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 평범한 가족을 바랐다
* * *
“율아!”
날 부르는 소리가 크게 들려서 비몽사몽 일어났다.
주말 낮잠을 잔다는 게 숙면을 취한 모양이다. 눈을 비비며 문 쪽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고자 문고리로 손을 뻗었을 때였다.
“미안해, 자고 있었니.”
엄마가 기다리지 못하고 문을 여셨다.
12시가 지나고도 여전히 잠옷차림인 나를 보고도 그리 말씀해 주셨다. 부모님은 내가 어떤 생활을 보내도 이해해주는 게 느껴졌다. 아마 착실히 생활하는 걸 알기 때문에 굳이 터치를 안 하시는 거겠지만. 그 행위 자체가 나를 향한 믿음이었다.
“무슨 일 있어요?”
평소와는 다른 그렁그렁한 목소리에 내가 묻자. 다급히 손을 잡더니 눈물을 흘리셨다. 그걸 보고 느꼈다. 오빠하고 관련된 일이라고.
“진태하고 드디어 연락이 됐어.”
“다행이네요.”
“응, 다음 주에 휴가내고 내려온다고 하네.”
사실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그렇구나. 어차피 나도 그리 흘러갈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안 좋은 예상은 다 들어맞으니까.
오빠는 그렇게 결정을 내린 거구나. 갑자기 속이 메스꺼웠다. 현 상황을 곱씹을 때마다 몸속에서 역함이 올라왔다.
아니야... 괜찮아. 오빠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다 이해하고 받아드리려 했는데. 역시 상황은 닥쳐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였다.
끔찍하네... 정말로.
“어디 아프니?”
“아뇨. 잘 됐네요. 엄마”
가족에게는 당연히 희소식이었다.
한껏 미소 지었다. 그래, 이게 가족을 위해서니까. 버텨야만 했다.
“저 피곤해요. 잠 좀 잘게요.”
“응... 알겠어. 우리딸, 나중에 저녁 먹으러 내려와.”
고개를 끄덕이고는 엄마를 돌려보냈다.
가슴 부분이 답답했다. 누가 억지로 누르기라도 하듯이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표정이 절로 구겨졌다.
침대에 누워 진정시키려 했으나 그 역함과 짜증은 절로 점점 커져만 갔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뜬 것은 유나였다.
“유나야, 왜?”
괜찮은 소리가 나오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무렇지 않은 척, 아픔을 참아보며 입을 열었다.
[어? 받았네. 아주머니가 자고 있다고 해서 그냥 돌아가려고 했는데.]
“그냥 누워있어.”
유나가 집 앞에 왔나보다. 갑자기 찾아오는 건 일상이니까 놀랄 건 없었다.
유나의 목소리를 들으니 아픔이 잦아지는 건 내 착각인가. 그래도 이런 착각이 들만큼 유나는 나한테 큰 존재인 걸 알려주는 것 같았다.
[그럼 나 올라가도 돼?]
“응. 올라와 괜찮아.”
말을 끝마치자 문이 덜컥 열렸다.
“그럼~ 실례합니다.”
바로 문 앞에 있었다.
“문 앞에서 전화하는 건 무슨 경우야.”
“그야 자는데 깨우면 미안하잖아. 전화 안 받으면 자는 거니까 들어와서 구경하려고 했어.”
자는 걸 구경해서 어디다 쓴다고. 오늘도 의미모를 평범한 대화였다. 아무런 의미 없는 대화의 연속. 그 상황이 나에게 안심을 줬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할머니 집 갔다 왔는데~ 이걸 받아왔거든.”
유나는 가져온 종이가방을 뒤적거리다. 동그란 무언가가 여러 개 들어가 있는 봉지를 꺼내들었다.
“할머니가 손수 만든 거야. 찹쌀떡! 같이 먹자.”
자랑스레 꺼내든 흰색의 떡은 동글동글하니 참 예뻤다.
내일 학교에서 주면 되지 오늘 찾아온 유나가 대단했다. 방금 막 돌아왔을 텐데 찾아온 건 최근에 작은 말다툼도 영향이 있는 것 같았다.
