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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해도 괜찮아-50화 (50/54)
  • 〈 50화 〉 초라해도 괜찮아

    * * *

    태수의 이야기는 무미건조했던 율이의 눈동자를 촉촉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자신의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은 그만큼 각별했기에. 두고 갈 수 없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마지막까지 유일한 탈출구였던 생의 마감을 미뤄왔던 거니까.

    “그러니까... 너도 하기 싫은 일은 하지 말았으면 해. 아! 우리 곁을 떠나는 것 제외하고. 알겠니?”

    태수의 목소리가 살짝 잠기는 듯했다. 유나처럼 태수도 율이가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어렸을 적에 율이는 보육원의 아이들을 동생처럼 지켜봐왔으니까. 그녀가 무심하게 베푼 사랑은 여전히 그때의 아이들에게 남아 있었다.

    “또 한 명 더 있잖아? 수정이. 너가 그렇게 지켜주고 돌봐줬는데... 그렇게 두고 가면 무책임하잖아. 내가 아는 너는 전혀 안 그래. 사람과의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에 그렇게 조심하는 거니까.”

    먹먹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그도 슬픔으로 인해 목소리가 잠겨갔다.

    율이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왜 그가 이리도 슬퍼 보이는 지 의문이었다.

    “힘들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 일이 있은 후로 처음 듣는 서율의 목소리에 태수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자신도 힘들면서 남을 위하는 사람. 이렇게 착한 소녀가 지금껏 힘들어 해온 것에 비하면 자신의 슬픔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괜찮아. 말하게 해줘. 힘든 게 아니라 오히려 하고 싶은 일이니까. 너한테 아직 못한 말도 있고.”

    서율은 태수의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인형같이 있던 서율이 점차 태수의 이야기에 반응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음은 없을 것만 같았기에 태수는 다시 말을 시작했다.

    “수정이는 아무도 안 도와줄 거라 생각해서 포기하고 있었데. 공부 외에는 할 것도 없었고. 좋은 성적을 받는 것만이 존재 이유라고 여겼었나봐. 그것마저 율이한테 위협받으니 화가 나서 찾아가 따졌는데... 돌아온 대답이 뭐였는지 기억해?”

    기억이 안날 리가 없었다. 자신이 수정이에게 한 말이었으니까. 수정이도 자신과 같은 절차를 밟아 가리라 그리 여겼는데 다른 길을 찾고 오히려 현재의 상황에 반항하는 모습이 눈이 부셨다. 그래서 그리 말했다. 친구가 되자고.

    “따지러 온 사람한테 친구가 되어 달라니... 그 인연이 이어져 지금까지 왔지. 널 은인이라 생각한데... 수정이도 너 없으면 안 된데. 네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살고 있는지 알았으면 좋겠다.”

    수정이도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몰랐다. 은인... 그런 대우를 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인데. 틈만 나면 떠날 생각뿐이었는데. 왜 이리도 자신을 붙잡는지. 조금 당황스러웠다.

    태수가 한말을 서율이는 곱씹었다. 씹고 씹어도 단맛 만 나는 통에... 뱉어내기가 힘들었다. 미련처럼 남은 두 명의 친구들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뭘 해야 할지... 어떤 식으로 살아야할지...”

    서율은 작은 목소리로 그리 속삭였다. 일반적으로는 듣기 힘든 말이었으나 율이에게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태수였기에 들을 수 있었다.

    “정답이라는 게 있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너한테 이렇게 말을 하는 것도 옳은 일인지... 불안한데.”

    “그래도 좋은 방향이라는 게 있잖아...”

    율이는 무릎을 끌어안으며 잔잔히 말했다. 유나에게 관리를 받아 며칠 동안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않은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유나의 정성이 녹아들어있는 여전히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살다보면 길을 잃을 수도 있고, 실수 할 수도 있는 거야. 앞에 어떤 일들이 있을지 어떤 상황을 만들어야 할지... 생각하면서 생활하는 건 정말 힘들 것 같은데?”

    “응, 힘들어... 힘들어서 지금 이런 꼴이 된 거지. 이번에는 잘해보려고 했는데... 결국 다 망쳤네.”

    “이번에는?”

    우울해 보이는 율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던 태수는 갑자기 들려온 그 말에 놀랐다.

    “응... 이번에는.”

    “뭐야... 그럼 입양이 두 번째라는 말이야? 원장님한테 그런 소리는 못 들었는데?”

    “당연히 못 들었겠지. 지금 이게 두 번째 삶이니까.”

    율이의 고백이 거짓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의 상황에서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못 믿어도 좋아... 나도 미친 소리 같으니까 지금까지 입 다물고 있었던 거고.”

    믿었다. 믿어야 했다. 율이의 말이라면 태수는 다 믿었다. 그냥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

    믿고 나니 유나에게 줄곧 사실을 말하지 않았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양오빠에 대한 일이 아니라... 율이의 존재 자체가 비밀이었구나.

    “그랬구나... 그랬던 거였어.”

    보육원 시절, 같은 나이대의 아이들 보다 얌전했던 것. 뭐든지 아는 것처럼 보였던 것도 그게 이유였다. 삶이 두 번째니까. 천방지축인 아이들을 보고 시끄럽다고 한 건 잘난 체가 아니라 그냥 사실 그대로의 표현이었다. 그걸 보고 아무것도 모르던 어릴 때의 태수는 재수 없다고 잠시 생각했었는데. 그게 미안했다.

