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초대자가 지옥에서 살아남는 법-9화 (9/61)

〈 9화 〉 8. 제 1 계층

* * *

불현듯 기억들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나의 이름은 김진운.

정보창에도 나오지 않던 나의 이름과,

누군가 보낸 고급스런 편지지를 뜯고 그 안에 싸인을 하던 나의 모습이었다.

이게 뭘까? 이건 무슨 기억일까?

이상한 것은 분명히 생소한 기억임에도 낯설지가 않다는 것이다. 마치 잠시 잊고 있던 것을 다시 생각해낸 기분이다. 초대자 정보가 머릿속에 흘러들어올 때처럼 이질적인 정보가 머릿속으로 주입되는 것이 아니었다. 방금 느꼈던 느낌대로 무언가 잠겼던 기억이 해금되는 것이었다.

근데 그 내용이 심상치 않다.

먼저 나의 이름. 완전히 기억 속에서 지워진 줄 알았던 나 자신에 대한 정보였다. 비록 이름 하나 뿐이지만 그 의미는 특별하다. 이 정신나간 곳으로 들어오기 전의 나에 대한 정보니까. 기억을 못 했을 때가 이상한 것처럼 너무도 당연하게 기억난다. 나는 혹시 이대로 다른 기억도 떠올릴 수 있나 싶어 시도해보았다. 결과는 역시나 실패였다. 정말 나에 대한 정보는 딱 하나, 이름 말고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고급스런 편지에다 싸인을 했던 기억. 이 기억 역시 아무 위화감 없이 떠오른다. 그 고급스런 편지가 무엇인지, 무슨 내용이 들어있는지, 나는 왜 거기에 싸인하기로 했는지는 전혀 모르겠다. 그저 그 장면만이 영상처럼 기억이 날 뿐이다. 궁금한 것은 이 기억의 의미가 무엇이며, 왜 내게 이걸 다시 기억나게 하냐는 것이다.

시스템 메세지는 이 ‘기억의 편린’이 최종보상이라고 했다. 이 기억이 일종의 보상이라면 분명 무언가 의미가 있을 것이다. 내 이름에 대한 기억처럼 중요한 기억 중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 그럼 그 편지는 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거기에 싸인을 한다니..

어쩌면 그 편지는 일종의 ‘초대장’이 아닐까? 나는 거기에 동의 혹은 신청을 할 목적으로 싸인을 한 것이고. 생긴 것도 고급스러운게 초대장이라고 하면 딱 맞는다. 비주얼은 왠만한 결혼 청첩장보다 화려했으니까. 그리고 다른 편지라면 굳이 싸인을 할 이유가 없다. 그럼 어디로, 무엇에 초대하는 초대장이란 말인가?

이곳.

그래. 이곳밖에 없다.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겠으나 이곳, 여기 말고는 없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스스로에 대한 기억을 삭제 당하고 여기에 있는 것이고 또 보상이랍시고 이 기억을 보여주는 거겠지. 그렇게 보면 모든 것이 들어맞는다.

난 이곳에 자원하여 들어왔다는 말인가? 왜? 무엇을 위해서?

과거의 나의 선택에 대한 수많은 물음이 머릿속을 채운다. 그렇게 한동안 혼란에 빠져있던 나는 일단 모든 생각을 멈추었다.

의미가 없다. 지금 열심히 궁금해 해봤자 과거의 내가 나타나 설명해주는 것도 아니다. 거기다 무언가 추론할 수 있는 단서가 거의 전무하다. 떠오르는 기억이라곤 이름과 그 장면 하나 뿐인데, 거기서 무얼 더 알아낸단 말인가? 일단 단념하고 차후에 더 알아보는 게 낫다.

그렇게 생각을 마친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피가 흥건한 바닥. 이미 한참 전에 코를 마비시킨 피냄새. 변함 없이 참혹한 광경이다. 그러다 문득 방금 전 나처럼 멍하니 허공만 쳐다보고 있는 갈색머리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눈에 초점이 흔들리는 것이 어지간히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그렇게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니, 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눈빛이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생각을 다 끝마친 모양이다. 아마 그녀가 내린 결론 또한 나와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으니.

