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한 번 더 힘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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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승현이 집."
유나는 현관문의 문고리를 돌려보더니 잠겨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막힘없이 비밀번호를 치기 시작했다.
그게 너무 자연스러워서 여기가 유나의 집인지 잠시 착각했다. 소꿉친구 대단해.
그러고 보니 유나네 집 현관 비밀번호는 알고 있었다. 알려고도 알고 싶은 생각도 없었는데 나의 경우 어릴 때 유나네 아주머니께서 알려주셨다. 귀찮으신 건지 그 날 이후 지금까지 같은 비밀번호를 쓰고 계셨다. 10년이나 지났는데도.
현관으로 들어가 신발을 벗고 있자 최승현이 2층에서 내려왔다. 최승현은 유나를 보며 투덜거렸다.
"참 빨리도 온다. 바로 옆집인데."
비밀번호를 치고 들어온 것에 아무런 의혹을 제기하지 않는 최승현의 모습. 완전 소꿉친구 그 자체였다. 왜인지 소꿉친구력으로 밀리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먼저 친구가 된 건 나였다.
남자인 최승현이 모르고 있는 유나의 이곳저곳을 다 알고 있단 말이지. 흐흐흐 음... 이거 기뻐해야 하는 일인가...
쓸데없는 승부욕을 잠재우고는 최승현의 물음에 대답했다.
"수정이 기다린다고 좀 늦었어."
"갑자기 왜?"
“집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해서.”
“어쩔 수 없네... 시험인데 와달라고 하는 게 미안한 일이니.”
“나한테도 좀 미안해 해주면 좋겠는데.”
최승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유나도 그렇고 애도 그렇고 나한테 너무 서슴없는데... 유나는 그래도 상관없는데... 어제 태수랑 있을 때부터 참 마음에 걸렸다.
아무튼 늦은 이유는 아무래도 좋아졌는지 몸을 비켜주며 우리에게 길을 내어주었다. 그 옆을 유나가 먼저 지나가고 내가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아주머니 아저씨, 저 왔어요!"
유나는 많이 와봤다는 듯이 자연스레 거실로 진입했다. 나도 인사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유나를 따라 갔다.
거실에서는 티비 소리가 들려왔다. 최승현의 아버지인지 어머니인지 누군가 있는 것은 분명했다.
거실의 문턱을 넘자 거실의 인테리어가 한눈에 들어왔다. 에어컨, 벽걸이 TV, 고급 진 탁자, 흔들의자 등등의 소품들이 이동에 불편함을 주지 않는 적절한 위치에 자리해 있었다. 딱 봐도 저렴해 보이는 물건은 아니었다.
그걸 보고 최승현네 집은 부유하다는 것을 알았다. 역시 사람은 외견으로 판단하면 안 되는 법이네. 내가 만지면 때가 탈 것 같은 물건들뿐이라 주눅이 들 것 같았다. 당연히 티내지 않았다.
그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검은색의 가죽 소파인데 거기엔 중년 남성이 편안히 앉아있었다. 아마 이분이 최승현의 아버지가 되시는 분 인거 같았다.
인상을 보자면 최승현과 같이 평범하다면 평범. 과묵하고 중압감이 있는 게 아버지로써는 위엄이 있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승현 아버지는 츄리닝을 입고 있었는데 편안한 그 모습에서 오늘만큼은 휴일을 만끽할 거라는 의지가 엿보였다.
티비로 향하고 있던 별로 휴일을 만끽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근데 스포츠를 보던 건조한 눈빛이 유나에게 향하자 갑자기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오! 유나 왔구나. 고등학교 가더니 통 안보여서 아저씨 주름살 늘어난 거 봐라."
"아저씨 농담은! 피부 더 좋아지신 거 같은데요?"
유나가 애교 있게 맞받아치자 아저씨는 호탕하게 웃었다.
"역시 한창일 학생은 못 속이는 구나. 이번에 새로 나온 신상크림인데 효과 있는 거 같네."
역시 사람은 곁 모습으로 판단하면 안 되었다. 지금 느낀 배움을 다시 가슴에 새겼다. 아저씨에 대한 감상은 다 헛것이었다. 쾌활하고 그냥 동네에서 자주 보이는 친절한 아저씨였다.
얼마나 자주 다녔으면 친구네 집 아버지랑 크림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걸까. 그게 잠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그 생각을 다시 철회했다.
유나의 아빠를 생각하면 답이 나왔다. 그 아저씨는 나하고 자식상담까지 하고 있으니까. 그만큼 집안에 있는 거 없는 거 다 보고 살아 왔다고 보면 되었다.