    율이의 자조적인 말 속에서 저번 생도 고아라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활을 해온 걸까. 그런 그녀에게 파양에 관한 이야기를 한 게 조금 후회가 되었다. 그 얘기를 듣고 남 일처럼 생각하지 않던 율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있었던 율이의 반응과 행동을 보면 믿어야 했다.

    “어떻게 안 믿겠어... 생각해보니까 인생 2회 차가 아니면 보육원에서 그렇게 생활할 수가 없지.”

    “음... 믿어주는구나.”

    다 포기하는 마음으로 털어놓은 건데. 의외로 태수는 율이의 말을 믿어줬다. 그게 그렇게 듬직할 수가 없었다. 이제껏 말하지 못해 썩어있던 그 비밀이 바깥에 나와 드디어 공기를 만났다.

    평범한 가족을 가지고 싶다는 강박이 만들어낸 반작용. 두 번이나 고아였기에 가질 수밖에 없었던 미련이 율이를 이렇게 만들었다.

    “율아... 넌 가족이 꼭 필요하니?”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이제까지의 노력을 부정하는 것 같은 물음이라 율이의 말투에 살짝 가시가 꼈다. 필요하기에 이리도 처절하게 노력했고 망가진 거니까.

    “화내지 말고. 들어봐. 너가 진짜 가족을 원했던 걸까? 가족이 있는 게 평범한 거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사니까 원했던 거 아니야? 불행한 이유가 고아 때문이라 생각하고.”

    “너... 넌...”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그녀가 가족을 바랐던 이유... 그건 자신이 항상 불행했기 때문에. 남들과 다른 게 무엇일까 하고 꾸준히 고민한 결과... 가족이 없어서라고 지례 결정을 내렸었다. 가족만 가지면 자신도 평범해 지리라 그리 여겼다.

    첫 번째 생, 고아로 태어나 입양이 되고 가정폭력으로 인해 파양이 결정되었다. 학교에 소문이 나고 부모 없는 아이로 찍혀 학교 폭력에 시달렸었다. 말로 담기 힘든 생활을 보내다 그렇게 예전의 수정이 처럼 공부만 하며 결핍된 삶을 보냈다. 어영부영 시궁창 같은 삶은 흘러갔고 대학에 들어갔다. 사람을 사귀는 법을 몰랐기에 대학을 가도 똑같았다. 도망치듯 군대로 갔다.

    군대에서도 뭐가 다를까. 그저 부조리와 힘든 군 생활. 찾아오는 이 하나 없는 생활이었다. 그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기 자신밖에 없었다. 허나 문제는 그가 그런 자신을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것.

    결국... 암흑 같던 군생활을 버티다 사회에 나오기 직전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또 다른 장소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차라리 지옥이 지금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생각 하나 뿐.

    하나의 삶이 끝나고 두 번째, 운명의 장난처럼 또 삶을 살게 될 줄은 그도 몰랐다. 다시 태어났다는 것이 힘들었으나 수긍했다. 여러모로 결핍된 삶을 살았기에 단 하나를 목표로 삼았다. 그녀는 가족이 없었기에 모든 것이 불행했다는 강박을 갖게 되었다.

    이번엔 또 고아였으나 몇 가지가 달랐다. 갖추어진 외모, 거기다 남자가 아닌 여자로 태어난 것. 성격은 그대로고 바뀐 것은 피부 껍데기뿐이었다. 그 하나 차이로 많은 게 달랐다.

    입양된 가정은 친절했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친해지고자 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전개에 그녀는 당황했다. 고작 껍데기 차이로 이리도 바뀐 것이 믿기 힘들었다. 외모가 주는 이점은 상당했다. 그래서 자괴감이 심했다. 결국 이 외모 때문에 사람들이 흥미를 가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어릴 때 사귄 유나와 태수를 제외하곤 모조리 밀어냈다. 순수했던 그 시절의 그들을 믿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들 말고는 자신을 진정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게 2차 성징이 일어난 중학생 시절이었다.

    그러다 고등학생이 되어 만난 게 승현이와 수정이였다.

    승현이는 처음부터 율이에게 호감이 있어서 접근한 거였으나 유나의 소개로 여러 번 만나게 되면서 밀어낼 새도 없이 가까워진 인물이었다. 비록 몇 번의 마찰이 있었으나... 오빠와 여동생의 평범한 관계를 알게 해줬다. 그 덕분에 자신과 진태의 관계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학교 폭력을 당하던 수정이는 예전의 자신과 겹쳐보여서 처음엔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고 변하고자 노력하는 아이를 내칠 만큼 율이가 냉정하진 않았다. 수정이의 변화를 옆에서 지켜보며 예전의 자신을 반성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러다 이번 일이 터졌다... 결국, 가족이 문제였다. 자신이 멀쩡한 가족만 가졌다면 아무런 문제없이 살 수 있었을 텐데. 가족... 평범한 가족만 있었다면...

    태수의 말은 정곡을 찔렀다. 율이의 강박을 정확하게 집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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