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 31. 변절자들(Apostates)
* * *
“...좋아요. 당신이 함께 대가를 지불한다면 할만할지도 모르죠. 그럼 그건 그리한다 치고, 일차적인 조치는 뭐에요?”
“우리에게 복속된 악마들을 부리는 거다.”
“그건 안된다고 아까 말을...”
“안 될 것은 없지. 그것들이 직접 가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남자는 다시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변절자들(Apostates)을 쓰도록 하지.”
***
본격적으로 숲에 들어온 우리는 일단 앞쪽으로 쭉쭉 나아갔다. 악마들의 둥지는 적어도 입구 쪽보다는 훨씬 안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일단 안으로 가서 악마와 마주치던 그들의 흔적을 잡던 할 생각이었다.
나중에 돌아올 때를 대비한 표시를 곳곳에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행히 나무가 많아서 표시를 할 곳은 넘쳐났다.
그렇게 한동안 숲의 더 깊은 곳으로 이동하던 중, 갑자기 린펠이 일행을 멈춰세웠다.
“잠깐.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린펠의 말에 다들 귀를 기울이며 주변을 살폈다. 나도 바로 최대한 청각에 집중하며 경계를 끌어올렸다. 그러자 아까까지는 들리지 않던 것들이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부스슥
부스슥, 부슥
뭔가가 풀잎이나 나뭇잎을 해치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상당히 멀리서 들리긴 했지만 조금씩 커지는 걸 보니 우리와 가까워지는 중인 듯 했다. 게다가 소리는 하나가 아닌 여럿이었다.
“다들 들었나?”
“응. 들었어.”
유지윤이 대답하고 나머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기를 고쳐 쥐었다. 이 숲에서 같은 사람을 만날 일은 없다. 다른 팀과는 떨어진 거리가 꽤 되니 그들과 마주칠 일도 없다. 설령 사람이라고 해도 저렇게 은밀하게 이쪽으로 다가올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다들 전투 준비 하자.”
내가 성화가 피어오르는 검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소리가 더 가까이 다가올수록 어디서 들려오는지가 더 분명해졌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나무 위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나뭇가지를 타고 달려오느라 나뭇잎을 해치는 듯한 소리가 난 모양이었다.
“...나뭇가지를 타고 이동하는 악마. 아마 그렘린일거야.”
이해나가 조용히 말했다.
“오케이. 그럼 다들 연습한대로만 하자구.”
벨이 자세를 바로잡으며 말했다.
한참을 들려오던 소리가 마침내 바로 위까지 다가왔다. 우리를 포위하려는 건지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이내 잠시 조용해지더니 포위망을 좁히며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럼 시작한다.”
‘성역화(??化) 뜰.’
내 발밑을 시작으로 하얗게 빛나는 원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커다란 원이 팀원 전체의 발밑에 드리워지며 여러 가지 버프 효과를 부여했다.
내가 성역화를 끝내자 유지윤이 양손을 들어올렸다. 들어올린 손의 손가락 끝에서 막대한 양의 마력 강사가 뿜어지듯 만들어졌다. 그 상태에서 손을 한 번 휘저으니 넘실거리는 마력 강사들이 사방으로 뻗어져 나갔다.
빠른 속도로 퍼진 마력 강사가 이쪽으로 달려오던 악마들의 몸에 덕지덕지 붙었다. 그와 동시에 악마들의 몸에 흐르는 마기가 이리저리 날뛰기 시작했다.
끼에엑 !
끼에에엑 !
당황한 악마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몇 마리는 아예 나무 밑으로 떨어지기까지 했다.
유지윤이 상당수의 악마들을 무력화시키자 이번엔 린펠이 움직였다. 허리춤에서 여섯 개의 비도를 뽑아낸 린펠은 비도에 마력을 덧씌웠다. 그러자 비도가 검은색으로 물들며 약간의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 상태에서 린펠이 양쪽으로 손을 털듯이 움직이자 비도가 검은색 빗살을 그리며 날아갔다.
투두둑
비도가 가볍게 꽂히는 소리와 함께 악마 몇 마리가 추가로 떨어졌다. 떨어진 그렘린들은 모두 머리에 검은색 비도가 박혀있었다. 이번엔 꽤나 가까운 곳에 떨어져서 생김새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작은 키에 둥그런 머리. 깡마른 팔과 다리. 양옆으로 솟은 커다란 귀. 큼직한 눈과 그 안에 노란색 눈동자. 손끝에 솟은 날카로운 손톱.
설명으로만 들었던 그렘린의 생김새와 완벽히 일치했다.
적이 누구인지 확실해지자 조금 더 자신감이 붙었다. 나는 하얀 불길처럼 타오르는 검기를 뽑아내며 사방을 주시했다.
방금 유지윤과 린펠의 활약으로 적의 수는 대폭 줄었다. 하지만 아직 남은 몇몇 잔당들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들을 마저 처리하는 것은 근거리 딜러들의 몫이었다.
잠시 후 5마리의 그렘린이 바로 위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놈들은 우리를 보더니 곧바로 뛰어내렸다. 날카로운 손톱을 아래 쪽으로 향하며 우리의 목덜미를 노렸다.
먼저 움직인 것은 벨이었다.
벨이 기다란 창을 위쪽으로 들어올렸다. 가장 처음 떨어진 그렘린이 창의 범위 안에 들어오자 벨이 부드럽게 팔을 뻗었다. 검기가 둘러진 채로 뻗어진 창은 그렘린의 가슴팍을 가볍게 꿰뚫었다. 이어서 바로 창을 당기자 창날이 깔끔하게 가슴팍에서 빠져나왔다.