유나를 중히 여기듯 유나도 그리 생각해 주는 것 같아. 마음이 포근해졌다.
마침 진태 오빠의 일 때문에 기분이 꿀꿀했는데 조금은 풀리는 느낌이었다.
“마실 거 가져올게.”
조금 쑥스러운 마음에 마실 걸 핑계로 자리를 잠시 피하려 했다.
“아니야, 내가 갔다 올게.”
일어나려고 하자 유나가 나를 막았다. 그렇게 해준다면 나야 편하긴 한데.
“냉장고 네 번째 칸 맞지?”
“응. 맞아.”
대답을 들은 유나는 쏜살같이 일어나 방을 나갔다. 역시 소꿉친구 어디에 뭐가 있는지 다 알고 있었다.
잠시 기다리자 유나가 돌아왔다. 한손에는 오렌지 주스와 반대 손에는 두개의 컵을 들고 있었다.
“방금 아주머니가 아저씨랑 이야기하는 거 나도 모르게 듣게 됐는데. 진태 오빠한테 무슨 일 있었어?”
마음이 가라앉았던 차에 또 오빠 이야기를 꺼냈다. 유나는 상황을 모르니 이야기를 꺼내는 건 어쩔 수 없어도 조금 얄미웠다.
“아니,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엄마 아빠가 뭐라고 하셨어?”
일단 모르는 척 입을 열었다.
“진태 오빠랑 연락됐다고 엄청 기뻐하시는 거 같아서.”
하긴 몇 달간 연락이 되지 않았으니 부모로써 걱정하는 건 당연했다.
“연락이 잘 안됐었거든 그것 때문에 그러시는 거 아닐까.”
“그렇구나.”
유나는 대수롭지 않게 오빠에 대한 이야기를 넘기고는 떡이 맛있다고 몇 번 주워 먹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유나가 최승현하고 지은이를 만난 날에 대해서 들려달라고 했다.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딱히 별 일 없었는데.”
공포영화 싫어하는 거 들킨 거랑 카페에서 잠시 태수를 만난 거? 그것뿐이었다.
“그래도 어땠는지 말해줘.”
유나가 찰싹 달라붙어 왔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랐는지 내 무릎위에 자신의 머리를 눕혔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무릎을 긁어 대서 조금 간지러웠다.
“간지러운데. 비키지?”
“오오! 부드러워! 편하다.”
불만은 들을 생각도 없는 모양이었다. 밀어내려다 참았다. 이 상태에서 밀어내면 유나의 머리는 바닥으로 직행할게 뻔했다.
“그래서, 어땠는지 말해줘.”
유나의 물음에 다시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날에 있었던 일들을. 특별한 건 없었는데...
공포영화를 보는 줄 알고 부끄럽게도 착각했던 일, 영화를 보고 나와서 카페에 간 일, 그 카페에서 태수를 만난 일 등. 그걸 유나에게 사실대로 말해줬다. 딱히 숨길만한 일도 없었으니까.
“승현이가 율이를 안 좋아한다고?”
가감 없이 한 말들 중에서 그 말을 꼭 집었다. 표정을 볼 수 없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유추조차 할 수 없었다. 그냥 내가 뭐 했는지 궁금했던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응, 태수하고 무슨 관계인지 지은이가 물어서 여차저차 이야기가 그쪽으로 흘러갔어. 그런 김에... 혹시나 최승현한테도 물어봤지.”
“진짜? 어떻게 대답하던데? 막 설레어 하면서? 아님 화를 내면서?”
“그게 중요해?”
“중요하지!”
“어째서?”
“율이는 몰라도 돼. 그런 게 있어. 그래서 어떻게 대답하던데?”
어제의 최승현의 모습을 떠올려봤다. 놀러 나와서 그런지 옷은 정갈했다. 한 눈에 봐도 차려입은 복장 이었다. 아마 나는 그걸 보고 지은이랑 노니까 신경을 썼다고 생각했었지?
“묻자마자 대답했어. 날 보기도 싫은지 아예 다른 곳을 보던데?”
“그래? 이거 이거... 장난이 아니구만...”
