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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해도 괜찮아-48화 (48/54)
  • 〈 48화 〉 가족에서 남으로

    * * *

    태수가 일하는 카페에서 그의 존재는 컸다. 카페라는 공간은 성비로 따지면 여성에게 인기가 많은 공간이기에. 그곳에서 일하는 알바생의 외모가 갖춰지면 갖춰질수록 수익에 차이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맛과 질로 승부하는 곳에서 태수 같은 알바생이 있다면 적자날 걱정은 없었다. 그만큼 태수의 외모는 이 일대에서 알아줬다. 서율과 비슷하리만큼 팬을 보유하고 있으나 그에 자각이 없는 그였다.

    이미 그에게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 여성의 마음을 얻기란 너무도 힘든 것이기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여력이 없었다.

    그날은 유독 바빴고 거기다가 동료 알바생들에게까지 붙잡힌 시간이 길었던 그는 거의 녹초가 되어있었다. 홀로 남은 태수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여러 알바를 전전하는 건 당연했다. 그래서 피곤함은 항상 그를 따라다녔는데... 오늘 만큼은 어째선지 이 피로를 조금 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최근 율이와의 관계도 좋았다. 재회했을 때만해도 단 둘이 무언갈 하리라곤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비록 졸업한 보육원에 가보는 게 끝이었으나. 서율이의 성격상 남자와 단 둘이 행동하는 것 자체가 큰 변화였다.

    그가 서율이를 생각하는 마음은 커도 급하게 행동하지 않는 건 그녀가 첫사랑인 것도 있고 유나에게 그녀가 어떤 중학교 시절을 보내왔는지 일찍이 들었기에 가능했다. 차분하게 다가가는 게 그만의 부담을 주지 않는 방법이었다.

    그의 사랑의 성공보다도 율이가 아프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선인 남자였다. 그런 그였으나. 오늘은 조금 사치를 부리고 싶었다고 할까.

    긴장으로 살짝 떨리는 손이 그의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태수의 손가락이 율이의 번호 위에서 몇 초간 정지했다 다시 내렸다. 그걸 수차례 반복했다. 그런데 어째선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신호음이 가는 도중이었다.

    잠시 율이의 불편보다 자신의 마음이 이긴 결과였다. 통화만으로도 이리 긴장이 되는 데 손이라도 잡았다간 미쳐서 한강물에 뛰어들 자신이 있었다.

    [네... 여보세요.]

    콩깍지가 쓰인 태수의 귀에는 그 목소리조차도 예쁘게 들렸다. 순간적으로 귀엽다고 느낀 태수는 자신이 얼마간 혼이 나갔다는 걸 깨닫고는 귀여운 목소리를 감상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며 자신을 타일렀다.

    다시금 정신을 부여잡고 말을 이어 나갔다.

    “늦은 시간에 미안.”

    그리 말하며 카페 창문으로 바깥을 보니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카페의 마감시간이 다 되어 손님은 다 빠져나간 상태, 퇴근할 준비를 마친 뒤라 이제 카페에는 태수 혼자만 남아 있었다. 태수의 통화를 방해할 사람은 없었다.

    그때 술 취한 누군가가 휘청거리며 카페 앞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게 많이 취한 것처럼 보였다. 낯익은 남자,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다.

    [왜?]

    서율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다시 전화에 집중하는 태수였다.

    “무슨... 받자마자 짜증이야?”

    그 짜증마저 귀엽다 느끼는 자신이 정녕 미치지 않고선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서율이가 상냥한 건 어릴 때부터 봐온 태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정도의 짜증의 농도는 아직 괜찮다는 의미였다. 정말 전화를 받기 싫었다면 애초에 이렇게 통화가 안 되었겠지.

    [전화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해.]

    전화 싫어한다면서 끊지 않아줘서 태수는 고마웠다. 짧은 통화, 이 툴툴거리는 목소리만 들어도 하루의 피곤은 사라지고 내일 또 힘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하는 게 뭔데 그럼?”

    그리 생각하면서도 조금만 더 대화를 이어가고 싶은 마음에 질문을 했다. 하고 보니 조금 노골적인가 싶어 마음이 쓰였다.

    [나? 왜? 알아서 뭐하게...]

    아니나 다를까. 조금 경계하듯 돌아온 목소리에 태수는 한발 빼기로 했다. 서율이 하고의 대화는 조금이라도 성급하면 마음을 닫을 수 있었기에 조심해야했다. 그런 그녀가 피곤하다기 보단 섬세하기에 그런 거라 태수는 이해하고 있었다.

    “아이고 의미 없다. 내가 알아서 뭐하겠니. 물어본 게 아주 큰 잘못이다.”

    조금은 크게 반응하며 분위기를 돌려야 했다. 그러자 서율이의 옅은 웃음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전해졌다. 그에 또 귓속이 간질간질했다. 짧은 웃음을 끝으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만.]

    “율아?”

    대답은 없으나 일단 서율이는 전화를 끊지 않았다. 좋아하는 이성과의 통화인데 이리 쉽게 끊을 수는 없었다. 적어도 잘자라는 인사는 해야 하니까. 그는 이게 통신장애라고 해도 끝까지 붙들고 있어야했다.

    태수는 침대의 스프링 소리가 들려서 조금 놀랐다. 서율이 누워있는 모습을 상상하자 볼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아무튼 저쪽의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통신은 잘 이어져 있는 것 같았다.

    [오빠?]

