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 가족에서 남으로
* * *
파양이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머리에 맴돌았다. 너무 끔직한 단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태수의 표정은 멀쩡했다.
나라면 파양된다는 가정만으로도 눈물이 날것만 같아.
“난 오히려 지금이 편해.”
“왜? 가족이 없는 게 편해?”
“가족이 없어서 편한 게 아니라... 그냥 억지로 맞추고 있다는 느낌이 커서. 잘해야 한다고 계속 생각해서 집에서도 불편했거든.”
남일 같지 않았다. 처음부터 같이 있던 가족이 아닌... 서류상의 가족이 가지는 불안함. 거기다가 선택권을 내가 아닌 양부모님이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온 몸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항상 자신을 채찍질 하며 정신을 차렸고...
“가족하고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야. 계속 불안을 안고 사는 것보단 그냥 원래대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리 말씀드리니 부모님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셔서 이렇게 된 거지 뭐. 근데 사실상 자취하는 아들 같은 느낌이지. 지금도 종종 연락드리고. 사이가 나쁘지 않아. 더 좋아졌지.”
“그래... 너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저런 방법도 있구나...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넌 어때? 가족하고 괜찮아?”
“나는...”
괜찮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안 괜찮으니까.
“부모님하고 사이는?”
“좋아.”
엄마하고 아빠는 날 딸처럼 아껴주신다. 바라는 건 사실상 없으시다. 그냥 나 혼자서 착하고 예쁘게 보이고 싶다는 마음만 강해서 그렇지. 그분들이 강요한 건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그런 과정에서...
“오빠하고는?”
오빠가 나한테 마음을 품었다는 게 문제였다.
“음...”
“지혜 쌤이 나한테 말해준 게 있어. 율이 너가 대답을 망설이거나 확답을 주지 않으면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라고. 지금 그런 거지?”
정확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현재 처한 모든 상황이. 집으로 돌아가는 이 길 조차도 불편했다.
“이 얘기는 이제 그만하자.”
“그래, 얼른 가자. 벌써 어두워졌어.”
내가 말하기를 꺼리자. 태수는 웃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 묻지 않는 게 고마우면서도 어딘가 서운한 건 왜일까...
“근데... 너 어디가? 보육원에서 잔다며?”
아까의 말에 따르면 보육원에서 지내는 거 같은데 태수는 계속 나를 따라왔다. 조금만 더 가면 버스정류장이었다.
“나? 너희 집 근처 카페에 잠시 들리려고. 데려다 주는 거 아니니까 걱정 말고.”
마치 준비한 것처럼 답하기에 조금 의심스러웠다. 맘대로 하시길...
오빠는 손을 잡으려고 한 날부터 적극적으로 변해갔다. 휴가가 끝나감에 따라 순차적으로 변화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루하루가 더 힘들었다.
가족이라 생각했던 날이 언제였는지 이제는 기억하기도 싫을 정도였다. 낯선 사람 선에 멈춰 있었던 오빠가 이제는 내 안에서 점점 이상한 사람으로 변해갔다.
스킨십이라고 하는 것에 목마른 사람처럼 쉴 새 없이 시도했다.
방에 있을 때는 문을 잠가두었다. 특히 하굣길에 오빠가 데리러 오기 때문에 애들하고 헤어지고 난 뒤가 가장 문제였다.
오빠가 눈치 채지 못하게 행동했다. 유나나 수정이를 집에 초대하거나 유나네 집에 놀러가거나 해서 자연스럽게 같이 있는 시간을 줄였다.
유나는 본래 왕래가 잦으니 괜찮았다. 근데 수정이의 경우는 처음 집에 초대하자 엄청 당황한 반응을 보였다.
“갑자기... 왜?”
라고 하며 나의 행동에 의아해했다.
수정이를 이용한 점은 미안했다. 하지만 그렇게 할 만큼 필사적이었다.
각오 한 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빠를 사랑하는 척하는 것도 감정 소모가 너무 심했다.
집안이 온통 가시 방석이었다. 지칠 대로 지쳤고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갔다.
집에만 박혀있던 집순이였는데 최승현네 집까지 지은이를 본다는 목적으로 간 적이 있으니 말 다했다.