다음은 내 쪽이었다. 나는 그렘린 두 마리가 떨어지는 모습을 잠시 눈에 담았다. 상당히 빨리 떨어지는 것 같았지만 동체시력으로 움직임을 잡아내기는 너무 쉬웠다. 나는 검을 들어올려 크게 횡베기를 했다. 검이 하얀색 궤적을 그리며 그렘린들의 목을 지나쳤다. 너무나 가볍게 그렘린들의 목이 떨어졌다.
내가 두 마리를 처리하는 걸 본 이해나도 검을 들어올렸다. 이해나의 검에 어두운 색깔의 검기가 드리워졌다. 그 직후 마지막으로 떨어지는 그렘린을 향해 숏소드를 길게 내뻗자 검이 그렘린의 미간을 파고들었다. 검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그렘린을 이해나가 털듯이 떨어뜨렸다.
“후우...”
전투가 시작된지 수 초만에 우리 주변에는 그렘린들의 시체가 가득해졌다.
있는대로 긴장한 것에 비해 꽤나 간단한 전투였다. 이쪽의 전력을 보면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실재로 일 분도 안 지나서 모두 끝내버릴 줄은 몰랐다.
“음... 뭔가 순식간에 끝나버렸네.”
“어렵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쉽군.”
처음에 원거리로 적들을 요격했던 유지윤과 린펠이 말했다.
“그러게. 뭔가 김 빠지긴 하지만 그만큼 우리가 잘 한다는 거겠지 뭐.”
벨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럼 일단 마석부터 회수하자.”
이야기를 듣던 이해나가 마석 하나를 주우며 말했다.
“오케이.”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부지런히 마석을 모아서 한데 모았다.
“하나, 둘, 셋... 딱 열다섯 개네. 깔끔하게 3개씩 나눠 가지면 되겠는데?”
마침 마석의 개수가 5로 나누어 떨어지는 15개였다. 벨이 마석을 다섯 개씩 나누어 모두에게 나누어주었다.
우리는 훈련하며 전략을 짜던 때에 마석에 대한 배분도 모두 합의를 해놓은 상태였다. 배분 방식은 깔끔하게 n빵이었다. 이것이 가장 명확하고 알기 쉽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만일 마석의 개수가 5로 안 나누어질 경우에는 나머지를 하나씩 아무에게나 주고, 다음 번에 마석이 남으면 못 받은 사람부터 나누어 주기로 했다. 하급 악마의 커다란 마석은 돌아가면서 받기로 했다.
이런 문제를 확실히 하고 들어가야 차후에 쓸데 없는 분쟁이 안 생기는 법이었다. 어차피 모든 팀원이 1인분 이상을 하다보니 딱히 이의도 없었다.
나는 받은 마석을 바로 입에 털어넣고 씹었다.
와그작 거리며 마석을 씹고 있으니 이해나가 날 멀뚱히 바라보았다.
“왜?”
“...진짜 마석을 먹는구나.”
“그치. 이게 나한테는 가장 효과적이니까.”
“...마석은 맛이 어때?”
이해나가 진심으로 궁금한 듯이 물어왔다.
“음.. 맛이라..”
“돌맹이 같아?”
“아니, 사실 뭔 맛인지 나도 모르겠어. 그냥 얼음 같기도 하고. 굳이 말하자면 맹맛이랄까?”
이건 정말로 그랬다. 마석을 먹으면 마력이 몸에 흡수되면서 상쾌한 느낌은 들지만, 딱히 맛이랄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구나..”
이해나는 뭔가 아쉽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무슨 맛을 기대했길래 그러는지는 모르겠다.
“오, 나 레벨업 했어!”
벨이 기쁘게 소리쳤다. 방금 세 개의 마석을 흡수하고 레벨이 오른 모양이었다.
문득 생각해보니 나는 이번에 마석을 세 개나 먹었는데 레벨업을 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20레벨대이다 보니 최하급 세 개로는 레벨업이 어려운 것일까? 최하급을 더 많이 섭취하거나 하급을 하나 섭취해야 레벨이 수월하게 오를 것 같다.
그렇게 모두 마석의 흡수를 마치자 우리는 다시 출발할 준비를 하였다.
“자, 이 기세를 몰아서 계속 가보자!”
유지윤의 말과 함께 우리는 다시 숲 안 쪽으로 이동했다.
***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각양각색의 나무들을 흔들었다. 붉은색 하늘 아래 물결치는 나뭇잎들이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런 나무들 꼭대기에 우중충한 색깔의 후드를 눌러 쓴 사람들이 서 있었다. 흔들거리는 꼭대기 나뭇가지 위에서 다들 잘도 균형을 잡고 있었다.
“여기 올 때마다 드는 생각인데, 저기 저 나무들은 왜 1 계층에서만 자랄까?”
“.....”
“다른 계층에서도 자라주면 이 지옥의 풍경도 좀 볼만해질 텐데. 어떻게 생각해 다들?”
“.....”
“정말, 다들 너무 재미없는 거 아니야? ‘악어’는 왜 이리 조용한 애들만 모아놨담?”
“.....”
“알았다, 알았어. 바로 할 일이나 하자는 거지? 나 참, 치사해서 말 안 한다 이제.”
다른 사람들 보다 비교적 키가 작은 한 명이 조잘거리던 입을 다물었다.
이내 후드를 쓴 사람들이 조용히 일렬로 늘어섰다. 나뭇가지의 끝을 딛고 이동하는데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묵묵히 밑을 내려다 보는 그들의 아래에는 숲 입구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교관들의 모습이 보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