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 32. 황충(??)
* * *
“알았다, 알았어. 바로 할 일이나 하자는 거지? 나 참, 치사해서 말 안 한다 이제.”
다른 사람들 보다 비교적 키가 작은 한 명이 조잘거리던 입을 다물었다.
이내 후드를 쓴 사람들이 조용히 일렬로 늘어섰다. 나뭇가지의 끝을 딛고 이동하는데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묵묵히 밑을 내려다 보는 그들의 아래에는 숲 입구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교관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한동안 아래를 내려다 보던 도중 방금까지 떠들던 한 명이 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더 시간 끌어봤자 의미 없고, 이제 타이밍 된 것 같은데? 지금 시작할까?”
그가 무슨 말을 해도 반응하지 않던 다른 사람들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을 본 수다쟁이가 입이 댓발 나온 채로 손을 비틀었다.
그러자 넉넉한 소매에서 완드 하나가 빠져나와 비틀린 손에 잡혔다. 완드는 거무튀튀한 덩쿨 두 줄기가 서로 꼬인 듯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자, 그럼 우리 ‘악어’님이 주신 귀한 물건을 한 번 써볼까나?”
어느새 수다쟁이의 반대쪽 손에는 새로운 물건이 쥐여져 있었다. 검붉은 살덩이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피륙이 뱀처럼 꿈틀대면서 끊임 없이 모양을 바꾸는 것이 본능적인 혐오감을 일으켰다.
“흐읍!”
그것을 보던 수다쟁이가 오른손의 완드를 들어 살덩이의 가운데를 강하게 내리찍었다. 기다란 검은색의 완드가 살덩이를 깊숙히 파고 들어갔다.
‘제물 공양 중급 악마 지정 연결’
‘권한 요청 층계 제한의 일시적 해제’
수다쟁이가 무언가 기술을 사용하자 완드에 꽂힌 살덩이가 흐물거리더니 핏물처럼 녹아 버렸다. 그리고는 한 방울도 남김 없이 완드로 흡수 되었다.
핏물을 빨아들여 검붉은 색으로 변한 완드를 들어올린 수다쟁이가 숲 쪽을 향해 그것을 겨누었다.
그 상태에서 수다쟁이가 완드에 마기를 듬뿍 주입하였다. 완드는 마치 스펀지처럼 주인의 마기를 탐욕스럽게 흡수했다. 막대한 양의 마기를 머금은 완드의 색이 더욱 진해져 갔다. 그렇게 한없이 마기를 주입하던 수다쟁이가 슬슬 지치는지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나 슬슬 마기 바닥 날 것 같아! 누가 지원 좀 해줘!”
수다쟁이의 외침에 그를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이 움직였다. 후드를 쓴 사람들 전부가 수다쟁이 주변에 둘러섰다. 자리를 잡은 모두가 몸 안에 쌓인 마기를 밖으로 사출하여 수다쟁이에게 전해주었다.
더 막대한 양의 마기가 흘러들어오자 완드는 신난다는 듯이 마기를 빨아들였다. 정말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한없이 마기를 받아들였다. 수다쟁이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이마에도 송골송골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동안 마기를 먹어 치우던 완드는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점점 기세가 약해지더니 이내 완전히 흡수를 멈추었다.
“후우, 드디어 끝났네.”
턱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낸 수다쟁이가 말했다. 힘들어 보이는 안색과는 다르게 입은 진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역시 1 계층의 제약이 강하긴 한가봐? 이만한 제물을 바치고도 마기를 산더미처럼 잡아먹으니, 원.”
마기를 주입하는 작업이 끝난 완드는 이제 칠흙같은 검은색을 띄고 있었다. 수다쟁이는 완성된 완드를 높게 치켜들었다.
‘계층간 임시 관문 활성화’
‘지정 연결된 중급 악마용 관문 형성 3개’
‘첫 번째 관문 개방’
그 직후 완드가 기이하게 꿈틀거리며 늘어나기 시작했다. 완드를 이루던 두 개의 덩쿨 줄기 같은 것이 서로 분리되며 양옆으로 뻗어나갔다. 어느 정도 길이가 길어지자 두 줄기는 서로를 향해 굽어지며 다시 가까워지다가 끝부분을 맡대었다.
