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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해도 괜찮아-47화 (47/54)
  • 〈 47화 〉 가족에서 남으로

    * * *

    그녀는 이미 모든 상황을 듣고 있었던 것 같았다.

    “유나야... 너 알고 있었지? 처음 최승현 소개해줄 때부터 알았던 거지?”

    “응, 승현이가 율이 소개해 달라고 할 때부터 느낌이 팍! 왔지.”

    “내가 거절할 줄 알고도 소개한 거야? 너 정말...”

    “그건 모르지. 승현이가 율이의 마음을 확 휘어잡을지? 결과는 아니었지만.”

    “너는 도통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승현이에게는 미안한데... 나 진짜 놀랐어! 우리 율이가 그렇게 따듯하게 거절할 줄이야!”

    “예전 같았으면 안 그러는데... 손은 바들바들 떨지. 얼굴은 시뻘겋지... 안 좋은 말을 할 수가 없더라.”

    최승현만 그랬던 게 아니고 이전의 남자애들도 다 그랬다. 그냥 내가 자세히 보려고 하지 않았을 뿐... 그런 용기를 내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 건 할 수는 없는 짓이었다.

    “내가 말했지? 너무 안 만나는 것도 문제라고. 하나씩 배워나가는 거야. 그게 사랑은 아니라도 엇비슷한 감정을 배운다면... 율이도 조금은 사는 게 편안해지지 않을까?”

    “내가 무슨 사는 게 불편한 사람처럼 말한다?”

    “응 미안해... 근데, 내 눈에는 그렇게 보여.”

    피식 웃으며 말하는 유나 탓에 조금 속이 쓰라렸다. 사는 게 불편한 건 어찌보면 사실이었으니까.

    “말이나 못하면...”

    “좋은 것도 봤으니 이제 집에 가자!”

    유나는 내 팔을 끌며 정문 쪽으로 향했다.

    ­

    집으로 가는 길, 유나가 할 말이 있는지 어딘가 안절부절 못했다. 무시할까 했는데... 물어봐 달라는 듯 눈치를 줘서 안 그러기도 힘들었다.

    “똥마렵니?”

    “율아... 외모와 다르게 섬세하지 못하구나.”

    “뭐래... 내가 얼마나 눈치가 빠른데. 딱 보니 똥 마렵구만.”

    뭐가 웃긴지 유나는 키득거렸다. 그러다 표정에 그늘이 생겼다.

    “음... 뭐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그날, 수정이하고 진태 오빠 만나러 갔어.”

    “그날?”

    “너랑 태수 오빠랑 보육원에 간 날.”

    “그때? 너희들이 진태 오빠를 왜 만나?”

    “그냥? 궁금한 게 있어서.”

    근심이 가득한 표정을 보니... 뭔가 알아낸 게 틀림없었다. 진태 오빠하고 나한테 일어난 일에 대해 눈치를 챈 걸까? 그럼 굉장히 곤란했다. 말로 하긴 힘든 끔찍한 일이고 설명하기도 막막했다.

    “뭐가 그렇게 궁금했데? 오빠 말고 나한테 물어보지...”

    “물어보면? 너가 대답은 해주고?”

    그것도 그래. 내가 대답을 해줄 리가 없었다.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아도 입에서 걸린 속마음은 털어놓기란 여간 힘들어서.

    나한테 물어보지 않은 건 지금까지 말해주지 않은 걸 잘 알기에 그렇게 한 거겠지.

    “그래서? 뭘 물어 봤는데?”

    그리 되물으며 긴장했다. 오빠하고 유나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솔직히 무서웠다.

    “그냥... 요즘 율이를 너무 귀찮게 하는 거 같아서. 왜 그러는지 물어봤지.”

    꽤나... 직설적으로 물어봤구나? 그래서 오빠가 뭐라 답했을까. 남들의 눈을 크게 신경을 쓴다면 당연히 사실은 말하지 않았을 테고.

    “이유는 들었어?”

    “아니? 엄청 당황하는 게 이상하긴 한데... 그냥 가족이니까 챙긴다고 했어.”

    그럼 그렇지... 남들한테 자랑할 일은 아니라는 걸 오빠도 알 테니까. 진심으로 그만두면 좋겠는데... 또 그게 원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오빠가 또 가족들 하고 연을 끊고 살까봐 무서웠다.

    태수는 눈치를 보면서 사는 게 싫어서 원한대로 가족의 품에서 나왔다. 어쩌면 그가 인생을 한 번만 살고 있기에 그리 결심한 것일지도 몰랐다.

    예전, 남자일 때부터 난 평범한 가족에 대한 강박이 있었다. 어떤 인물이라도 평범하기만 한다면 사실상... 누구라도 좋았다. 비위는 내가 맞추면 되는 거고. 그들은 가족이라는 직책에 충실해 주면 됐다. 옛날, 그 가정 폭력범들에게 고통 받았던 건 나에게 아직도 트라우마로 남아있었다. 폭력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에 하나였다. 그래서 수정이가 학교 폭력을 당하고 있을 때 싫다고 하면서도 도와줬다.

    어쩌면, 그냥 평범한 척 하고 싶은 걸지도... 가족이 없다는 인식도... 말도 이제 듣거나 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한마디 했으니까 이제 괜찮을 거야! 너무 그렇게 챙기는 것도 안 좋다고 하니까. 율이랑 대화해보겠데.”

    “나랑?”

    음... 오빠랑 단 둘이 대화하는 건 좀...

