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초라해도 괜찮아-52화 (52/54)
  • 〈 52화 〉 생소함에 물들다

    * * *

    “승현이 괜찮아?”

    집으로 무사히 들어오는 승현이를 발견한 유나는 율이를 보며 말했다.

    승현이 하고 함께 있으면 부담스럽지 않을까 하고 혼자 걱정한 탓이었다.

    물론 승현이에게는 잘못은 없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감정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니까. 그리고 그 감정이 극에 달해 고백할 수도 있었다.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근데 그 시기가 율이가 그 일을 당하기 직전이었기에 조금 조심스러워 지는 이유였다.

    유나에게 승현이도 소꿉친구이나 율이는 그 이상의 친구이기에 그녀가 최우선이었다.

    율이는 승현이를 힐끗 보더니 장난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제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보여서 그 표정에 유나도 걱정이 사르르 녹았다.

    “나한테 고백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아무렇지도 않아.”

    중학생 시절 질리도록 받았던 고백이라 승현이의 고백도 그중 하나에 불과했다.

    “하긴 그렇네........”

    당당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서율을 보고는 유나도 그 분위기에 맞춰 키득키득 웃었다.

    두 소녀에게 놀림 받은 승현은 귀가 끝까지 빨개져선 황급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또 하필이면 거기가 태수의 옆이라 더욱 뻘쭘해진 그였다. 율이에게 고백하기 전까지 태수와 자신을 비교해왔던 터라 더 초라해졌다.

    “너무 놀리지 마. 정말 용기 있는 거야...”

    그런 태수에게 위로를 받으니 더욱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으아!! 그만해요. 그만!”

    마음 둘 곳이 없어진 승현이의 반응에 한순간에 그 공간에서 웃음꽃이 피었다.

    웃음이 잠시 잦아지고 율이는 주변을 둘러봤다.

    자신밖에 보이지 않던 거기에는 이렇게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전의 혼자였던 그녀가 상상도 못하던 친구들이 이젠 있었다.

    자신의 선택으로 유나가 친구가 되었고 그 결과 여러 가지가 바뀌었다. 이번 생에서도 혼자서 모든 걸 하려고 했다면 아마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다. 진작 삶을 포기해 더는 존재하지 않았겠지.

    피하고 도망치는 것밖에 그녀는 배우지 못했었으니까. 지금은 달랐다.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같이 있어 줄 친구가 있으니까. 아무리 도망치려고 해도 붙잡아 줄 거란 걸 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그녀는 용기를 내어 입을 땠다.

    믿기 힘든 말을 이제는 해야만 했다. 태수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그녀도 털어놓고 싶었다. 마음 한곳에 덮어뒀던 이야기들을 하나둘 꺼내었다. 지금이 아니면 또 입을 닫고 살아갈 것만 같았으니까.

    흉측하고 악취가 묻은 이야기였을지 몰라도 밖으로 나오니 그저 보잘것없는 악몽에 불과했다. 꽁꽁 감추어야 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라 훌훌 털어버릴 고작 그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입 밖으로 나온 이야기들은 옛이야기였고 그냥 지금의 자신을 형성하는 한 가지일 뿐이었다.

    이야기를 하던 와중에 담담하게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그렇게 고마웠다. 그래... 그냥 눈물 한 방울 흘릴만한 악몽.

    인생 2회차, 그것도 남자였던 것... 남자라는 자각이 심해서 이제껏 접근해오던 남자들을 밀어냈다는 것도 빠짐없이 전했다.

    심각하게 율이를 듣던 아이들도 그 말에는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친구들이 믿든 말든... 율이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리 하기로 했다. 믿지 않아도 좋을 이야기가 되었으니까. 그냥 털어놓고 흘러가야 할 진실이니까.

    여운이 남은 영화관처럼 잠잠하던 그 공간에서 한 인물, 유나가 입을 열었다.

    “율아. 이전의 너는 이름이 뭐였어?”

    유나의 물음에 서율은 생각했다.

    “그러네...”

    잠시 잊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옛 이름을 생각하면 그때가 떠올랐으니까. 유나의 말에 떠오른 이름... 떠올리고 보니 이젠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리운 느낌마저 들었다.

    “현태... 였던가. 박현태...”

    유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그리곤 끌어안았다. 익숙한 향기... 놓치면 안 되는 냄새였다.

    “고생했어. 현태야... 이젠 괜찮아.”

    “응. 고마워.”

    따뜻한 격려와 함께 유나의 품 안에서 현태가 미소 지었다. 현태의 삶에서 처음 있는 웃음이었다.

    ­

    “맞아... 그날 태수 오빠 표정 봤어?”

    “그날? 무슨 날?”

    “율이가 커밍아웃한 날.”

    “아... 아니. 못 봤는데. 왜?”

    “완전 충격 받은 표정이었어.”

    유나하고 같이 등교하던 중, 최승현하고 수정이 태수까지 모두 모였던 그날의 이야기를 유나가 꺼냈다.

    어떤 서두도 깔아두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했던 터라 홀가분한 느낌밖에 없어서 아이들이 어떻게 반응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믿어주면 좋고 아니면 말고 하는 마음이었다.