    그때 서율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율이 오빠라고 할 사람은 서진태라고 하는 양오빠뿐이기에 단번에 연상이 되었다. 진태라는 이름을 생각하니 방금 카페 앞을 지나간 사람이 서율의 오빠 진태라는 걸 깨달았다.

    당황한 듯이 서율의 숨소리가 들리자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 같다고 느낀 태수였다. 그리고 이내......

    [율아...]

    하는 소름끼친 진태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태수는 의자를 박차며 일어났다. 그 큰 움직임에 의자가 뒤로 자빠져 기분 나쁜 소음을 냈다.

    어째서 이렇게 느낌이 안 좋은지...

    율이하고 양오빠의 관계가 묘했다는 건 알았다. 저번에 카페 근처에서 본 진태의 행동, 그리고 유나가 이상하다고 한 일들. 그냥 상상력이 과하기에 그는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한 거라 여겼다.

    “설마...”

    [이러지 말자. 응? 이건 아니잖아!]

    다급한 율이의 목소리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다행이 오늘은 율이네 집과 가까운 카페에 나와 있어서 빨리 도착할 수 있으리라.

    전속력으로 서율의 집으로 향해 달려갔다. 전단지 알바를 핑계로 서율의 집 위치를 외워놓은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태수는 상상도 못했다.

    “율아!!! 서율!!”

    뛰어가는 도중에도 전화기를 끊지 않았다. 여러 번 율이를 불러보았는데도 들리지 않는지 대답이 없었다.

    율이의 처음 듣는 겁먹은 말투에 태수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강제로 뭔가를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제발 늦지 않기를 바라며 쉬지 않고 달렸다. 거리가 은근히 가깝다고 느꼈는데 다급해져서 그런지 거리감이 멀게 느껴졌다.

    도착한 서율의 집 앞에서 문을 두드렸다. 시간도 시간인지라 서율의 부모님은 이미 잠들어 계셨다. 반응이 없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닥쳐!! 네가 먼저 꼬셨잖아!]

    [내가? 내가?! 내가 언제!!]

    서율의 겁에 질린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태수는 화가 치밀었다.

    “문 열어!!!!”

    문을 부술 듯이 발길질을 했다. 여차하면 서율에게 도움을 주러 왔다고 들렸으면 좋겠으나 들리지는 않는 듯 했다.

    “당신 누구야!”

    “아저씨, 딸이 위험해요!”

    문이 살짝 열리며 율이의 양아버지가 모습을 보였다. 잠옷차림에 목소리가 잠긴 것이 방금 눈을 뜬 모양이었다.

    살짝 벌려진 틈에 손가락을 쑤셔놓고 문을 열었다. 억지로 비집고 태수가 들어가자. 서율의 양부모는 당황한 기색이 가득했다.

    태수는 일단 그들을 무시하고 서율을 찾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율이네 집은 2층 주택이라 1층과는 층간으로 구분되어 있는 구조였다. 율이 방을 모르기에 보이는 방문마다 열어젖히는 수밖에 없었다.

    “율아!!!! 서율!!!!”

    태수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아저씨가 길을 막았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아저씨에게는 이게 당연한 방식이었다.

    “당신 뭔데 집에 와서 행패야?! 경찰 불렀으니까 얌전히 있어!”

    “경찰이요? 잘했어요. 아저씨 율이 방이 어디에요! 빨리 말 안하면 늦어요!!”

    경찰이고 뭐고 태수는 아저씨의 어깨를 붙잡고는 처절하게 말했다. 서율이 지금 무슨 기분인지는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끔찍할 것이다.

    그 끔찍한 상황에서 빨리 빼내 줘야 했다. 세상이 싫증난 그런 표정은 더 이상은 보기 싫었다.

    이제 주변을 보기 시작한 아이인데... 이 무슨 일이... 태수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2층, 왼쪽 방이에요.”

    겁에 질려 있던 아주머니가 태수의 절박함에 그리 말해주었다. 서율이 있는 위치를 말이다.

    태수는 곧바로 올라가 문을 열었다. 다행히 닫혀있지는 않았다.

    눈앞에는 정말 역겨운 광경이 있었다. 율이 위로 한 인간이 아닌 짐승이 짓누르고 있었다. 그건 본능에 복종한 동물에 불과했다.

    눈물범벅이 되었으나 울음소리는 흘리지 않고 그저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보고 있는 서율의 모습에 태수는 머리가 돌아버렸다. 서율의 옷을 벗기려고 하는 진태에게 그대로 몸을 던졌다.

    “개새끼야!!!”

    험악한 욕지기를 내뱉으며 한 번 두 번 주먹을 내리쳤다. 진태가 떨어져 나갔어도 서율은 아무런 반응 없는 인형처럼 그저 누워 있었다.

    태수가 온지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알더라도 모든 관심을 끊은 듯 했다. 자신의 몸에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남의 일처럼 보는 눈초리였다. 감정도 그 어떤 반응도 없었다.

    다급히 따라 들어온 양부모님이 진태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봤다. 율이의 모습에... 무슨 일이 벌어지려 했는지. 어느 정도 예상을 하게 한 것이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율아!!”

    아저씨 아주머니가 눈물자국이 가득한 서율을 보고는 다급히 끌어안았다. 헝클어진 옷가지를 정리해주며 아주머니의 볼에 눈물이 자국을 남겼다.

    둔탁한 타격음이 울리는 사이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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