그러자 전체적으로 줄기로 이루어진 원과 같은 것이 만들어졌다. 커다란 원 모양의 형태로 변화를 마친 완드는 잠시 조용하다가 갑자기 살아있는 것처럼 맥동하기 시작했다. 줄기가 전체적으로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검붉은 기운 같은 것을 흘려대었다.
그렇게 맥동하며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는 원 안쪽에서 갑작스레 무언가 비틀리는 듯한 모습이 보였다. 그 비틀림은 점점 심해지더니 원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커져나갔다.
그러자 그 비틀림 너머로 어떤 다른 공간이 보이기 시작했다. 온통 나무밖에 안보이는 환란의 숲과는 다르게 어두운 사막과도 같은 장소였다.
원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던 수다쟁이가 다시 입을 달싹였다.
‘제 4 계층 연결 완료’
‘지정된 중급 악마 호출’
‘로커스트(Locust, ??)’
그로부터 잠시 후, 원 안의 공간에서 우레와 같은 날개소리가 들려왔다.
***
처음 그렘린 무리를 마주친 이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다른 그렘린 무리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때마다 마석을 나눠 가진 탓에 다들 1에서 2 이상 레벨을 올린 상태였다.
“슬슬 다른 악마 좀 나오면 안되나?”
벨이 저렇게 여유 넘치는 소리를 할 정도로 순조로운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레벨 하나가 올라서 25레벨이 된 나는 특성 하나를 새로 얻을 수 있었다.
10레벨에 기술 하나를 얻었고 25레벨에 특성 하나를 얻었으니 기술이나 특성을 얻는 레벨 시점이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거기다 열심히 그렘린의 마석을 씹었더니 그렘린의 기술 하나를 획득했다. 10% 확률로 발동하는 ‘마력 흡수형 소화기관’의 효과였다. 입문자의 시험에서 임프를 열심히 잡았을 때는 아쉽게 발동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운 좋게 얻어걸린 모양이었다.
아무튼 얻은 특성과 기술을 확인하기 위해 오랜만에 초대자 정보를 확인하였다.
초대자 정보
이름: 김진운
Lv 25
자격: 초대자
직업: (없음)
칭호: ‘최악의 시험을 통과한 자’외 2개
고유특성
절대이성(??): 언제나 본능과 감정보단 이성이 우선권을 가진다.
정신계열...
마력 흡수형 소화기관: 마석을 먹는 괴상한 식성을 가진 이에게 딱 맞는 소화기관.
마석을 먹어서...
확장된 체내 마력 순환로: 체내에 마력이 순환하는 통로가 확장되고 더 튼튼해진다. 마력의 낭비가...
일시적 공간 점유형 마력: 마력이 주변 공간을 일시적으로 장악하여 자신의 성질을 반영한다. 마력을 많이, 오랫동안 사용할 수록 공간점유의 효과와 지속시간이 늘어난다.
마력이 주변 공간을 점유하는 동안 본래 마력의 속성 또는 성질이 해당 공간 내에서 50% 효율로 발현.
기술
열폭발: 사용자를 중심으로 5m 반경의 반구에 해당하는 범위 안에서, 원하는 장소에 열폭발을 일으킬 수 있다. 사용시 투입하는...
단계별 가속: 사용자의 신체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가속한다. 1에서 3단계까지...
도약: 뛰어오르는 동작을 훨씬 자연스럽게 할 수 있으며 도약할 수 있는 거리와 높이가 늘어난다. 마력을 사용할 경우 훨씬 성능이 좋아진다.
기술세트
세라프 카마엘(SeraphCamael)의 수호 검술
새로 추가된 특성은 ‘일시적 공간 점유형 마력’이었다. 내 마력의 주변 공간이 일시적으로 내 마력의 성질을 띄게 되는 특성이었다. 성화(?火)라는 아주 우수한 속성을 공간에 반영할 수 있다면 전투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효율은 본래의 50% 정도지만 말이다.
그렘린에게서 얻은 ‘도약’이라는 기술은 말 그대로 잘 뛰어오르게 해주는 기술이었다. 어찌보면 쓸모 없어 보일 수 있으나 상황에 따라 적절히 사용한다면 꽤나 좋은 효율을 낼 것 같다. 마력에 따라 성능이 상승한다고 하니 위급할 때 마력을 때려넣어서 자리를 이탈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몇 가지 쏠쏠한 수확을 거두며 그렘린들을 청소해 나가고 있을 때였다.