그러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다. 빤히 바라보는 나를 그녀가 빤히 바라본다. 그러다 우리는 동시에 정신을 차렸다.

뭔가 당황스러워 눈을 돌리려는데,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그.. 저기... 우리, 통성명이나 할까요?”

“어.. 네, 그러죠.”

그러고보니 왜 그동안 통성명도 안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그럴 경황이 없기도 했고, 무엇보다 둘 다 자신의 이름을 몰랐다. 통성명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저는 김진운이라고 합니다. 감사인사를 아직 못 했는데 아까 전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쪽 아니었으면 정말 죽을 뻔 했으니까요.”

“저는 유지윤이라고 해요. 그리고 감사인사는 됐어요. 후방지원 한다고 했잖아요? 그럼 진운 씨를 돕는 건 당연한 거죠. 거기다 앞에 서서 위험하게 싸운 건 전부 진운 씨인데요, 뭘.”

그녀가 겸손하게 인사를 되돌려 주었다. 일단 뻔뻔하거나 생색내는 성격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목숨을 빚진 건 맞으니까요. 인사는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괜찮아요. 저도 진운 씨가 그 악마를 잘 죽여줘서 산 거에요. 마력 다 떨어질 때는 정말 어떻게 되는 줄 알았다니까요?”

“하하, 그래도 그 때 그 장대가 아니었으면 저도 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고보니 상당히 괜찮은 기술을 얻으셨네요. 그 실은 마력으로 만드시는 건가요?”

“네, 맞아요. 10레벨 달성했더니 주더라구요. 이름이 ‘마력 강사 생성’이었나? 처음엔 이걸 어디다 쓰나 했는데, 이걸 뭉치거나 꼬으면 상당히 강해지더라구요. 그래서 꼬챙이나 장대를 만들 생각도 했죠. 그러는 진운 씨도 기술 끝내주던데요? 그 펑펑 터지던 건 뭐에요?”

“아, 그건 저도 10레벨 달성하면서 받은 겁니다. 이름은 열폭발이구요, 저로부터 일정 범위 안에서 원하는 곳에 폭발을 일으킬 수 있죠. 근데 마력을 너무 잡아먹어서 자주는 못 쓰겠더라구요.”

“그래요? 그럼 아까 그 검이 빨개지면서 불꽃이 나오던데, 그건 뭐에요? 그것도 기술인가요?”

“음, 이건..”

문득 그녀에게 이 기묘한 무기에 대한 사실을 말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밑천을 너무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만 그 생각은 접어버렸다. 일단 달리 댈 변명이 없기도 하고, 어차피 ‘최고의 파트너’ 칭호에 서로 등록된 상황이니 앞으로 같이 다닐 확률이 높다. 그럼 미리 알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제가 얻은 무기의 기술입니다.”

“무기요? 무기에도 기술이 있나요?”

“네, 그런 모양입니다. 이건 임프가 들고 것을 뺏은 건데, 무기를 들었더니 갑자기 귀속되었다는 알림이 뜨면서 무기 정보창이 보이더라구요. 거기에 있던 작열이라는 기술입니다. 검이 달궈지면서 불꽃을 뿜죠. 절삭력이랑 데미지도 올라가구요.”

내구도가 무한이라던가, 사실은 특성도 하나 있고 앞으로 더 해금될 예정이라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모든 정보를 공유하는 것은 그녀가 나의 확실한 아군이 될 때, 그리고 공유가 필요할 때이다.

“와, 상당히 좋은 무기인가 보네요. 무기가 정보창까지 있다니. 임프가 들고 있었다고 했죠? 그것들이 그런 무기를 대체 어떻게 얻은 걸까요? 다른 사람을 죽이고 뺏은 건가?”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다른 무기는 죄다 녹슨 단검 같은 것이던데.”

