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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해도 괜찮아-51화 (51/54)

〈 51화 〉 초라해도 괜찮아

* * *

“그... 그건...”

그저 입만 뻐끔거릴 뿐 태수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은 이제 버리면 안 될까?”

“너라면... 너라면 알아 줄 거라 생각했어. 고아였기에 바란 거고! 그들한테 인정받으려고 내가...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잘 알지... 나도 고아니까. 잘 알아. 하지만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사랑하는 법을 모르게 되더라... 율아 넌 이제까지의 가족을 사랑했니?”

“으으...”

태수의 말대로 가족의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던 율이는 다시 돌려줄 방법에 대해 알지 못했다. 받는 것을 인지하는 것도 힘들었기에.

“형식상의 가족... 그런 허상만 바란 게 아니었을까? 그래서 힘들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겠지. 리셋하는 거야. 미련과 강박을 버리고 다시 시작하자. 처음부터 하나씩 제대로 다시 배워가는 거야.”

태수의 그 말은 지금의 율이에게는 폭력처럼도 들렸다. 이제껏 고통 받고 더 이상은 하기 싫은 일인데 또 이 일은 반복하라는 의미였으니까.

“넌... 어째서... 나한테 또 하라고 하는 건데? 이제 못하겠어... 그럴 용기도 없고 또 망가뜨릴까봐 다시 혼자 남을까봐... 하고 싶지 않아.”

“그럼 지금처럼 가만히 있어.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이 할 거야.”

“뭐?”

“네 주변에 너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외면하고 고갤 돌리지 말고 똑바로 주변을 봐. 어떤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지... 유나, 수정이, 유나네 아저씨 아주머니. 그리고 양부모님들까지.”

“가만히 있으라니...”

그렇게 노력해도 헛수고였는데 가만히 있으라는 태수의 말을 믿긴 힘들었다.

“이제까지의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이젠 반대로 아무것도 안 해보는 거야. 그렇다고 지금처럼 정말 아무것도 안하는 게 아니고.”

“그건 나도 알아...”

장난 섞인 태수의 말에 율이는 심통이 났다. 자신은 얼마나 심각한데 간간히 장난을 걸어오는 게 조금 민망했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걸로 자신이 삐친 걸로 보인 것 같아 그런 것일까.

“아까 말했지? 사랑과 애정이 뭔지... 모르니까 그런 거 같다고. 온전히 느껴봐. 율이가 가지고 있는 가족이라는 허상보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은 걸 너한테 주고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지금까지와는 반대로...”

어린 아이처럼 태수의 말을 따라하는 율이를 그는 대견하게 바라봤다. 어릴 적에는 모든 걸 알고 있는 것 같던 율이였는데 지금은 너무도 허술해보였다.

다시 입양되어 시작하라는 게 아닌... 그저 가만히 있으라는 말. 어쩌면 율이가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아니었을까. 어떻게 해야 좋은 딸이 될지. 바람직한 여동생의 모습을 생각하느라 곤욕을 받았다. 그 고통밖에 없던 노력을 이제 하지 말라고 태수는 말하는 거였다. 기대고 싶은 말이었다. 태수의 말대로 이젠 그런 것에서 해방되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나도 곁에서 지켜볼게... 율이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또 힘들어 넘어질 것 같으면 잡아주고 앞으로 나아가는 게 두려우면 같이 걸을게. 그러니 그렇게 무기력하게 있지 말고. 또 살아보자...”

태수가 담담하게 뱉어내는 말에서 묵직한 진심이 느껴졌다. 흐트러진 탓인가... 아님 어릴 때부터 알던 태수이기에 그런 것일까. 그 진심이 꾹하고 마음에 와 닿았다.

자신의 심장이 이렇게 뛰었던 적이 있던가... 생소한 느낌에 율이의 얼굴에 혈색이 왕성하게 돌았다. 투명한 피부는 그 혈액의 응집을 온전히 담아내었다. 당연히 빨갛게 변한 볼은 가릴 새도 없이 물들어갔다.

우울함, 그리고 상실감 그런 것들을 모조리 날려버릴 만한 충격을 받았다. 이 상황이 그랬다. 그녀를 이루고 있던 근간이 다 흔들린 것 같았다.

“미친... 너 그거... 프로포즈 하는 것도 아니고!”

“프... 프로포즈라니! 힘들어하는 와중에 위로해서 점수 따자는 마음 아니거든?!”

급격하게 몽글몽글해진 분위기에 태수도 율이를 바라보던 시선을 다급히 돌려 애꿎은 벽 만 바라봤다.

“방금 속마음 다 뱉어낸 거 같은데...”

“그건 다음에...”

“다... 다음!? 뭘 다음에 한다는 거야!”

“아 몰라! 전해졌으면 됐어. 고백이든 뭐든 간에 네가 살아 있어야 할 거 아니야!”

부끄러움에 말을 쏟아낸 뒤 폭발할 거 같은 태수는 황급히 일어나 저 멀리 떨어졌다. 마음 같아선 방을 나가고 싶으나 율이를 혼자 두고 가기엔 아직 불안했기에 그게 최선이었다.

“유... 유나는 언제오지?”

율이는 드물게 더듬는 말투를 했다.

