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초라해도 괜찮아-32화 (32/54)

〈 32화 〉 한 번 더 힘내자

* * *

샤프심 닮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지은이는?"

그리 말하자. 최승현이 슬쩍 고개를 들고는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다시 책을 내려다봤다.

"옆방에서 자고 있을 걸. 너네 기다리다가 잠들었어."

흐음... 그렇구나.

아쉬워하며 들고 있던 요점노트에 집중했다. 자고 있다는데 깨울 수는 없는 노릇 나중에 지은이가 일어나면 그때 놀도록 할까.

다시금 공부에 매진한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저요!"

유나가 수업시간도 아닌데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힘 가득한 유나의 목소리에서 별 좋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왜?"

눈길도 주지 않고 답했다. 유나의 일이었다. 어차피 쓸데없는 일일게 분명했다. 이정도의 무신경한 대꾸로도 괜찮았다.

"나도 율이처럼 공부하고 싶어!"

역시나.

천천히 노트를 접고는 유나를 바라봤다. 가뜩이나 울상인 것이 공부하기가 무척이나 싫어보였다. 사실 언제는 좋았던 적이 있을까.

어릴 때부터 봐왔으니까 유나의 성격은 무척이나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그렇게나 덧셈뺄셈도 처참할 정도로 못하던 아이였다.

노력을 안 한 건 아니었다. 곁에 나도 있었으며 부족하지 않은 경제력을 갖추신 부모님도 계셨다. 주변 환경이 유나를 도와주지 못할 정도가 아니니까. 오히려 도와주고 싶어서 안달이 나있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결과인 것에는 유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었다.

분명 노력은 했다. 내가 그걸 곁에서 줄곧 바라봤으니까. 노력을 했으면 어느 정도의 결과가 따라오는 것이 내가 알고 있는 사실 중에 하나였는데. 유나는 그 과정만큼 결과가 따라오지 못했다. 머리가 그쪽으로는 발달하지 못했는지...

아무리 해도 늘지 않는 것을 계속해서 붙잡고 있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었다. 지구력은 인정받을지라도 성장하지 못했다. 우리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유나도 언제부턴가 공부는 자신의 길이 아니라며 수학 포기자가 아닌 공부 포기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잠깐이나마 어른이 되어본 내가 느낀 듯이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었다. 다른 길은 분명히 있으며 그 길을 찾기 위해서 도전하는 정신은 대단했다.

"응. 안 돼. 문제나 풀어."

하지만 나는 그리 말할 수밖에 없었다.

성적을 받기 위한 공부는 유나에게 바라지도 않았다. 그 대신 일반 상식을 쌓아줬으면 좋겠다. 지식은 어느 길을 가던 도움이 되니까.

유나에게는 미안한데 기본 지식까지 결여되어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위태로울 때가 있었다.

시선을 돌려 가져온 노트를 바라봤다. 노트는 빽빽했다. 나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만을 정리해서 옮겨놓은 노트였다.

시험 전에는 다른 새로운 걸 다시 배우지 않고 이런 식으로 알고 있던 요점을 정리하는 게 내가 공부하는 방식이었다.

바로 내일이 시험이었다. 벼락치기라면 몰라도 평소에 공부를 해왔으면 굳이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되었다. 고작 고등학교 1학년 시험. 그렇게 많은 범위는 아니었다.

문제 푸는 것도 귀찮고. 사실 이게 본심이었다. 그리고 유나가 오늘 공부를 마치고 집에 갈 때 빌려주기 위해서라는 것도 덤으로 있었다. 이걸 준다고 해서 집에 가서도 유나가 공부를 할지는 잘 모르겠다.

최승현은 나를 한번 슥 봤다.

"하는 공부에는 관심 없고 그냥 누워있는 게 부러워서 그러지?"

그러곤 유나를 보며 말했다. 설마? 공부를 아무리 포기했더라도 그런 답이 없는 생각을 할...

"너무 편해 보이는걸..."

...수 있었다. 조금 충격이다.