뭐가 즐거운지 유나는 헤실헤실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최승현을 생각하니까 유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생겼다. 내가 이걸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구나.
“유나야, 너 최승현 좋아하지?”
“응? 승현이? 좋아하긴 하는데... 어? 뭐야... 아잇! 그런 거 아니야! 승현이는 그냥 친구야.”
내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대답이 돌아왔다. 그에 적잖이 놀랐다.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너는 진짜... 그쪽으로는 둔하구나? 아니지... 애초에 거기에 관심조차 없으니 그런가?”
연애 감정에는 무지한 나였고 할 생각도 없어서 그런 쪽으로는 단 한 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 유나나 수정이하고 관련이 있는 일이니... 조금 머리를 굴려봤는데. 정말 성대한 헛스윙이었다.
뭐야 그럼... 최승현 관찰 노트는 괜히 쓰고 있었던 거잖아... 입학 이후부터 꾸준히 써온 노트였는데 정말로 쓸모없는 짓이었다.
“난 너하고 최승현하고 어울릴지 계속 고민했었는데...”
“정말 쓸데없는 고민을 했네. 그나저나... 할머니집도 좋았지만, 어제 그 자리에 내가 있었어야 했는데! 아쉽다. 그걸 못 보다니.”
유나는 깔깔 웃었다.
그러다 웃음이 멈추더니 자세를 바로 해서 앉았다. 그 올곧은 눈빛은 나를 걱정할 때마다 보이는 눈이었다.
“이틀 전에 학교에서는 미안해.”
“뭘... 내가 예민했어.”
“난, 율이 편이야. 알지?”
“응...”
부끄럽게 웃는 유나 덕에 나 역시도 포근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아무리 안 좋은 일이 있더라두. 내가 있다는 거 잊지 말아줘. 알겠지?”
“응, 고마워.”
오늘 유나가 찾아온 건, 사과와 더불어 나를 향한 걱정 때문이었다. 그게 절실히 느껴져서 몽글몽글해지는 마음을 감출수가 없었다.
“있잖아. 유나야.”
이제는 말하고 싶었다. 뭐든지 유나는 내 곁에 있을 거라는 확신을 받았으니까. 아니 예전부터 그런 확신은 가지고 있었다. 말하지 못했던 건... 그저 무서워서.
전생의 일은 다 제쳐두더라도... 지금 내가 처한 일은 정상적이지 않은 걸 나도 알고 있었다.
거기다 평범한 가족을 원했던 내가 가지고 있는 강박과도 같은 집착 때문에 더욱 입을 열기가 힘들었다.
“계속 말하고 싶었어. 넌 다 들어줄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런데... 입이 잘 안 떨어져.”
“기다릴게. 우리가 하루만 보고 끝날 사이도 아니구. 시간은 많아.”
정말 고마운 말을 해주는 유나였다. 어쩌면 유나는 나의 인생을 불쌍히 여긴 삶의 조율자가 붙여준 천사가 아닐까...
“근데 율아... 나 목에 걸린 거 같아.”
“뭐가?”
“떡이...”
유나는 갑자기 목을 부여잡고 컵으로 손을 뻗었다. 그에 나도 다급히 주스를 따라 넘겼다.
끈끈한 우정의 분위기가 와장창 깨졌다. 그 상황 자체가 웃겼던 나는 실실 웃음이 났다.
“친구가 죽을 뻔 했는데... 웃음이 나와?!”
“그러게 누가 누워서 떡 먹으라니?”
“누워서 떡 먹기는 잘못된 속담이야.”
진지했던 분위기는 없어지고 다시 잡담만이 이어졌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하루였다.
그 뒤에 아저씨의 호통 전화를 받은 유나는 부리나케 돌아가야만 했다.
밖이 이미 컴컴해져서 아빠가 유나를 데려다준다고 하셨고 유나는 내빼지 않고 냉큼 차에 올라탔다.
“잘 가.”
“응, 내일 학교에서 봐.”
손을 흔들어 주자. 역시나 나보다 힘차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유나였다. 내일부터 다시 힘내자. 유나가 힘을 나눠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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