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 어릴 적, 그때의 보육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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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현이는 나와 태수의 사이에서 나오질 않았다. 이유를 모르겠으나 우리 둘을 꾸준히 살피며 대화를 나누는 걸 관찰했다. 아이를 바라보면 눈을 다급히 피했고 다시 태수를 보고 있으면 원래대로 나를 보는 걸 계속했다.
왜 그러나 싶어 석현이에게 물어보아도 대답은 하지 않고 순수한 웃음만 보여줄 뿐이었다. 내가 아이를 좋아했었나... 결코 그건 아닌데도 지은이나 석현이는 정말 귀여웠다. 둘다 적당히 얌전해서 막 날뛰지 않아 그런가.
왜 이렇게 나를 바라보는지 이유를 모르겠으나 알려주질 않으니 물어보는 걸 포기했다.
태수와 함께 보육원 본관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안에서 익숙한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정말 우당탕이라는 효과음이 잘 어울릴 만큼 성대한 소리가 났다. 원장님과 생활지도교사로 계시는 선생님이라는 걸 바로 알았다.
두 분 중 젊은 선생님이 활짝 웃으며 손을 뻗어왔다. 잡혀진 손에서 별안간 포근함이 퍼져나가 온 몸을 적셨다.
반가움과 놀라움이 공존한 듯한 선생님의 표정에서 날 정말 기다리셨다는 게 느껴졌다.
“율이? 진짜 율이니?”
“네. 지혜 선생님.”
지혜 선생님은 보육교사로 내가 이 보육원에서 막 생활 할 때 처음 일을 시작하셨다. 아이들을 돌보는 것에 필요한 지식과 방대한 실습을 쌓으셨을 텐데도 신입은 언제나 떨리는 것이라.
지혜 선생님도 마냥 순탄한 신입생활을 보내진 못했었다. 실수가 있을 때마다 선배에게 까이고 원장님에게 혼날 때면 나를 찾아와 하소연을 하셨기에 잘 알고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우유가 든 컵을 양손으로 들고 홀짝거리며 지혜 선생님의 상담을 해줬던 기억이 있다.
내가 입양이 되고 9년쯤 지났으니 지금은 서른셋이시겠구나.
“언제 이렇게 컸어?”
“선생님, 9년이 지났어요. 아직도 그대로면 문제가 생긴 건데요.”
“어떻게 어릴 때랑 말하는 게 똑같니? 얼마나 컸는지 한 번 안아보자.”
지혜 선생님이 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잡아당겼다.
정신을 차리니 이미 엄청 따뜻한 품속에 갇혀있었다. 변함없는 사람의 향기에 어릴 적에도 이 사람한테 자주 안겼던 기억이 몽실 떠올랐다.
혼난 지혜 선생님은 위로해 달라며 자주 포옹을 권하셨다. 그땐 자신을 남자라는 자각이 있었던 때라 불손하게도 부끄러워했던가? 지금은 그저 따스한 체온이 기분 좋다는 느낌뿐, 유나의 포옹과 별 다를 건 없었다. 나도 여자라는 자각이 된 모양이었다. 그게 이젠 기쁘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그 땅꼬마 율이가... 고생이 많지?”
“아뇨. 고생은 무슨...”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똑 부러지게 그렇게 말하는 율이 성격에 어정쩡한 대답이라니.”
뜨끔한 나는 그냥 그 질문을 웃어 넘겨야만했다.
“응? 뭐야 그 어색한 웃음은?”
이것도 안 되나... 어째 유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것 같았다.
이게 어른의 통찰이란 걸까. 나도 모은 나이 다 합치면 성인이 되고도 한참 지났는데 왜 저런 통찰력이 없는지... 아마 몸이 아직 덜 큰 만큼 정신나이도 그 신체에 맞게 머물러 있는 걸까?
“제 근황보단 선생님은 결혼 이미 하셨나요? 기억으론 일찍 결혼해서 더럽게 힘든 일 때려 친다고 했던 거 같은데?”
대화 주제에서 벗어나고자 선생님과 단둘이 했던 이야기를 풀어버렸다.
지혜 선생님은 나를 슬쩍 밀어내곤 뒤에 서계신 원장님을 애처롭게 바라봤다. 그런데도 원장 선생님은 여전한 미소를 보이셨다.
“율이한테 그런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그... 그게, 율이가 어릴 때부터 조신하고 말도 참 잘 들어 주기에 편해서...”
“그만큼 율이를 아끼셨고 마음을 여셨다는 말이겠지요. 좋아요. 앞으로도 그렇게 모든 아이들에게 친구처럼 다가가주세요.”
“응? 혼내지 않으시나요?”
“제가 왜 혼냅니까. 아... 아직 결혼 상대가 없으신 건 혼내야겠습니다.”
“원장 선생님까지... 율아... 너 진짜!”
지혜 선생님은 내 볼을 손가락으로 잡고는 늘어뜨리셨다. 아프지 않는 장난 정도의 약한 힘이라 굳이 뿌리치지 않았다. 꼬집음은 시간에 따라 쓰다듬으로 바뀌어 갔다. 소중한 물건을 다루듯 아껴주는 감각에...
어째서지... 왜 집에 있는 것보다. 여기가 돌아왔다는 느낌이 드는 걸까. 가족이 아니라도 가족 같은... 이런 분위기가 싫지가 않았다.
서서 이야기 하는 것도 뭐해서 원장실에 가기로 했다. 탁자를 끼고 4명이 앉았다.
원장 선생님이 마실 것, 사탕 같은 군것질 거리도 꺼내와 탁자 위에 올리셨다.
“만나자고 해도 되는지 정말 고민이 많았단다.”