“이거 이대로면 악마 둥지 터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맞는 말이다. 단지 숫자만 많고 수준이 지금과 똑같다면 분명히 ”
벨의 말에 대답하던 린펠의 말은 도중에 끊어질 수 밖에 없었다.
갑자기 우레와 같은 굉음이 모두의 고막을 두들겼기 때문이다.
우우우우우우우우웅 !!
“허억!”
“흐윽!”
무언가가 격렬하게 진동하는 소리와도 같은 소음이 주변을 장악했다. 마치 숲 전체가 소리에 뒤덮인 것처럼 다른 모든 소리가 그 굉음 하나에 잡아먹혔다.
나를 포함한 팀원 전부가 빠르게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고막을 뒤흔드는 그 소리를 온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뭐야 이거!”
“끄으으윽!”
“꺄아아아악!”
여기저기에서 팀원들의 비명 소리 혹은 소리지르는 소리가 미약하게 들려왔지만 거기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우리는 그저 귀를 꾹 누른 채로 굉음이 잦아들기를 바라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향상된 감각이 원망스러워졌다. 청각을 포함한 다른 감각들 전부가 강화된 상태라 커다란 소음이 더 괴로웠다. 나중에는 자신의 감각을 통제할 수 있을 정도로 신체와 마력에 대한 통제력이 늘어난다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팀원 모두가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귀를 막으며 버텼다. 그렇게 한동안 아무것도 못하고 귀만 막고 있었더니 점차 소리가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는 멈췄던 숨을 다시 내뱉으며 한숨을 쉬었다. 당황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숨도 안 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느 정도 잦아들어서 손으로 귀를 틀어막아야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전이 그 웅웅 거리는 소음은 계속해서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오는 진원지를 가늠해 보니 하늘 방향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문제는 하늘의 일부분이 아니라 그 전체가 소음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었다.
이갓은 명백히 무언가가 잘못된 상황이었다. 우리는 훈련캠프에서 1 계층에서 이런 굉음이 들리는 현상이나 혹은 그러한 악마에 대하여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이정도로 이질적인 현상이나 악마라면 분명 언급이 없었을 리가 없는데도 말이다.
그렇게 한동안 멍 때리고 있던 우리는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뭔가 이변이 발생했다면 당황만 할 게 아니라 그에 대한 대처를 해야 한다. 당장에 뭔가 위협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 소음의 이유가 우리에게 좋은 소식은 아닐 확률이 높았다.
아무도 그러자고 말은 안 꺼냈지만 다들 조용히 자신의 무기를 꺼내 들고 자세를 잡았다. 흐트러졌던 진형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우리는 긴장된 표정으로 주변을 주시하였다.
하지만 얼마 동안 그러고 있었음에도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일단 당장 뭔가가 우리에게 달려들 거나 하진 않을 모양이었다.
나는 약간 긴장을 거두고 모두에게 말했다.
“일단 큰 나무 아래쪽으로 이동하자.”
“나무 아래?”
“응. 지금 소리는 전부 위쪽에서 들리고 있어. 이 소리를 내는 게 어떤 현상이건 악마이건 간에 무언가가 불시에 들이닥칠 위험을 줄여야 해. 그럼 일단 커다란 나무 아래 쪽에서 숨어서 이동하는 게 맞아.”
내 이야기를 들은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동의하자 나는 팀원들을 이끌고 주변에 보이는 큰 나무 아래로 접근하여 자리를 잡았다.
일단 나무 아래에 몸을 숨기고 상황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숨을 죽이고 주변을 살피던 도중이었다.
툭
투둑 투두두둑
투두두두둑 투두둑
투두둑 투둑
갑자기 무언가가 땅에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정신 없이 들려왔다. 상당한 숫자의 어떤 물체가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소리로 미루어 보아 그 무언가가 떨어지는 장소는 나무 위와 땅을 가리지 않는 듯 했다.
우리는 전부 바짝 긴장한 채 무기의 손잡이를 단단히 쥐고 전방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