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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해도 괜찮아-42화 (42/54)

〈 42화 〉 어릴 적, 그때의 보육원

* * *

오늘부터 난 인간이 아닌 인형이 되어야 했다.

싫은 것 아픈 것 전부 눌러 담아 마음속 상자에 담고 자물쇠를 걸었다.

그저 빈껍데기. 그리 변해도 나의 가족들은 의심하지 않았다. 사실 평소의 나와 별반 다를 게 없기에. 매번 착한 척 연기해온 터라 의미 없는 차이였다.

가족이라는 게 무엇인지 요즘은 의문이 들었다.

아빠도 엄마도 그저 오빠가 온다는 거에 마음을 쓸어내렸다. 부모님과 같이 기뻐해야만 했다.

우리는 가족이니까. 오빠가 온다는 것에 여동생도 기뻐했다.

오빠가 돌아왔고 4인 가족은 서로 부둥켜안았다.

연락 못해서 죄송하다고 미안하다고 그리 사죄를 고하는 오빠에게 괜찮다고 하는 부모님의 모습. 그 가족의 여동생 역시 다행이라 말하며 안도의 미소 지었다.

그렇게 가족은 평안을 되찾았다.

평소대로 저녁식사를 하고 회포를 풀 겸 거실에 앉은 가족들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여기에 무엇을 위해 있는지. 뭘 하고자 하는지 전혀 몰랐지만 앉아 있어야 했다. 그게 걱정하는 여동생의 모습이었으니까.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를 나누고서 잠을 자기 위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방안에 들어온 뒤 문을 닫고는 그냥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걷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는 것도 숨을 쉬는 것조차도 고통이었다.

잘됐다는 안도감과 이제는 버려지지 않는다는 기쁨에서 오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정말인가? 난 기쁜 건가? 그런데 이리도 가슴이 답답했다.

다 잘 됐는데. 왜 그러지? 그래, 모든 게 제자리에 왔다. 이게 본래의 모습이고 내가 원했던 거였다.

“율아, 조금 이야기 괜찮아?”

방문 넘어 오빠 목소리가 들렸다.

눈물을 빠르게 닦아내고 눈 주위가 빨간걸 보이기 싫어 불을 껐다. 그러곤 천천히 문을 열었다. 정말이지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상황의 연속이었다.

“무슨 일 있어?”

“확답을 듣고 싶어서 왔는데.”

부끄러운지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오빠였다. 확답이라는 게 무엇인지는 생각해보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이 끔찍한 상황을 만든 건 나였으니까.

“대답은 오빠가 해줘야지. 전화에서 내가 물어봤잖아?”

장난치는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이상의 여동생을 연기하면서 한줄기 희망이라도 잡아 보듯이 빌었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제발 부정이기를...

“그럼, 우리 사귀는 거다.”

오빠는 부모님을 의식했는지 작은 목소리로 그리 말하고선... 자신의 방에 뛰어 들어가서는 문을 닫았다.

어정쩡한 미소를 지으며 행복하게 입을 연 그 말이 내겐 끔찍한 비수가 되어 박혔다. 어쩌면 육체적인 폭력보다도 심하다면 심한 통증이었다.

“이게... 사는 건가. 나는 삶을 살고 있는 건가...”

혼자 남겨진 나는 문을 닫고는 침대에 쓰러지다시피 했다. 아무런 생각도 하기 싫었다. 그렇게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내가 울었다는 것을 잠에서 일어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

­

“율아. 진태 오빠, 휴가인데 다른 사람이랑 안 놀아?”

쉬는 시간 교실에 찾아온 유나가 오빠 얘기를 꺼냈다.

“모르겠어.”

생각도 하기 싫었다. 오빠에 관한 이야기는 지나가는 말로도 하기 싫었다. 무심히 이야기의 주제를 돌려도 유나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오빠가 왜 이런 행위를 하는지 의문인가보다. 나 역시 과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나의 피를 말리려는 작정인지... 정말로 하루하루 입이 바싹 말라갔다.

“매일 학교 교문 앞에서 기다리는 건... 아무리 예쁜 율이가 걱정된다지만, 나한테 부탁하면 되는데.”

“그러게.”

나도 진심으로 유나랑 단둘이 하교하고 싶었다. 하지만 오빠가 그걸 원치 않았다.

“진태 오빠가 오고 난 뒤로 율이가 더 힘없어 진거 같구. 원래 힘없었지만 더 심해진 거 같아. 과보호하는 게 얼마나 안 좋은데.”

이게 과보호이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평범한 가족의 도움과 걱정은 내가 그토록 바라온 일이었으니까. 근데 그게 아니야 유나야.

