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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자가 지옥에서 살아남는 법-43화 (43/61)
  • 〈 43화 〉 42. 긴급 회의

    * * *

    마스테마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통통 튀는 발걸음으로 이동하여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이 히죽거리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반면 아가레스와 릴리스의 입장에서는 거의 혼이 빠져나갈 듯이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렇게 군주급 악마 하나와 신격의 악마 하나가 얼이 빠진 상태로 주변을 살피고, 또 다른 군주급 악마 하나가 팝콘을 씹으면서 관전을 하는 동안 수많은 악마들이 아가레스의 심처로 돌입해왔다.

    ***

    고요하기 짝이 없던 아가레스의 심처에 온갓 형태의 마기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온통 뒤섞여 버린 팔레트 위 물감처럼 수많은 마기가 서로 섞여 들어갔다.

    그리고 그 각각의 마기의 중심에서는 저마다 강력한 기세를 뿜어내는 악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것이 전부 신격급이나 군주급 이상이었다.

    아가레스와 릴리스는 머릿속이 혼란스럽기 그지 없었으나 일단 마음을 다잡고 진정했다. 이미 사태가 벌어진 마당에 당황만 하고 있는 것은 아무 도움이 안된다. 정신을 차리고 최대한 상황에 맞는 대처를 해야 했다.

    그렇게 두 대악마가 열심히 정신을 다잡는 동안 수많은 악마들이 아가레스의 심처로 전이를 마쳤다. 본래 군주급 악마의 심처에서는 그 심처의 주인이 다른 방문자들에게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한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격이 떨어지거나 엇비슷한 대상에게 통하는 것이지, 군주급과 신격의 악마들이 무더기로 몰려오면 아무 의미가 없다.

    “이야, 내가 살다살다 아가레스 안방에 들어오는 일도 생기는군. 잘 지냈나, 아가레스? 흠, 안색이 안 좋은 걸 보니 잘 못 지냈나 보구만.”

    약간의 번개와 구름을 몸에 두른 한 군주급 악마가 아가레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여유만만한 태도로 인사를 건네는 그 악마는 림몬이었다. 림몬의 입에는 은근한 조소가 걸려있었다.

    “왜 그리 표정이 안 좋나, 아가레스? 오늘의 주인공은 자네 아닌가? 누군가가 온갓 군주급과 신격의 악마들을 자신의 심처로 불러들인 건 근 1만년 만에 처음 아닌가! 대단한 업적을 이루었으니 자랑스러워 해야지! 하하하!”

    노골적인 비야냥에 아가레스의 표정이 구겨지는 찰나, 둘의 사이를 파고든 또 다른 악마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게 만나자고 해도 안 만나주더니 꼭 이런 자리에서 만나야겠어요? 참 섭섭하네요, 아가레스.”

    말을 건 악마는 상당한 요염함을 자랑하는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 손에는 빛나는 금잔을 들고 있었다. 그 안에 들어있는 붉은 액체를 한 입 마신 그녀가 혀로 입술을 핥으며 아가레스에게 은근한 웃음을 보냈다.

    림몬은 갑작스레 대화를 끊은 불청객에 대해 불쾌감을 드러냈지만, 불청객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을 본 아가레스의 표정은 림몬의 비아냥을 들을 때보다 더 일그러졌다. 대놓고 짜증을 담은 말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탕녀 바빌론까지 온건가?”

    “그 앞에 붙는 탕녀 좀 떼면 안되나요? 누가 들으면 엄청 가벼운 여자인줄 알겠어요.”

    탕녀 바빌론의 눈과 입은 여전히 미소를 그리고 있었지만 목소리에 약간의 살기가 담긴 것 같았다. 하지만 아가레스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됬고,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이나 해봐. 갑자기 한가락 하는 악마들이 죄다 내 심처로 쳐들어오는 이유가 뭐지?”

    “어머. 설마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니죠?”

    “.....”

    아가레스가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입술을 짓씹었다.

    “이번에 우리 자기가 벌인 일이 보통 일이어야 말이죠. 이것도 이야기를 듣자 마자 다들 정신없이 이곳으로 뛰어온다는 걸 제가 말린 거에요. 그래도 다들 시기를 정해서 방문하자고 말이죠. 아니었으면 지금 자기는 연이어 들이닥치는 악마들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을 걸요?”

    “.....”

    “어머, 자기를 위해 수고해준 여자에게 인사 한 마디도 못 해주는 건가요?”

    “...고맙다.”

    “후후, 좋아요. 그래도 이번 일이 꼭 나쁜 일은 아니네요. 이렇게 자기 얼굴도 볼 수 있고, 고맙다는 말도 들을 수 있으니 말이에요.”

    “그놈의 자기를 천 명 단위로 보유한 여자에게 듣고 싶지 않군.”

    “어머. 그런 걸 신경쓰는 타입이었나요? 괜찮아요. 그래도 자기는 제 자기들 중에서도 순위권에 속하니까요.”

    탕녀 바빌론이 아름다운 눈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아가레스는 혀를 차며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렇게 아가레스가 다른 악마들을 만나는 동안 릴리스에게도 한 악마가 접근했다.

    “릴리스.”

    악마가 이름을 부르자 릴리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악마는 깔끔한 정장 차림에 말끔하게 머리를 정리한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그의 뒤에는 검게 물든 여섯장의 날개가 접혀있었다.