유나의 뒤에서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던 나에게 아저씨가 관심을 가졌다.
안 그래도 인사 할 타이밍을 잡고 있었는데 그게 지금인거 같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승현이와 같은 반인 서율이라고 합니다."
"어? 응... 그래."
아까까지만 해도 유나랑 친근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던 아저씨였는데 내가 입을 열자. 갑자기 조용해 지셨다. 놀라신 게 분명했다. 근데 그건 상관없었다.
딱딱하지도 그렇다고 과하지도 않는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드리고 고개를 숙였다. 아저씨도 그런 나의 행동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시며 인사를 받아주셨다.
예의가 없다. 불량하다. 성실하지 못하다. 그렇게 여겨지는 게 싫었다.
특히 어른들에게 만큼은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가뜩이나 이런 얼굴이었다. 조금이라도 흠이 보이면 노는 아이라고 찍혀버리기 십상이었다.
그러니까 어른들과 만나는 그 처음 순간부터 실수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게 내가 어른들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부모 없는 티를 꼭 내야겠니?'
'부모한테 뭘 배웠는지 원.....'
이 말들이 무슨 뜻인지 그 때는 몰랐다.
그저 나를 놀리는 구나. 그런 생각뿐이었다. 부모가 본래 없었던 나에게 '부모 없는 티'라니 현실에 근거한 사실일 뿐이었으니까. 분노도 화도 역정도 좌절도 없었다. 일단 무시했다. 나랑 상관도 없는 거였으니까.
하지만 이제 그게 어떤 말인지 알았다. 그 말은 나를 키워준 부모를 욕하는 거였다.
늦게나마 '부모'라는 게 생긴 나는 그들에게 버림받고 싶지 않다는 일념으로 노력했다.
버림을 받지 않으려면 부모에게 미움 받으면 안됐다. 난 모든 걸 잘해야 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부모를 욕보이지 않아야 했다. 그게 그들에게 사랑받는 하나뿐인 방법이었다.
버림받고 싶지 않다는 그 마음은 오빠와 나의 사이를 좋은 형제지간으로 보이게 했으며. 학교에서는 나를 우등생으로 만들어줬다. 부모님들 사이에서는 '엄친아'라 불리며 부러움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물이 있었기에 나를 거두어주신 부모님들은 지금의 나를 아껴주셨다.
그렇게 쌓아온 현실이 있었기에 나는 버림받지 않았다. 나의 노력이 성공이라는 반증이었다.
최근 오빠와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긴 했는데... 그건 시간이 해결해주길 바랐다.
감정이라는 것은 서로의 몸이 멀어지면 자연스레 무뎌지고 결국 사라져버린다고 남들이 하는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오빠도 군대에서 조금씩 정리해서 돌아올 것이었다. 반드시 그렇게 해줘야만 했다. 피가 이어져 있지 않더라도 같이 자란 형제고 가족이니까. 여자로써 사랑하는 건 그건 가족으로써 틀린 거니까.
인사에 짧게 대답해주신 최승현의 아버지셨다. 나는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것을 질문했다.
"아주머니는 어디 계시나요?"
"어제 저녁에도 일이 있었거든. 아마 피곤해서 침대에 쓰러져 있을 거야."
"인사 드려야하지 않을까요?"
쉬고 계신다는데 굳이 방해하고 싶진 않았다. 근데 몇몇 어른은 그럼에도 인사를 드려야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혹 최승현의 어머니께서도 그런 류의 사람일 가능성도 있기에 상당히 고민하고 있었다.
이대로 최승현의 방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아주머니께 인사를 드려야 하는지.
"우리 엄마, 주무시면 자기가 일어날 때 아니면 일어나지 않으니까. 신경 안써도 돼. 일어나면 알아서 찾아오실 테니까. 방에 가자."
최승현은 아무래도 좋은지 그런 말을 하며 복도 쪽으로 걸어갔다. 유나도 최승현이랑 같은 생각인지 아무렇지 않게 아저씨에게 말했다.
"아저씨, 나중에 봐요!"
"그래, 공부 열심히 해라."
아들인 그가 말하는 거니 그렇게 하자고 따르면서도 찝찝한 이 기분을 버릴 수가 없었다. 내가 유나네 집 외에 방문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걸 수도 있었다. 괜찮겠지...
아저씨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드리고는 최승현의 뒤를 따랐다. 유나는 자연스럽게 최승현의 옆에 섰다.
"승현이 방에 가는 거 정말 오랜만이네~"
"무슨 소리하는 거야. 지은이랑 논다고 거의 매일 오잖아."
