작했다.

    “일단 비웃은 건 미안해, 아가레스. 네가 한 말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웃었지 뭐야? 사실 박장대소를 터트리려다 간신히 참은 거니까 봐줬으면 좋겠어.”

    그 말을 들은 아가레스의 마기가 날카롭게 뿜어졌다. 하지만 그 마기를 정면으로 받은 루시퍼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우리 악마들이 언제부터 그렇게 겁쟁이가 되었지, 아가레스? 천사들이 무슨 수작을 부렸을지 모르니 저 귀한 보물을 없에자? 나 참. 애초에 저 조각은 이번에 다시 등장하기 전까지 쭉 지옥에 있었어. 그리고 그 광천사가 죽으면서 자신의 조각에 뭔가 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해? 그게 가능할 정도였으면 애초에 우린 그녀를 죽이지도 못했겠지.”

    아가레스가 일어나 뭐라고 반박을 하려 했으나 사탄이 손을 들어 저지했다. 아가레스는 분을 삭히며 다시 자리에 앉아야 했다.

    “설령 저 조각을 우리 중 하나가 흡수하는 게 위험부담이 크다 하더라도, 조각의 소유자를 우리 편으로 만들면 되는 일이야. 그렇게 한다면 우리 쪽의 전력 증강은 물론 천계 놈들이 강해지는 것도 막을 수 있겠지. 적어도 그놈들이 조각을 회수해서 자기들 것으로 만들지는 못할테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그 조각의 소유자를 어떻게든 이쪽으로 끌어들여야 해. 무턱대고 죽이는 게 능사가 아니라니까? 죽이려 한다고 해서 천사놈들이 보고만 있을 리가 없고, 죽여도 조각이 다시 어디론가 사라지면 무슨 소용인데?”

    끊임없이 사탄 쪽으로 눈길을 주던 아가레스에게 드디어 사탄이 발언권을 주었다. 아가레스는 바로 반박에 나섰다. 그러자 사탄은 둘이 논박을 이어가도록 아예 둘 모두에게 발언권을 주어 버렸다.

    “말도 안되는 소리. 카마엘의 조각을 가진 자가 그리 쉽게 이쪽으로 넘어올 것 같으냐?”

    “안 해보면 모르는 거지. 그 여자의 조각을 가졌다고 무조건 천사들에게 친화적일 거라 생각하는 거야? 아, 성급해 빠진 누군가가 습격만 안 했어도 더 쉽게 포섬할 수 있었을 텐데.”

    “...그것만이 아니다. 네 말대로 우리 쪽으로 포섭시킨다고 해서 그 조각 소유자가 우리 모두의 것이 되는 게 아니지 않으냐? 이 자리에 있는 대악마 중 하나의 것이 되겠지. 그럼 그놈이 막대한 힘을 손에 넣는 것을 경계하는 다른 악마들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를 방해하며 조각 소유자를 차지하려고 싸우겠지.”

    “그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아. 원래 악마들은 그렇게 서로 경쟁하고 이기려 들 때 더 진가가 드러나니까. 의욕적으로 다들 달려들면 적어도 천사놈들이 먹기 전에 우리가 먹는 건 똑같은데?”

    “사안의 중대함을 보면 그리 간단하게 정할 일이...”

    그렇게 루시퍼와 아가레스의 논쟁은 한참을 더 이어졌으나 마땅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 서로 조금도 의견을 굽히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우...”

    그런 둘을 한참 지켜보던 사탄이 한숨을 쉬며 둘의 대화를 멈추었다. 사탄이 멈추라는 손짓을 하자 격렬하던 논쟁이 한순간에 끝이 났다.

    그후 잠시 둘의 대화를 복기하던 사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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