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41. 긴급 회의
* * *
거기서 안내를 마치고 초행자들을 해산시킨 한민아 교관은 모두에게 요 며칠은 푹 쉬어두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컨디션을 최대로 끌어올려야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에 충실히 따르기로 하며 숙소로 돌아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제 1 계층이 수습과 대비로 바쁜 한편, 군주들이 자리한 제 8 계층에서는 소란이 조금씩 번져나가고 있었다. 엉덩이 무겁기로 유명한 군주나 신격의 악마들 몇이 움직이고 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
“쯧...”
새하얀 백발의 남성이 무언가 상당히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찼다. 그의 어깨에 자리를 잡은 하얀색 매 역시도 심기가 불편한지 연신 퍼드덕 거렸다.
남성이 앉아 있는 곳은 거대한 악어의 등이었다. 악어는 보기만 해도 기가 질릴 듯이 커다란 몸집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크기가 무색하게 남성의 아래에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침묵을 유지했다.
“쓸모 없는 것들...”
남자가 연신 혀를 차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자 악어의 등이 더 움츠러들었다.
“죄송합니다, 아가레스님.”
악어가 공손한 말투로 말했다.
“제가 뽑은 종들이 변변치 못하여 일을 그르치고 말았습니다. 저의 불찰입니다.”
악어는 안 그래도 땅에 닿아있던 고개를 더 아래로 숙였다. 그럼에도 잔뜩 지푸려진 남자의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다.
“그래, 맞다. 일을 아주 시원하게 망쳐버렸지.”
“.....”
“잃은 것은 많고 얻은 것은 적구나, 나의 충실한 종복아. ”
“죄송합니다.”
“후우...”
백발의 남자, 아가레스는 답답한 마음을 가득 담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 한숨에 악어의 등이 움찔 거렸다.
“너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처벌도 처벌이지만, 지금은 일을 수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번 습격 사건으로 달라지는 것이 아주 많을 거야.”
유구무언인 악어는 조용히 주인의 말을 들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우리의 계약자들을 이용한 초대자 습격 사건이 아니었다. 초행자들을 노린 최초의 습격이었고, 불순한 씨앗을 배제하기 위한 안배였지.”
“.....”
“내가 다소 무리해서라도 급하게 일을 추진한 것은 그 조각의 존재를 최대한 감추어야 하기 때문이었어. 이미 눈치를 챈 놈들도 있긴 하겠지만 그것들이 행동하기 전에 일을 끝내야 했다. 그래서 아직 아무도 행동에 나서지 않았을 때 제거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었지.”
“.....”
“근데 그것이 보기 좋게 실패해 버렸구나. 하필 네가 보낸 것이 네 계약자으로 유명한 클라운인가 뭔가 하는 년이어서 누가 일을 저질렀는지도 명확하고 말이야.”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이번 일에 대한 책임과 대가는 모두 제가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악어의 사죄하는 말에 남자의 미간이 오히려 더 구겨졌다.
“아니, 아니다. 네가 책임지겠다는 말 하나로 무마될 만큼 간단한 상황이 아니란 말이다.”
“.....”
“이번 일로 그 망할 광천사의 조각의 존재가 모든 초월자에게 알려지게 될거다. 그 조각을 초월자 중 누군가가 제거하려 했다는 것도 말이야. 이게 무슨 뜻인지 아나?”
“.....”
“앞으로는 나만이 아니라 온갓 악마들과 천사들이 그 조각에 주의를 기울일 거란 이야기다. 그 광천사가 남긴 것이라면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 말이지. 그중에는 나처럼 빠르게 행동에 나서는 놈들도 많을 거다.”
그제야 악어는 자신이 망친 이번 일이 어떤 파문을 일으킬지 알게 되었다. 넓다란 등이 가늘게 떨렸다.
“그 말씀은...”
“그래. 이번 일이 이미 우리끼리 조용히 처리할 수준을 넘어섰다는 말이다. 우리 손을 떠난 것을 넘어서 아마 온 지옥과 천국과 하계까지 들썩 거리겠지. 어쩌면 까마득한 시간을 조용히 보낸 엉덩이 무거운 것들도 움직일지 모른다. 그들이 당장 움직이지 않더라도 결국엔 움직이도록 일은 크게 키우는 놈이 나올 것 같고.”
“...대대적인 혼란이 찾아 오겠군요.”
“그래. 그리고 그런 혼란은 악마들을 깨워서 활동하게 만들기 아주 좋은 축제 같은 것이지. 놈들도 전부 오랜 시간동안 조용히 사느라 좀이 쑤셨을 것이니.”
아가레스가 다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그런 혼란이 찾아오는 것은 예정된 일이고 우리가 거기서 할 일은...”
그 순간, 아가레스가 있는 장소에 이질적인 마기가 흘러 들어왔다. 아가레스의 마기를 조금씩 밀어내는 그 마기는 그의 정면에서 뿜어지고 있었다. 아가레스가 말을 멈추고 앞을 바라보았고, 악어와 하얀 매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짙은 마기를 뚫고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피가 쏟아지는 듯한 색깔의 드레스를 입은 여인. 검은색의 머리카락과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돋보였다.