"아... 너무 당연한 거라 까먹고 있었어."
둘은 투탁거리면서도 웃음기 가득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난 그런 둘을 기분 좋게 바라보다가 둘의 이야기를 다시금 곱씹었다. 이상한 부분이 있었던 거 같은데.......
“매일 최승현네 온다고?”
"응!"
유나는 밝은 표정으로 그리 말했다. 이 무슨... 발칙한 상황인가. 매일 찾아오는 유나가 신기했다. 내가 감탄하자 최승현이 나를 당황하며 쳐다봤다.
“아, 너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니까.”
“나 아무 생각 안했는데?”
“나 유나랑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이건 또 무슨 상황이지... 왜 나한테 유나하고의 관계를 알려주는 걸까.
“그래서? 나랑 그게 뭔 상관?”
근데 이거 최승현이 실수한 거 아닌가. 이럴 때는 유나하고 어떻게든 엮여야 좋은데 방금 최승현이 한 말은 유나에게 상처를 주기에 충분해 보였다. 아무 사이도 아니라니. 좋아하는 사람이 이런 반응을 보이면 나라도 마음이 안 좋을 텐데.
“그러게~ 율이랑 그게 뭔 상관일까?”
그런데도 유나는 흐흥 거리며 웃었다. 이 도량이 넓고 관대한 반응... 대단했다.
유나는 오히려 최승현을 놀리며 방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홀로 남아 얼굴이 빨개진 최승현을 한번 바라보고는 뒤따라 들어갔다. 유나가 놀려서 창피한가?
최승현의 방 안은 의외로 깔끔했다. 지금의 내 방에는 필요이상으로 물건을 놓아두지 않아서 어지를 요소조차 없었다.
최승현의 방에는 물건들이 많은 것에 비해 정리가 아주 잘 되어 있었다. 책장은 장식용이 아니라 자신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여기저기 널려져 있을 법도 한 옷가지도 보이지 않았다.
내 옛날 자취방에 비교하면 깨끗했다.
"깔끔하네."
감탄하며 우선 눈에 보이는 침대에 걸쳐 앉았다. 바닥 보다는 침대가 앉기 편하니까. 최승현은 그런 나를 한번 보고는 뒷머리를 긁었다.
유나는 침대에 앉은 나를 쳐다봤다. 요상한 표정인 걸 보니 어쩐지 짜증이 났다.
“율이 대담해~ 남자애 침대에 무턱대고 앉다니!”
역시나 짜증나는 말을 했다.
“유나야. 넌 오늘 문제 하나 틀릴 때마다 한 대씩 맞자?”
“그랬다간 유나 뇌세포가 다 없어지겠다.”
오늘 최승현 방에서는 유나의 곡소리가 나게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나도 앉아야지~”
나한테 대담하다 어쩌다 해놓고 자기도 침대에 앉았다. 슬쩍 기대오는 작은 체구에 기분이 조금 풀리는 건 나도 단순하긴 단순한가봐. 두 개 틀릴 때마다 한 대씩으로 바꿔줘야겠다.
"모의고사랑 학교시험이랑은 다른 거야?"
유나는 갑자기 그게 궁금한지 그리 물었다. 하긴 이제 막 고딩이 된 아이들이니 정보가 부족한게 당연했다.
"문제양도 주어진 시간도 그리고 시험범위조차 많이 다르지. 사람마다 모의고사에 맞는 사람이랑 학교시험에 맞는 사람이 있다고도 하는 거 같고. 아마 그렇게 다르니까 수시랑 정시. 이 두 가지 기준으로 학생들을 뽑는 걸 거야."
"즉! 모의고사를 잘 쳤다고 수정이에게 학교시험까지 이긴 게 아니라는 거네."
이애는 수정이하고 나하고 싸우는 게 보고 싶은 걸까?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날 비웃는 유나를 노려봤다.
"그렇긴 한데. 왜 네가 자신만만한지 모르겠거든. 너는 우선 전교 100등 안에 들어봐."
"그건 무리!"
"유나한텐 무리지."
좌절하는 유나를 보며 최승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 최승현을 보며 넌지시 물었다.
"넌 전교 50등 안에 드는 게 어때?"
"갑자기 화살이 나한테?!"
손을 휘저으며 저항하는 최승현이다. 이 두 명... 심히 성적이 걱정되었다.
"자! 얼른 공부하자!"
유나는 공부하라는 말을 듣는 게 싫었는지 스스로 공부하자는 말을 하며 탁자에 앉았다. 공부가 아니라 물어볼 생각이 가득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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