유나의 말에 속으로 대꾸를 해본다. 잠시 생각한 것만으로도 머리가 욱신거려서 책상에 엎드려 있자.

유나가 뒤에서 내 몸을 덮듯 끌어안았다. 하루에 한번이라도 날 끌어안지 못하면 안 되나보다. 최근 그 빈도가 잦은 거 같았다. 소꿉친구를 속이기는 정말 힘든 일이었다.

“무리하고 있는 거 아니지?”

유나가 따뜻하게 물어왔다. 그 따스한 음성에 조금 울컥했다.

“그러게... 무리? 난 무리하고 있는 걸까.”

유나에게 안긴 체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었다. 근데 평소대로 하고 있는 것뿐이니. 무리도 힘들일 것도 없었다.

“착하다. 율이는 착하다.”

그리 말하며 유나가 부드럽게 머리를 만져줬다.

포근함에 콧속이 징징 울렸다. 몽글몽글한 감정에 순간 울컥해서 눈을 질끈 감았다. 울분이 차올라 눈물이 맺혔다. 그걸 흐르지 않도록 악을 쓰며 참았다.

“왜 이래 정말.”

“율이 부끄러워한다!”

내가 살짝 저항하자 유나가 호들갑을 떨며 내 몸에서 떨어졌다. 그때였다.

“네들 뭐하냐?”

라는 낮은 목소리에 위기감을 느껴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까칠하기로 소문난 사회탐구 선생님이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유나가 활기차게 선생님한테 인사했다. 그 갑작스런 인사에 선생님도 손을 흔들어 주셨다. 밝은 유나는 까칠한 사람도 무장해제 시키는 것 같았다.

“어? 안녕. 그건 그렇고 유나야 수업 종 쳤는데.”

“진짜네?! 그럼 나중에 보자. 율아!”

유나는 화들짝 놀라 서둘러서 자기 교실로 돌아갔다.

“정말이지, 너랑 저애가 왜 친한지 알 수가 없네.”

유나가 떠난 문을 보시면서 그렇게 한마디 하시곤 교탁으로 가셨다. 그리고 그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유나가 나 같은 애랑 왜 친한지... 나도 잘 몰라요.”

그리 혼잣말을 하며 내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보았다. 머리카락에 남은 유나의 감촉이 아직도 생생했다.

유나와 나, 그리고 진태 오빠 이렇게 세 명이서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이었다.

유나와 내가 평상시에 사용하는 루트인 태수가 일하는 카페를 지나 그 골목을 쭉 따라 걷고 있었다.

집이 보이기 두 블록 전, 항상 그렇듯 유나와 헤어지고 진태 오빠만이 남았다.

나는 조금 안심하고 있었다.

오빠의 여자 친구와 같은 무언가가 되고 난 뒤, 무엇이 크게 변할 줄 알고 있었는데. 물론 내 마음이 썩어 이제는 반응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아무튼 오빠가 단둘이 있을 때 감정표현을 많이 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오빠를 대해왔던 것과는 다른 것이 없었다. 그래서 의외로 얌전히 버티면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은 이 휴가가 끝날 때 까지만 버티자고 그렇게 결심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학교에서 무슨 재미있는 일 있었어?”

오빠가 호기심인지 나의 학교생활에 대해 물어왔다. 학교생활에서 따로 특별한 일이 없는 나는 말해 줄 수 있는 게 딱히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있더라도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난 동아리도 안하고 모임 같은 곳도 잘 안 나가니까. 그렇네... 별로 재미있는 일은 없었어.”

그리 말하고 있는 도중에 오빠의 손끝이 내 손에 닿았다. 여러번 뭔가 의도하는 게 있어 보이는 터치였다. 손을 잡을까 말까 고민하는 것처럼.

닿았다가 떨어지고 닿았다가 떨어지고. 그런 행위 속에서 머릿속에 강하게 든 생각은 불쾌함이었다.

백 번 양보해서 이게 최승현의 손이거나 태수의 손이었으면 어땠을까.

지금과 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날뛰며 화를 내고 털어버렸을 것이다. 이렇게 까지 불쾌하진 않으리라.

이전의 오빠였어도 그랬다. 가족으로써 여겼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뭔가 달랐다. 집에 같이 살고는 있지만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타인이 느닷없이 스킨십을 시도하는 감각이 소름이 끼쳤다.

“아! 맞아.”

지금은 여자여도 나에겐 남자였던 시기도 있었다.

그때의 정체성이 흐릿해져가는 걸 느끼지만 여전히 남자를 연예상대로 보기엔 거부반응이 있었다.