웬일로 내가 하는 공부에 관심을 보이나 했더니...

유나는 맹렬히 고갤 끄덕이며 최승현의 말에 수긍했다.

그에 나는 자신의 꼴을 한번 살펴봤다.

한손에는 책을 들고 침대에 거의 눕다시피 기대어 있었다. 아까부터 유나가 계속해서 눈치를 준다 했더니 이런 이유에서였나. 그야 부러울 만했다.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애들 앞에서 이건 좀 아니겠지. 조금 미안해졌다.

"아... 미안, 습관이라서."

나는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나 유나의 옆자리에 앉았다.

유나는 나에게서 이제 트집 잡을 게 사라진 게 아쉬워 보였다.

한참을 헛소리를 하더니 다시 고갤 숙이곤 공부에 매진했다. 아니 저건 공부하는 척일뿐이겠지만. 정말, 유나는 다 괜찮은데 공부 쪽으로는 답도 없었다. 아무튼 이렇게 모두들 공부하는 분위기로 흘러가나.

“집에서 누워서 공부해?”

최승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시험 전날에만.”

무심하게 턱을 괴면서 그리 말했다. 노트를 휘적휘적 넘겼다.

사실 매일 이랬다. 딱히 시험 준비기간이라는 게 나에게 없으니. 그냥 평소 수업시간에 정리 해둔걸 집에 와서 그저 읽을 뿐이었다. 어떠한 체계도 열의도 없이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모르니까. 옛날부터 해오던 행동을 기계적으로 할 뿐인 그런 행위였다.

물론 그 사실을 말하진 않았다. 최승현이 뭐가 예쁘다고 집에서 뭐하는지 알려줄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공부하고 왜 좋은 점수가 나와?’

라고 물으면 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대충 공부하지 않는다는 이미지가 필요했다. 그저 나는 수정이와 엇비슷한 정도로 공부하고 있는 우등생이라는 인식만을 안겨주면 되었다. 여기 수정이가 없어서 비교가 될지 모르겠는데 어떻게든 되겠지.

최승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오더니 궁금했는지 어깨너머로 노트를 들여다보며 감탄했다. 유나도 최승현을 따라하며 내 등 뒤에 달라붙었다.

“뭐야? 1등 비법노트? 이것만 있으면 나도 1등 할 수 있는 거야?”

“유나는 무리지! 나라면 가능할 지도?”

유나의 자신감이 줄줄 넘치는 말에 최승현이 태클을 넣었다. 그 역시도 허세 가득한 말이기에 그냥 그들의 대화를 무시했다.

탁자 위에 노트를 올리자 유나가 잽싸게 낚아챘다. 최승현은 아쉬운 듯 탄식하며 노트를 바라봤다.

보여주는 거야 아무렇지도 않았다.

근데 공부를 하는 건지 술래잡기를 하는 건지... 방을 뛰어다니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먼지가 폴폴. 둘은 참 사이가 좋구나...

애들을 무시하고 폰을 꺼냈다. 그렇게 아주 잠시, 인터넷을 헤집다가. 나지막한 최승현의 감탄하는 소리에 폰을 내려놓았다.

“와... 미쳤다 이거. 딱딱 필요한 거만 있네?”

이 질문에 뭐라고 답을 해줘야 할까. 감이라는 말로 설명이 가능한 걸까.

솔직히 말해서 감은 아니다. 전생의 공부량을 보면 이 정도는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친구라는 이름의 악마가 판치던 그 인생에서 할 수 있었던 건 공부뿐이었다.

“어쩌다보니...?”

처량했던 자신의 모습이 상기되었기 때문인가. 목소리에 자책 같은 게 묻어나왔다. 그저 인생이 흘러가는 대로 놔뒀다. 돌부리에 넘어져도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아 여기까지구나. 이런 포기를 했고 두 손과 두 다리로 기어 다녔다. 처참하게도.

“어쩌다가 만들어 졌을 리가... 너가 엄청 공부 했겠지.”

최승현은 아무 상관없다는 듯 툭 말했다.