집순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오빠가 집에 체류하는 10일 동안 밖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 하루만 남겨두고 있었다.
그날은 드물게도 오빠가 친구들을 만난다고 나갔으니 돌아오면 늦은 저녁이나 새벽일터였다. 부대복귀를 하려면 잠자고 일찍 나가야하니 실질적으로 당분간은 이런 일을 안 해도 된다는 걸 의미했다.
“오늘은 표정이 울상이 아니네.”
그야 그럴게 오늘이 오빠 휴가 마지막 날이니까. 이런 생각을 할 만큼 해방감이 어마어마했다.
앞으로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을 또다시 해야 할지도 몰랐다. 갑작스런 결정으로 이런 방식을 취했으니... 어쩌면 더 나은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여기가 올라가있어. 조금이지만.”
유나가 내 한쪽 입꼬리를 손가락으로 찔렀다. 설마 입꼬리까지 올라가 있을 줄이야.
“수업시간에도 선생님들이 신경 쓰인다고 그러시고 반애들은 또 쓰러지는 거 아니냐고 걱정하고 그랬어. 걱정인지 호기심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같이 있던 최승현이 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 말해줬다. 계속 내 심기가 안 좋은 거 같아 반 애들도 내 눈치를 본다고 했다. 저번에 쓰러졌던 거 때문에 이전보다 더욱 주목받게 되었다. 유나의 말로는 나에게 병약한 이미지가 추가되었다나 뭐라나...
마치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빠는 여전히 휴가 도중인데도 내일이면 오빠가 떠난다는 그 사실이 내 마음을 조금 편하게 만들었다.
“오늘은 데리러 안 오는 거야?”
유나가 그리 물었다. 오빠를 물어보는 것이겠지.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니 유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태 오빠, 좀 불편해 졌어. 과하다고 해야 하나. 예전에는 오빠가 편하다고 느꼈는데.”
“응...”
착한 오빠였는데.
지금 착한지 나쁜지 라고 말하라고 하라면 잘 모르겠다. 감정에 잠식되어 저렇게 변해버린 걸까. 소유욕이 강해 날 구속하려고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튼 부담될 정도로 과하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아무튼 오늘만 버티면 된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오빠와 보면 되는 거니까. 시간이 간다면 이 불편한 감정이 무뎌질 것이라고 믿고 있다.
책상 옆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창창했다. 바람도 산뜻하고 어디 몸이 아픈 곳도 없이 상쾌했다. 더할 나위 없이 멀쩡한 하루였다.
“기분 좋다.”
무심코 말해버릴 만큼 기분이 올라가 있었다. 유나가 그런 나를 보고 영문 모를 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엄청난 소문이 돌던데.”
“또 뭐야.”
“에이... 잘 알면서. 율이는 고등학생 어린 애들로는 성에 안 찬다나?”
“역시나... 소문이 도는구나. 참 다들 나한테 관심이 많아.”
“태수 오빠도 쫙 빼입고 왔고... 율이야 뭐 항상 예쁘고. 둘이서 정문을 같이 나가니까 주변에서 탄식이 막 터지더라구.”
말을 말자...
내가 대꾸하지 않자. 유나는 최승현을 바라보며 동의를 구했다.
“승현아 너도 봤지?”
“응, 봤지. 잘 어울리긴 하더라.”
최승현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성의 없는 대답이었다.
오늘 수업이 모두 끝났다. 하루를 유나네 집에서 보낼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다.
그러다 생각을 접었다.
오빠의 마지막 휴가 날이니 인사정도는 해줘야겠다 싶어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방에서 문을 잠그고 있다가 다음날 일어나서 보내기만 하면 되니까.
“잠시 시간 있어?”
“왜?”
갈 준비를 다하고 복도를 걷고 있던 나에게 최승현이 말을 걸었다. 물어봐도 대답이 없다. 나 역시 재촉할 마음이 없어서 그냥 멈춰 서지 않고 걸어갔다.
“할 말이 있는데.”
“하면 되지. 왜 뜸을 들여?”