    유나나 수정이는 믿는 눈치였는데 남자애들은 아닌 거 같았다. 사실을 듣고선 크게 놀랐고 지금까지도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아마 나한테 품은 마음 때문에 믿고 싶지 않겠지... 아님... 경멸해 마음을 접었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엄청난 고백이었으니까.

    하긴... 나라도 충격이 클지도. 유나가 사실 남자였었다고 가정하면 선 듯 믿을 수 없었다.

    “사실인 걸 어떻게? 걔들 마음까지 생각해줄 기분이 아니었어. 그땐.”

    “잘했어!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살아야지. 그리고 그 커밍아웃을 듣고도 좋아하면 그게 정말 찐 사랑 아니겠어? 율이를 가지려면 그 정도 마음고생은 해야지.”

    “뭐래... 이미 정 다 떨어져서 나랑 보려고도 안할걸?”

    이 말은 진심이었다. 애들이 착해서 여기저기 소문은 내고 다니지 않겠으나... 모른 척 할게 틀림없었다. 그리 된다면 아쉽겠으나 괜찮았다. 얼마나 충격을 받았으면 그럴지 다 아니까. 그것까지 이해 못하진 않았다.

    “근데... 율이는 어때? 음... 남자일 때의 느낌을 아직 가지고 있는 거야?”

    큰소리로 할 말이 아니었기에 유나가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그런 게 왜 궁금해?”

    “혹시나 나한테 설레거나 할까봐 그러지!”

    “미쳤니?”

    정말 궁서체로 말할 만큼 충격적인 가정이었다. 인정은 했다. 유나도 수정이도 매력적인 아이들이라. 아직 남자였다면 애들한테 짝사랑을 했을지도 몰랐다. 근데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그 반응을 보니까... 전혀 아니구나. 그럼 괜찮지 뭐.”

    자연스레 팔짱을 낀 우리들은 다시금 걸음을 재촉했다.

    오늘부터 새학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18살이 되었는데 요즘 들어 고민이 있다고 한다면.........

    “율이 누나, 정말 좋아해요. 저랑 사귀어주세요!”

    사랑에 대한 것이다.

    “미안해. 아직은 누구를 사귀고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어.”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담아.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최승현의 고백을 거절한 이후로 줄곧 이런 식의 반응을 해왔다. 그를 보고 고백을 할 때의 용기를 잘 알게 되었으니까.

    “죄송해요. 갑작스러웠죠.......”

    “아니야, 조만간 좋은 사람 만날 거야.”

    여지없는 거절을 끝으로 상대방은 멀어져갔다. 결국 혼자 남겨지는 건 나였다.

    누군갈 좋아하고 사랑하고. 그런 것에 고민해본적은 없다. 그건 아주 원초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거라. 같이 지내다보면 자연스레 피어나는 거라고 생각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부정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감정이 일시적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여기저기 찔러보는 식으로 하는 고백은 상대방에게 무척 실례라고...

    그런 의미에서 최승현이 나에게 했던 고백은 방금 거절한 상대보다도 더 많은 고민에서 나온 결과라는 걸 알 수 있었다.

    4월의 초반, 학교 후배라는 존재가 들어오고부터 이만저만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나에 대해서 잘 아는 동기나 선배의 경우 직접적으로 접근을 해오는 사람은 드물었다.

    신입생들은 나라는 인물을 접하고 약 1개월인데... 무슨 면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기에 이런 식으로 잦게 마음을 표현하는 걸까.

    너무 자주 이런 일이 있다 보니... 모종의 놀이가 유행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 혼자만의 생각이나 ‘서율 선배 함락’ 같은 이상한 내기 같은 게 있는 게 아닐까.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이 계속 들었다.

    “으... 지친다.”

    고백하는 건 상대인데 내가 이런 고민을 진지하게 한다니. 아마 상대는 나에 대한 건 금방 잊고 다시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나겠지. 그런 나잇대니까.

    “애들이 여기 있을 거라고 하던데....... 진짜네.”

    유나가 불쑥 말을 걸었다. 교실에서 후배에게 불려 나갔으니 어디 있는지는 같이 있던 반 애들은 다 알고 있었다. 유나가 내가 있는 곳을 특정해 찾는 건 손쉬웠다.

    “유나야........ 너랑 나랑 사귈래? 그럼 이런 짓 안 해도 될 거 같은데..........”

    진지하게 말했다. 조금 당황하는 유나다.

    “날 그런 이유로 속박하지 말아줘. 그리고 아침엔 나한테 미쳤다고 하더니... 너가 더 그래 보여.”

    유나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선 웃어댄다. 조금 더 진지해져 볼까........ 유나에게 다가가 팔을 잡고 벽으로 밀었다. 아프지 않게 하는 건 당연했다.

    “진짠데.......”

    눈길을 맞추고 목소리를 깔았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간다.

    “우아... 미쳤네 미쳤어!”

    고갤 돌리고 마는 유나.

    “응. 반응이 웃기잖아.”

    난 빠르게 멀어졌다. 이런 건 신속 정확하게 해야 한다.

    “서율이가 남자였다고 생각하니까 이상하잖아. 기분이!”

    “다음엔 수정이한테 해봐야겠다.”

    장난스럽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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