그래 맞다. 엄청. 엄청나게 공부를 해댔으니까. 가능한 거였다.

그렇게나 밑바닥 인생 이였으니까 머리가 좋았다고도 할 수 없었다. 머리가 좋았으면 그 더러운 세상을 벗어날 생각을 했을 테니까. 공부라는 것을 미친 듯이 했어도... 그러고도 좋은 성적을 받아도 시궁창과도 같은 인생이었다.

“율이는 어렸을 때부터 잘했으니까.”

고갤 끄덕이는 유나는 자신이 자랑스러워보였다. 어릴때의 모습을 추억하는지 유나는 잠시 천장을 바라봤다.

어릴 때의 자신의 모습은 소위 말하는 엄친아였다.

지금도 그랬다. 외모도 출중했고 어른들에게는 깍듯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성격은 모난 곳 투성이었는데 평가가 너무나 좋았다. 당연히 겉모습 때문에 이런 결과가 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외모를 이용해서라도 그렇게 되어야했다. 필사적으로 그렇게 했어야 살 수 있었다. 살기 위한 목적으로 자신의 모든 부분을 무장했다.

‘지금의’ 가족에게 버림받을 수는 없었다. 다행히 이전 생의 지식을 바탕으로 이 순간까지 살 수 있었다.

삶을 연장했다. 이전의 삶을 포기한 내가 바라는 것은 아이러니했다. 근데 간단히 버릴 수는 없었다. 이미 인연을 맺어버린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점점 그들은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갔다. 그럴수록 나를 감싸는 무장은 더욱 두터워졌다.

받아보지 못한 과분한 사랑에 속아. 더욱 이 세상에 존재하고 싶어졌다.

“나도 열심히 해왔으니까.”

물론 공부가 아닌...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을 열심히 한 거였다.

“유나의 친구라는 게 경이롭다...”

“말넘심...”

유나가 툴툴거릴 때, 방문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응, 들어와.”

그에 최승현이 답했고 문이 열렸다.

“언니!”

지은이가 뛰어 들어오더니 내 목에 매달렸다. 여전히 친근함을 뿜어내는 지은이의 애정행각에 살짝 당황했다. 또 한 사람이 더 들어왔다.

“엄마, 일어났네?”

최승현의 어머니 되시는 분 인가보다.

“그래, 지은이가 깨우는 바람에. 그나저나 아들, 엄마 일어났는데 오늘은 모닝키스는 안 해주니?”

아주머니는 입술을 내밀며 능청스레 그리 말했다. 최승현은 당황해하며 양손을 흔들어댔다. 아마 부정의 표현이겠지. 최승현은 괜스레 목을 가다듬었다.

“엄마, 유나는 알지? 지금 지은이가 안겨있는 게 서율.”

“공부 가르쳐준다는 게 너구나. 한 명 더 온다더니.”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왔어. 아주머니.”

아주머니가 나에게 눈길을 줬다. 아직 인사를 드리지 않은 게 생각났다.

“안녕하세요.”

“어머! 예쁘다는 말은 익히 들었는데. 모델 해 볼 생각 없니?”

“엄마! 창피하게 뭐하는 거야!”

“창피하기는 지금 엄마 영업하는 거 안보여? 이건 엄연한 일이야.”

“같은 학교 애들한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자 여기 명함. 돈이 궁하면 연락하는 거야! 많이 쳐줄 테니까!”

나의 손에 명함을 쥐어주셨다. 거기에는 금색과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고급스러운 색상의 카드가 있었다. 패션 디자이너라고 쓰여 있었다.

“울 엄마 스튜디오 엄청나게 커!”

날 올려다보며 지은이는 아무래도 좋은 정보를 주었다. 최승현과 아주머니는 서로 공방전을 벌이고 있으며 유나는 그런 둘을 방관하며 웃어댔다.

그렇게 공부모임은 아주머니의 등장으로 공부는 아무래도 좋은 모임이 되어버렸다.

“아... 수정이 보고 싶다.”

수정이가 있었으면 애들이 공부 열심히 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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