    그와 마주친 릴리스의 눈이 급격히 차가워졌다.

    “루시퍼...”

    “오랜만이야. 한 200년 만에 보는 건가?”

    생글생글 웃는 그의 얼굴과 다르게 릴리스의 표정은 펴질 줄을 몰랐다.

    “무슨 낯짝으로 내게 말을 거는거죠? 시간이 흘렀으니 내가 그때의 일을 어련히 용서한 줄 아는 건가요?”

    살벌한 릴리스의 기세에 루시퍼가 한발짝 물러나며 말했다.

    “워워, 진정해. 사실 나도 딱히 너와 말을 섞고 싶어서 온 건 아니니까.”

    미미하게 표정이 굳은 루시퍼에 반해 여전히 약간의 표정 변화도 없는 릴리스가 되물었다.

    “그럼 말을 안 걸면 되는 거 아닌가요? 왜 서로 보기 싫게 얼굴을 비추는지 모르겠군요.”

    “음, 그럴 수는 없어. 내가 너한테 말을 걸고 싶은지 아닌지 와는 상관 없이 꼭 확인해야 하는 게 있거든.”

    “...?”

    루시퍼가 손가락을 들어 아가레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 혹시 저 놈이랑 한 패야?”

    갑작스러운 그 말에 릴리스는 물론 멀리서 은근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가레스까지 꽤나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루시퍼가 이렇게 갑자기 찌르고 들어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간신히 표정관리에 성공한 릴리스가 말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요. 제가 아가레스와 한

    패라니요?”

    그런 둘의 반응을 본 루시퍼의 입꼬리가 긴 호선을 그었다. 기분 나쁜 미소를 만면에 띄운 그가 말을 이었다.

    “아니, 별건 아니고 너가 우리들이 단체로 오기도 전에 혼자 아가레스의 심처에 와서 오붓하게 대화하고 있길래 하는 말이야. 누구나 오해할 만한 상황 아니야? 꼭 일을 벌이다 실패해서 급하게 회의라도 하는 것 같잖아?”

    “회의라니 무슨...”

    “무슨 회의겠어? 아주 맛있는 것을 둘이서 독차지 하려다 놓쳐버린 욕심 많은 것들의 회의겠지. 들어보니 원래부터 둘이 꽤 사이가 좋았다며? 서로 작당모의 하기는 딱 좋은 상대 아닌가?”

    정곡을 찌른 말이었지만 릴리스는 일단 시치미를 떼기로 했다.

    “근거 없는 억측이에요. 난 그저 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듣고 싶어서 미리 온 것 뿐이니까요.”

    그 말을 한 릴리스는 심처가 묘하게 조용해진 것을 느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대부분의 악마들이 자신과 루시퍼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여전히 생글거리는 미소를 지은 루시퍼가 말했다.

    “그래? 뭐 너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근데 릴리스, 중요한 건 네 의견이 어떻느냐가 아니야. 다른 악마들이 보기에 네가 어떻게 보이느냐지.”

    “.....”

    기세 좋게 말하던 릴리스의 입이 다물어졌다. 확실히 지금 상황에서 릴리스 혹은 아가레스가 뭐라고 말하던, 다른 악마들이 둘을 보는 시선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아가레스가 일을 벌이기 전 릴리스를 만났다는 소문까지 공공연하게 퍼진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결국 릴리스와 아가레스가 할 말이 없다는 듯 침묵을 지키자 다른 악마들의 의심은 더 확신을 얻게 되었다.

    그때 침묵을 깨고 한 악마가 앞으로 나섰다.

    “이제 그만하지.”

    모든 악마들의 시선이 그 악마에게로 쏠렸다. 그렇게 그를 쳐다본 악마들은 대부분 놀란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말을 꺼낸 이가 상당히 예상 밖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 악마는 칠흙같이 검고 헐렁한 옷을 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피부는 창백할 정도로 하얀색이어서 피부색과 옷색이 꽤나 대비되었다. 짙은 검은색의 머리칼과 눈동자를 가진 그는 몸에서 뿜어지는 마기 하나로 모든 악마들을 압도하는 듯 보였다.

    그 막대한 마기에 저항하여 제대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은 군주급 악마 중에서도 최상위이거나 신격급 악마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 모습을 본 릴리스가 나직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사탄...”

    릴리스를 잠깐 바라본 사탄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보기엔 이렇게 생산성 없는 이야기만 하다가 아무 성과 없이 모임이 끝날 것 같군. 카마엘의 조각이라는 중대한 사안이 걸려 있는데 그래선 안되지 않나?”

    사탄이 모두를 바라보며 말하니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악마들이 숨을 죽이고 집중하였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내가 주도해서 논의를 진행해볼까 하는데, 더 좋은 의견이 있다면 말해주었으면 좋겠군.”

    물론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악마는 아무도 없었다. 사실상 입지 측면에서나 무력 측면에서나 이만한 악마들을 휘어잡고 모임을 진행할 수 있는 악마가 사탄이 유일했다.

    또한 이 자리에 있는 악마들은 모두 제 주제를 잘 알고 또 자기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이들이었다.

    사탄은 마기를 이용해 심플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상석을 만들어냈다. 그곳에 자연스럽게 앉은 사탄이 말을 꺼냈다.

    “그럼 지금부터 카마엘의 조각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도록 하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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