“여... 연락해볼게.”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태수와 서율은 이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수는 폰만 만지작 거리며 유나의 도착을 기다릴 뿐이었다. 율이도 이불만 끈질기게 주물럭거렸다.

하지만 수확은 있었다. 인형처럼 가만히만 있던 율이에게 표정이라는 게 생겼으니까.

태수의 설득으로 정신을 차린 율이는 이내 탈진 한 듯이 잠에 들었다. 그 사건이 있은 후 잠 한번 제대로 자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지금껏 본적 없는 개운한 표정을 지으며 잠을 청했다. 태수는 그 모습에 참으로 다행이라 속으로 되뇌었다.

날이 어둑해질 때 유나가 다시 돌아왔다. 태수에게서 온 전화를 받은 유나는 미뤄둔 잠을 또다시 넣어두고 서둘러 달려온 참이었다.

“태수 오빠는 대단해... 이게 사랑의 힘인가?”

태수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던 유나는 그를 칭찬하고 싶었다. 어떻게 구워삶았기에 율이가 다시 돌아왔는지... 그 광경을 보고 싶은 마음이 컸는데 단 둘이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대화를 하지 못했을 테니 어쩔 수 없었다.

율이가 있는 원룸 앞, 문 주변에 두 개의 그림자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최승현과 수정이었다.

“수정이 왔어?”

유나는 다가가 수정이의 손을 잡았다.

“응, 단거 먹으면... 율이가 기분 좋아질까 싶어서... 초콜릿도 좀 사왔어.”

“잘했어. 율이가 먹을지는 모르겠지만. 안 먹으면 나라도 먹을게!”

“유나야. 나도 있는데...”

승현의 말에 유나는 멈칫했다. 그리곤 능글맞게 웃으며 바라봤다.

“누구세요? 아 맞아~율이한테 고백한 최승현 씨 아니세요?”

수정이는 그 둘 사이에서 눈치를 살폈다. 승현은 유나의 그 말에 어색하게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는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유나가 알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직접 상황을 마주하니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나, 그 최승현이라고해.......”

“아~ 율이한테 차이신 분이구나. 근데 여긴 무슨 일로?”

최승현은 율이랑 꽁냥꽁냥하며 놀 수 없기에 화가 잔뜩 난 유나의 화풀이 대상이 되었다.

“나도 서율이 걱정돼서 온 거거든...”

우물쭈물 승현이 말하고 있을 그때 현관문이 열렸다.

“유나야. 심술 그만 부리고 들어와.”

“아니..... 율아 심술이라니... 응?”

자연스레 대답하다가 이상함을 깨달은 유나는 현관문에 빼꼼 머리를 내민 사람을 바라봤다. 똑바로 유나를 바라보며 말하는 그녀를 보자마자 유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는 율이가 이렇게 기운을 차렸다는 게 너무 기뻤다.

“율아......?”

“응.”

“진짜..... 율이야?”

“맞다니까.”

유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반복해서 물었다. 유나의 옆에 있던 수정이가 서율에게 팔을 뻗었다.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처음으로 더듬지 않으며 말한 수정이가 서율에게 매달렸다. 첫 포옹은 유나가 되리라 생각했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수정이에게도 그녀는 이미 소중한 존재가 되어있었다. 아마 폭력이라는 구렁텅이에서 구해졌을 때부터 그랬다. 서율이에게 유나 같은 존재가 있듯이 수정이 역시 서율이가 그런 사람이었다.

수정이는 마음을 놓은 아이처럼 울며 서율을 끌어안았다. 서율 역시 수정이의 그런 반응에 적잖이 당황했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수정이의 머리를 품으며 고맙다고 속삭였다.

“여기 다들 서있을 예정?”

태수가 방안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하도 안 들어와서 보러 나온 것이다. 수정이는 갑자기 등장한 인물에 당황해 서둘러 율이에게 걸쳐둔 팔을 풀었다.

유나는 그런 수정이를 이끌고 태수를 따라 방으로 들어왔으나 승현은 아직도 밖에 서있었다. 율이에게 차인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라 조금 어색한 게 이유였다.

“들어와.”

서율은 그런 승현에게 말했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담담한 말투였다.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승현은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좋아했던 감정을 모조리 부정당한 거 같아서. 하지만 지금 그걸 언급하고 싶지는 않았다. 서율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자신이 알지는 못하기에 힘들었겠구나 하는 추측 정도만 할 수 있으니까. 승현은 마음을 다잡기로 했다.

“글쎄. 누가 고백했던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승현은 놀라 서율을 바라봤다. 이제껏 본 적 없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걸 보고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걸 깨달은 그는 어쩔 줄 몰라 눈을 피했다. 그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쉰 서율은 옅게 미소 지었다. 자연스럽고 따뜻한 웃음이었다.

“고백해줘서 고마워. 비록 그 마음 받아줄 순 없지만 나보다 더 좋은 사람 찾을 거야.”

없었던 게 되지 않았다. 거절이라는 결과라도 자신의 마음이 닿았다는 게 승현은 기뻤다. 그 포근한 말에 다시 좋아하게 될 뻔 한건 율이에게는 비밀이었다.

“차였다고 꽁해있지 말고 얼른 들어와. 내가 문 계속 잡고 있는 거 안보여? 이거 무겁거든?”

“어? 어....”

실제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서율은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승현은 다시 불똥이 떨어지기 전에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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