“그러니까요. 저도 괜찮은 무기나 하나 주웠으면 좋았을 텐데...”

“아, 그러고보니 저희 보상으로 장비세트 하나 받지 않았나요? 인벤토리인가 하는 것도 열렸던데요.”

“아, 맞아맞아. 왠 이상한 기억을 주는 바람에 그걸 까먹었네요. 바로 확인해 봐야겠어요!”

유지윤은 빠르게 인벤토리를 불러내더니 장비 세트를 꺼냈다. 나도 한 번 봐야겠다고 생각하여 내것도 꺼내기로 했다. 인벤토리를 떠올리자 창이 하나 나타났다.

인벤토리

­ 우수한 초행자의 장비 세트

장비 세트를 꺼낸다고 생각하자 무언가 노이즈가 낀 것처럼 지직거리면서 상자 하나가 나타났다. 기다랗고 검은 상자였다. 상자의 잠금을 해제하고 뚜껑을 열자 안에 들어있는 장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장비들에 대한 정보가 머릿속에 들어오는 동시에 장비들의 목록이 눈 앞에 떠올랐다.

[우수한 초행자의 장비 세트(귀속됨)]

­ 우수한 초행자의 검

­ 우수한 초행자의 방패

­ 우수한 초행자의 건틀릿

­ 우수한 초행자의 하의

­ 우수한 초행자의 상의

­ 우수한 초행자의 로브

­ 우수한 초행자의 부츠

하나 같이 버릴 게 없는 유용한 장비들이다. 나는 고민 없이 모든 장비를 착용하였다.

장비를 전부 착용하니 전체적인 느낌은 검은색 가죽장비를 입은 듯한 느낌이었다. 전반적으로 색이 다 검었으며 재질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가죽이었다. 활동성을 중시한 것인지 대체로 몸에 딱 붙는 형태였다. 마지막 로브까지 걸치자 언뜻 보면 암살자와도 같은 비주얼이었다. 조금씩 움직여보니 생각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저항이 적었다.

무기 또한 상당히 괜찮은 성능이었다. 드디어 부러진 검이 아닌 제대로 된 검을 들었다. 거기에 방패도 들었더니 뭔가 이전보다 훨씬 안정된 느낌이 들었다. 건틀릿도 손에 착 감기는 것이 무기를 쥐다가 빠져나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무기들의 색상 역시 검은색이었다. 이 정도면 이 무기를 만든 사람이 올블랙에 상당히 집착하는 사람인 것 같다.

그렇게 장비를 착용하고 효과를 자세히 보려다가, 문득 궁금해져서 유지윤 쪽을 돌아보았다.

유지윤도 장비를 전부 착용하고 상자에 내장된 거울을 바라보며 열심히 이런저런 동작을 해보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유지윤도 참 바람직한 몸매의 소유자였다. 옷이 몸에 딱 붙는 형태여서 그런 건지, 유지윤의 몸의 라인과 볼륨이 전부 드러났다. 거의 완벽한 S자를 그리는 걸 보면 분명 상당한 관리를 했을 것 같다.

그러다 유지윤이 갑자기 이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빤히 바라보던 것이 들킬까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야, 진운 씨 핏이 좀 괜찮으신데요? 몸 관리 좀 하셨나보네요?”

“하하, 감사합니다. 그러는 지윤 씨도 관리 열심히 하신 것 같네요. 보기 좋습니다.”

“그런가요? 다행이에요. 사실 입고 나서 살이 좀 쪘나 했는데..”

역시 여자들은 자신의 몸매에 대해 호평을 내리는 법이 없다. 대체 어디가 살이 쪘다는 건지.

그러던 도중이었다.

[시험장 이탈까지 00:00]

[제 1 계층으로 전송을 시작한다.]

“어?”

갑자기 나와 유지윤의 발밑에서 공간의 틈 같은 것이 열리더니, 순식간에 우리를 빨아들였다. 나는 온 세상이 일렁이는 기분을 느끼다가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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