원장 선생님이 천천히 말씀을 이어가시다가 멈추시곤 나를 따스히 바라보셨다.
“잘 지내고 있는데 굳이 아픈 과거를 떠올리게 할 것 같아 조심스러웠지. 어떻게 여기 오는 게 싫지는 않았니?”
조심스러운 물음이었다. 나의 마음을 먼저 살피는. 어떤 대답이라도 해도 된다는 관대한 분위기마저 흘렀다.
“기뻤다...고 해야 할까요. 입양되면 이곳에서의 관계는 끝이라 생각했거든요.”
갈 곳 없는 아이들의 장소. 갈 곳이 생기면 나오는 곳. 거기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일’이기에 이리도 잘해주는 거라 생각했다. 정해진 일을 정해진 아이들에게 해주는 그런.
“전혀 그렇지 않아.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니?”
“괜찮아요. 이젠 그런 생각 안하니까.”
아까의 지혜 선생님의 반응과 원장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그런 생각은 바로 사라졌다. 마냥 좋은 사람들을 일이니까 잘해준 것이라 여긴 자신이 초라했다.
“그래? 그럼 잘됐구나.”
만족스런 웃음을 지으신 원장 선생님은 음료가 든 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가셨다. 우리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린 것처럼 지혜 선생님이 치고 들어왔다.
“율아? 너도 태수처럼 매일 찾아와.”
“애는 매일 와요?”
손가락만으로 태수를 가리키자 지혜 선생님이 놀라셨다.
“너? 고등학생 아니야?”
“맞는데요.”
“아 어릴 때 봐서 모르구나. 태수, 너보다 세 살 많아.”
“알고 있어요.”
“그치? 알고 있지? 근데 왜... 아 혹시? 둘이 그렇고 그런...”
신난 듯 말을 잇던 지혜 선생님은 화들짝 놀랐다. 태수가 갑자기 큰소리를 내었기 때문이었다.
“지혜 쌤... 그런 거 아닙니다. 제가 그냥 편하게 부르라 했어요.”
“너 왜 내 말을 막아? 거기다. 너 다른 애들한테는 형, 오빠. 이렇게 부르라 하잖아.”
“제... 제가 그랬던가요?”
“이것 봐라... 말을 더듬네? 내가 네들을 어릴 때부터 봤는데 속일 수 있을 것 같니? 율이는 모르겠지만 태수 너는 율이......”
“우악!! 원장쌤 물 줘요!”
둘이서 열띤 토론을 하기에 일단 가만히 있었다. 태수에게 불린 원장 선생님은 싱긋 웃으며 입을 여셨다.
“네 컵에 담긴 게 물이란다.”
물이 있는데 물을 찾는 기이한 현상까지 일어났고 지혜 쌤을 태수가 끌고 나가는 걸로 상황이 종료되었다.
“좋구나. 율이랑 단둘이 있다니.”
단박에 조용해진 방안, 드문드문 문 밖에서 태수와 지혜 선생님의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들리진 않아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종종 찾아오렴...”
“네. 감사해요.”
원장 선생님은 걱정이 많아 보이셨다. 간질간질한 걱정을 받으며 보육원의 시간이 흘러갔다.
보육원을 나서기 전, 지혜 선생님과 번호 교환을 했다. 교환을 하기 무섭게 수 십 통씩 날아드는 메시지에 조금 후회하다가 웃음이 절로 나왔다.
메시지의 대부분이 걱정 투성이었기에 그만큼 내가 못 미더운가.
“이야~ 지혜 쌤, 너 봤다고 그렇게 좋으실까.”
“내가 좀... 인기가 많아.”
오랜만에 편안한 하루라 평소에는 하지 않을 말이 나왔다. 근데 뭘 어째... 사실인걸.
“너도 기분 좋아 보이네?”
태수가 내 어깨를 토닥토닥 하더니 앞서 걸어 나갔다.
“근데... 지혜 선생님이랑 무슨 이야기 했어?”
“지극히 개인적인 일인데 궁금해?”
“아... 그런 거면 딱히. 내 이름 나오기에 나랑 관련 있는 일인 줄 알았지.”
“너는 괜찮아. 너한테는 말해줄 수 있지.”
어? 이거... 뭔가 묘한 느낌이 드는 말이었다. 개인적인 일인데 나한테는 말해줄 수 있다는 게 자칫 오해를 살 수 있는 문맥인 걸.
“무슨 의미야?”
“큰 의미 없는 말이야. 유나는 좋다고 떠벌리고 다닐 텐데 너는 안 그러겠다. 뭐 그런 의미지.”
유나는 비밀 잘 지키는 아인데... 아무튼 정말 의미 없는 말을 분위기 잡으면서 하니까 분위기 묘해지잖아...
잊고 있었다. 태수도 나 못지않게 인기가 많은 사람이니. 이런 식의 말도 서슴없이 하는 거겠지? 나랑은 다르게 본디 남자로 태어나 누리고 있을 테니 말을 하는 스킬의 정도가 남달랐다.
부럽다는 건 아니었다. 내가 남자를 홀리는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 하고 싶은 생각도 없구.
“큰일은 딱 질색인데.”
“별로? 내가 파양됐다는 그런 사소한 일이지.”
순간 걸음이 멈췄다. 내 귓구멍이 잘못되었나?
“다시... 말해봐.”
“나 파양됐어. 그래서 보육원에서 조금 신세지내면 어떨까 하고 여쭤봤지. 마냥 얻어먹기만 할 수도 없으니까. 알바도 하고.”
“그게... 큰일이 아니라고?”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나라면... 내가 파양을 당한다면, 정말 끔찍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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