조용히 아가레스를 향해 걸어오던 여인이 어느 순간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살짝 내리고 있던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아가레스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릴리스.”
릴리스의 붉은색의 눈동자가 아가레스를 담았다.
“아가레스.”
황홀한 수준의 미성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조각을 가진 자를 제거하는 데 실패하셨더군요.”
“.....”
“실패한 것으로 모자라 상황을 최악으로 만드셨구요.”
“.....”
이번엔 아가레스가 유구무언이 되어 입을 다물었다.
“됐어요. 이미 벌어진 일에 잘잘못을 따지는 것도 의미 없는 일이지요. 저는 다만 당신이 이번 일 이후로 어떻게 할 생각인지 알고 싶어서 온거에요. 설마 이 상황에 원래 예정되었던 제 권능 사용을 고수할 생각은 아닐 거라 믿어요.”
“...흠.”
“어쩔거죠, 아가레스? 이미 악마들과 천사들은 다들 움직이고 있을 거에요. 뭔가 생각해둔 대책이 있으면 최대한 빨리 이행해야 해요. 아니면 그나마 있는 기회들도 전부 없어질 거에요.”
“.....”
잠시 미간을 주무르던 아가레스가 말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맞아, 아가레스. 다들 똥줄 타는 듯이 움직이고 있다고. 뭔가 수작을 벌이려면 빨리 해야하지 않을까?”
갑작스레 들려오는 다른 목소리에 아가레스와 릴리스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그들이 함께 바라본 곳에서는 검은 날개 한 쌍을 달고 있는 누군가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응? 그리고 하는 김에 나한테도 귀띔 좀 해주고 말이야. ”
장난스럽게 히죽 웃고 있는 금발의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를 본 아가레스가 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마스테마...”
“응, 아가레스. 그렇게 애절하게 내 이름을 부를 정도로 내가 반가웠어? 하긴 우리가 안 본지 좀 오래되긴 했지.”
아가레스와 릴리스의 눈이 동시에 차갑게 변했다.
“여기는 내 심처다. 네가 들어오는 것을 허락한 적은 없을텐데?”
“그렇긴 한데, 우리 사이에 뭘 그런 걸 따지니. 그럼 내가 많이 섭섭해.”
“헛소리 말고 나가라. 아무리 네년이라도 내 심처에 멋대로 발을 들이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서늘한 아가레스의 축객령에 마스테마는 과장된 몸짓으로 겁을 먹은 척을 하며 말했다.
“어이쿠. 우리 아가레스가 좀 예민한 것 같네. 얼마 전에 아무도 모르게 벌인 수작질이 실패해서 그런가?”
“.....”
“에이, 그렇게 살벌한 표정 짓지 마. 이미 알만한 놈들은 다 아는 사실이잖아?”
그러자 아가레스의 기세가 한층 강해지기 시작했다. 마스테마는 이러다 진짜 내쫓기겠다고 생각했는지 열심히 팔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이, 그러지 말고 우리 융통성 있게 나가자구. 어차피 조금 있으면 손님들이 왕창 들이닥칠 텐데 말이야. 나 하나가 조금 일찍 온다고 달라지는 건 없지 않겠어?”
그 말을 들은 아가레스와 릴리스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아가레스가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이 되물었다.
“...뭐?”
“응?”
“손님들이 더 온다고?”
“응. 오늘 네 심처에서 다들 모이기로 했는데? 몰랐어?”
“그게 무슨...”
“으음? 몰랐어? 진짜 몰랐던 거야?”
마스테마가 진심으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에 반해 아가레스와 릴리스의 표정은 당황으로 물들었다.
“허어. 정말 아무도 너한테 말을 안 해준거야? 너 악마관계가 너무 협소한 거 아니야? 어쩜 네 안방에서 모이기로 한 약속도 모를 수가 있니?”
“...무슨 말이죠? 갑자기 악마들이 오늘 여기서 모인다는 건가요?”
“그래, 릴리스. 악마관계가 협소한 건 너도 마찬가지인가 보구나?”
마스테마는 깔깔거리며 한 번 웃어 젖히고는 말을 이었다.
“이번에 오랜만에 엄청 많이들 모인다던데? 듣기로는 3천년 정도 잠만 처자던 마몬이라는 악마도 나온대. 거기다가 힘 좀 쓴다는 놈들은 거의 다 오는 모양이야.”
믿기지 않는 말에 아가레스와 릴리스가 눈만 껌뻑이고 있을 때, 갑자기 심처 곳곳에서 심상치 않은 마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다양하고 색다른 마기들이 아가레스의 조용한 심처를 물들이며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음, 이제 슬슬 오는 모양이네.”
마스테마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통통 튀는 발걸음으로 이동하여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이 히죽거리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반면 아가레스와 릴리스의 입장에서는 거의 혼이 빠져나갈 듯이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렇게 군주급 악마 하나와 신격의 악마 하나가 얼이 빠진 상태로 주변을 살피고, 또 다른 군주급 악마 하나가 팝콘을 씹으면서 관전을 하는 동안 수많은 악마들이 아가레스의 심처로 돌입해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