지은이가 또 말썽을 부리나? 아님 또 놀러가자고 했나? 종종 나에게 지은이에 대해 갖가지 질문을 했었기에 이번에도 상담하고 싶은 게 있다고 생각했다.
하교를 하는 학생들이 줄어드니 최승현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유나는 교문에 이미 가 있으려나? 난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최근에 계속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미루고 있었는데...”
잠자코 들어주었다. 내 기분을 생각해서 말할 걸 미뤘다니 중요한 이야기처럼 보였다.
최승현의 눈을 바라보자 다급히 눈을 피했다.
뭐지 무슨 말을 하려기에 저렇게 긴장을 한 거야.
“좋아해, 서율.”
순간 잘못 들었는지 착각했다. 최승현의 입에서 나올 줄은 상상도 못해본 말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물어봤을 땐 아니라고 했었는데... 숨겼던 거였다. 숨길 만큼 진심이라는 의미였다.
난 항상 주의를 기울여 왔었다. 남들은 인간이니 상대방을 좋아하게 되고 고백도 할 수도 있는 것이라 생각할지도 몰랐다. 그런 당연한 일도 이전의 나에겐 스트레스였기에 주변에 남자를 잘 만들지 않았고 가까이 하지도 않았다.
근데 이제는 그건 과거였다. 유나의 부탁으로 반강제로 남자를 가까이 하게 되면서 이런 상황을 무의식적으로 예상을 한 것일지도 몰랐다. 유나는 이걸 염두하고 날 최승현과 만나게 한 것일까...
모든 걸 제쳐두고 그냥 내가 변한 걸까... 아님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이 너무 처참하기에 동요조차 하지 못하는 건지.
이런 느닷없는 고백에도 그 어떤 느낌도 들지도 않았다. 당황, 어이없음, 그리고 분노. 이전처럼 모난 감정은 없었다.
이 고백을 듣고 처음 든 생각은... 유나가 그를 좋아하지 않는 게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예상했던 최악의 상황이 아니라는 게 조금 안도가 되었다.
최승현의 고백에도 아무렇지 않다는 건 단 하나 때문이었다. 내가 그를 전혀 이성으로 보지 않는다는 의미.
“야... 나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구나.”
“뭐가...?”
“지금까지 내가 몇 번이나 고백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많이?”
“그래... 많이 받았지. 대답은 다 싫어... 거기다 욕도 한바가지 던져줬었지 아마?”
“응... 각오는 하고 있어.”
최승현은 이미 거절당할 생각 가득이었다.
거절당할 걸 알고 하는 고백은 어떤 기분일까... 내가 알 순 없어도 상당히 안 좋은 느낌이라는 예상은 할 수 있었다. 그의 일그러진 표정이 모든 걸 말해줬다.
“음... 고맙다. 나 좋아해줘서. 근데... 미안해.”
“혼 날 각오하고 있었는데... 너 뭐 잘못 먹었어?”
생각했던 것과 다른 반응인지 최승현이 오히려 놀랬다.
내가 욕하는 것보다 더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 쌘 척은.
“내 욕이 그렇게 듣고 싶니? 해줄까?”
“아니! 다음에 보자!”
최승현의 진심에 나도 진심으로 답해줬다. 거절을 듣고도 홀가분해 보이는 최승현의 표정을 보니 이제는 알겠다.
이성에게 고백을 한다는 건 저런 표정을 지을 정도로 많은 걸 쏟아내는 행위라는 것을. 그럼에 반성했다. 이제껏 나에게 감정을 전달했던 이들에게 모질게 대한 것은 잘못된 일이었다고.
더 좋은 거절방법이 있었음에도 하지 못했던 건 내가 그냥 성숙하지 못해서였다. 남을 신경 쓰지 못하고 내 마음을 짓밟지 말라는 이기적인 마음에 모나게 행동했었다. 그땐 그 방법밖에 안 떠올랐다.
갑자기 부끄러워졌는지 최승현은 손을 갑자기 흔들어 인사하더니 뒤도 안돌아보고 뛰어갔다. 익숙해지지 않는 고백현장을 뒤로하곤 집에 가기위해 움직였다.
1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가기 위해 모퉁이를 돌자. 거기에 낯익은 사람이 히죽 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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