그런 탓인지 참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가방을 앞으로 매고 다급히 열어 무언가를 찾는 척을 했다. 가방 안으로 양손을 집어넣고 열심히 뒤적였다. 오빠가 손을 잡으려는 마음을 가지지 못하도록.

“뭐, 찾아?”

침울한 목소리가 날 책망하는 듯 했다.

“학교에 두고 온 게 있는 거 같아서.”

아무래도 좋은 변명을 말하고는 이대로 아무 일 없이 집까지 도달하기를 빌었다.

“율아!”

티나지 않게 애쓰며 가방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거기엔 전단지를 든 태수가 서있었다. 순간 머릿속에 든 생각 때문에 저절로 걸음이 멈췄다. 사고가 무한정으로 뻗혀나갔다.

혹시... 오빠가 손잡으려던 걸 봤나?

아직 태수는 옆에 있는 이 사람이 내 오빠라는 사실을 모를 테니까. 사귀는 사람이라고 하면 문제가 없나? 아니... 그렇게 해도 문제였다.

그런 말을 내 입으로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고 태수는 유나하고도 친분이 있고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니까. 그런 거짓말은 쉽게 들킬 게 뻔했다.

거기다 아까 그 행동을 보고 있었다면 가족이라고 했을 때 의문을 가질게 뻔했다. 다 큰 남매끼리 손잡고 다니는 건 기묘한 행위였다.

여기선 태수를 모른 척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후일에 이 상황을 설명해야 해서 그건 그거대로 곤란한 일이었다. 태수 하고는 안 볼 사이도 아니었고 뭐라고 입을 열어야 할지 모르겠다. 머리가 또다시 아프려고 했다.

태수는 나를 보고는 그다음 오빠를 바라봤다.

“하고 옆에 분은 진태 씨 였나요? 율이 오빠 되는 분이시죠?”

고민했던 게 의미 없을 정도였다. 이미 오빠에 대해 알고 있었구나.

“저를 아시나요?”

오빠 역시 자신을 알고 있는 게 그게 의문이었는지 놀랬다. 오빠는 이게 태수와의 첫 대면일 터였다.

“네, 잘 알고 있죠. 율이 친구인 유나하고도 제가 친하거든요.”

태수는 전단지를 흔들어 대며 그리 말했다. 유나가 나에 관한 이야기를 태수에게 다 하는 것 같은 느낌은 내 착각이려나. 하지만 지금은 그게 고마웠다.

오빠와 내가 보통의 남매보다도 친하다는 걸 알고 있다면 방금 그 장면을 봤다고 하더라도 열 번 이해하면 이해 정도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르기에. 주변에게는 평범한 가족처럼 보이고 싶은 바람이 컸다.

“유나한테서 들었구나?”

“응, 양오빠라고?”

태수가 오빠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 나를 힐끔 바라봤다. 그 눈빛이 내 비밀을 알고 있는 듯해서 조금 놀랬다.

하지만 그렇진 않을 것이다. 지금 감정적으로 힘들기에 나 자신이 위축되어 그런 착각을 하는 것.

유나에게 조차 말하지 않은 이 비밀은 누구도 알지도 안다고 하더라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니까.

“이만 갈게. 일하던 중이라. 율아... 힘든 일 있으면 연락하고.”

태수는 남은 전단지를 우리에게 하나씩 주고는 떠나갔다. 뒷말은 나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말했다.

손에 들린 종이를 살펴봤다. 전단지에 적힌 건 할인 이벤트 알림이었다. 각종 채소와 육류 할인 상품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카페 알바 외의 일도 하고 있나보다.

태수는 이런 알바도 하구나. 열심히 사는 게 어쩐지 보기가 좋았다.

조금 더 걸어 집에 도착했다. 대문 앞에 아까 태수가 나눠준 전단지가 붙어있었다.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오면서 전단지를 본적이 없는데 왜 우리 집 앞에만 이게 붙어있는지 모르겠다. 알바는 핑계고 날 보러 왔다가 이리 붙여둔 것일까. 친구사이에 그냥 찾아오지 좀 이상한 애였다.

“엄마, 계신 가 본데?”

오빠의 그 말에 창문을 바라봤다. 커튼이 쳐져 있어도 주방부근에서 익숙한 엄마의 실루엣이 아른거렸다.

다행히 엄마가 집에 있었다. 조금은 아쉬워 보이는 오빠를 뒤로하고 안심하며 집에 들어갔다. 정말이지 오늘 하루도 지칠 대로 지쳤다.

휴가가 끝날 때까지 며칠이나 이런 생활을 계속해야한다니 미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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