    계속 피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 정말이지 돌아버리겠네! 그 대화가 이루워지는 게 오늘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오늘만 버티면 다시 오빠는 군대로 돌아가고... 그러면 난 다시 평범한 생활을 살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살짝 긴장했다. 혹시나 오빠가 친구하고의 약속이 취소되어 집에 있을까하고 무서운 상상을 한 탓이었다.

    내가 집에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하고 아빠도 집에 돌아왔다. 그에 안심하고 방으로 들어와 쉬고 있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기대있을 때였다. 전화가 오기에 누가 건지도 확인하지 않고 일단 받았다. 나한테 연락할 사람은 거기서 거기라... 확인 할 것도 없었다.

    “네... 여보세요.”

    [늦은 시간에 미안.]

    수정이나 유나라 생각했는데 태수였다. 굵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간질간질하면서도 듣기 좋은 목소리라 생각이 했다는 게 좀 내가 미친 것 같았다.

    “왜?”

    왜인지 모르겠으나. 태수하고 전화하는 것일 뿐인데 어째서 조금 긴장이 되었다. 이게 무슨 기분일까... 조금 짜증이 났다.

    그래서 목소리에 짜증이 저절로 섞였다.

    [무슨... 받자마자 짜증이야?]

    내가 아무리 짜증을 내도 태수는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그게 고맙기도 했다. 왜 항상 나는 모나게 상대방을 대할까... 조금 고쳐야 할 부분이었다.

    “전화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해.”

    그리 다짐해도 바뀔 생각이 없는지 다시 평소대로 말이 튀어나왔다.

    [좋아하는 게 뭔데 그럼?]

    “나? 왜? 알아서 뭐하게...”

    [아이고 의미 없다. 내가 알아서 뭐하겠니. 물어본 게 아주 큰 잘못이다.]

    과하게 반응하는 게 뭔가 웃겼다. 절로 웃음이 나와서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그때 방 앞에서 인기척이 났다.

    똑똑

    노크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렸다. 문은 잠갔는데 쉽사리 열리는 게 열쇠를 사용한 것 같았다.

    “잠시만.”

    태수에게 양해를 구하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방으로 비틀거리며 들어온 것은 오빠였다. 걸음걸이가 예사롭지 않았다.. 술에 취한 듯 힘이 풀린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째선지 끈적하 게 웃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불안함이 점차적으로 증가했다.

    오빠가 왜 문을 강제로 열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일어날 무렵.

    다가온 오빠가 내 어깨를 붙잡더니 그대로 밀었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반응하지 못했다. 뒤에는 침대가 있었고 난 그 위에 어깨가 오빠에 의해 짓눌린 체 눕게 되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의미를 모를 공포가 엄습했다.

    “오빠?”

    작게 오빠를 불러봤는데 반응이 없었다. 그저 오빠의 풀린 눈만이 나를 살피고 있었다. 뭔가... 잘못되었다.

    “율아...”

    오빠가 입을 열자 술 냄새가 진동했다. 그때 천천히 내려오는 오빠의 얼굴을 통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다급히 손을 뻗어 얼굴을 막았다. 온몸으로 버둥거리며 저항했다.

    “이러지 말자. 응? 이건 아니잖아!”

    다급하게 말을 전해도 오로지 육체에 지배된 듯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마치 괴물을 마주한듯한 느낌이었다. 발버둥 쳐보지만 나보다 큰 오빠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절망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항상 처절하게 살았다. 누군가에게 폐도 끼쳐본 적이 없다. 그저 내가 정한 것도 아닌 정해진 인생에 열심히 순응하여 살았다.

    남 탓이 아닌 내 탓을 하며 그렇게 살았다. 지금 내게 일어나는 이일도 내 탓인 건가. 내가 벌인 일이기에 내가 이 참혹한 일을 그저 받아야 한다는 건가.

    “내가 뭘 잘못했는데!!”

    악에 받쳐 뱉은 말에 오빠가 잠시 멈칫 했다. 하지만 술에 취한 오빠는 옳은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표정을 구기며 언성을 높였다.

    “닥쳐!! 네가 먼저 꼬셨잖아!”

    “내가? 내가?! 내가 언제!!”

    꼬셨다니 난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억울하고 원통해서 발악하고 발버둥 쳤으나.

    짜악!

    그 마찰음이 낸 고통에 이내 그 움직임은 딱 멈추었다. 자신의 고개가 충격으로 인해 돌아가고 욱신거림이 점점 더해갈 때. 자신이 오빠한테 맞았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과거의 기억들이 쓰나미처럼 마음을 잠식해갔다.

    폭력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거다.

    폭력이라는 단어만으로도 어릴 때의 가정폭력을 당하던 자신의 모습과, 학교에서 폭력을 받던 모습이 오버랩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알싸하면서도 거친 폭력에 노출되자. 그때의 느낌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만해달라고 빌던 자신의 모습 아프다고 울부짖는 자신, 비아냥대는 부모와 더한 폭력을 가하던 학교친구들... 넘치는 그때의 공포에 나는 어떤 반응도 보일 수 없었다.

    몸이 미친 듯이 떨렸다. 다시금 폭력의 공포에 빠져버린 나는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죄송해요.... 한번만 봐주세요.....”

    그때와 같이...... 빌었다. 얼굴에서 흐르는 게 침인지 눈물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빌었다.

    하지만 오빠는 손을 내 허리춤에 가져대 댔다. 끔찍한 소름이 온몸에 내달렸다. 끝까지 부여잡고 있던 무언가가 머릿속에서 끊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와 같았다. 익숙한 그때의 감정. 그럼에 이 모든 상황이 아무래도 좋아졌다.

    이제....... 다 필요 없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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