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초라해도 괜찮아-30화 (30/54)
  • 〈 30화 〉 한 번 더 힘내자

    * * *

    유나에게 매정하게 대했다. 자신의 추함에 거절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그래서 유나가 데려다준다는 호의를 밀어냈다.

    수정이는 자신의 방에 들어와 볼품없이 무너졌다. 마음 한편에서 뭔가 끝났다는 기분이 든 것이었다.

    어째서 그런 짓을 했을까. 카페에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도망칠 때, 율이와 유나의 표정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놀란 듯 혹은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분명 자신에게 실망했으리라...

    율이는 학교폭력에서 자신을 구해줬다. 미칠 듯이 암담한 진흙탕 같던 현실을 바꿔준 인물이었다. 유나도 같은 반이라는 이유로 수정이를 끼고 살았다. 아무도 말을 못 걸게끔 지켜주었다.

    학교생활은 이전과는 다르게 편안했다. 이제는 아무도 수정이를 무시하지 못했다. 학교에서 인기가 가장 많은 둘을 친구로 뒀기 때문이었다.

    근데 그런 도움을 준 둘에게 미움 받을 짓을 해버렸다.

    율이는 참 매력적인 아이였다. 여자인 자신도 무심코 설레게 만들 정도로 미인이었다. 무심한 듯 상대에게 말을 걸어도 행동으로는 의외로 챙겨주려고 노력했다. 수정이도 그런 율이에게 점점 마음을 열고 있었다.

    율이는 매정한 사람이라고 자신을 평가했다. 잠깐이라도 그녀와 이야기를 해보면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속은 따듯했고 무척이나 여렸다. 수정이를 아끼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난... 무슨 짓을...”

    아이들에게 미움 받아 학교 폭력을 당하던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건 뒷전이었다.

    그들이 나를 어떻게 대해줬는데... 그걸 이렇게 행동하는 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유나하고 율이가 없으면 안 되는 건 자신이었다.

    수정이가 율이하고 태수가 손을 잡고 있는 걸 본 게 문제였다. 둘은 아무 사이가 아니라는 율이의 말을 믿었던 터라 충격이 컸다. 충격을 받은 와중에도 인정할 수 있었다. 율이는 정말로 예쁘고 좋은 아이라 좋아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도망쳤나? 상대가 율이라서... 이길 수 없을 것 같아서? 정말 멍청한 생각이었다. 고작 연애 감정 따위로 율이를 피했다.....

    “애들이... 나한테 어떻게 해줬는데...”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충격을 받은 건 받은 거고 그렇다고 그 일이 율이하고 유나가 있는데 뿌리치고 나올 정도의 일은 아니었다.

    사과를 하고 싶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반성했다.

    그런데... 무서웠다. 유나하고 율이가... 자신을 이미 싫어할까봐 두려웠다. 왜 이렇게 자신은 바보 같을까... 후회할만한 일은 이제 안하려고 했는데. 아이들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는데. 왜 그 이상의 것을 바라고 만 것일까.

    ­

    최승현이 제안한 공부모임의 날이 왔다. 공부는 일단 뒷전이고 지은이를 만나고 싶은 게 전부였다.

    그런데 그것보다 문제가 생겼다.

    어제 수정이가 도망치듯 간 뒤로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것. 수정이의 집을 알면 찾아가고 싶을 정도로 걱정이 되는데...

    유나하고 나는 수정이가 어디에 사는지 몰랐다. 유나는 수정이가 혼자 있고 싶다고 해서 집까지는 따라가지 못했다고 했다.

    최승현의 집으로 가기 전에 여성진은 먼저 만나기로 했다. 그의 집과 가까운 유나의 집에 우선 모였다. 따로따로 방문하는 것 보다 그편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나의 집에 자주 왕래를 하던 나였기에 약속 시간보다 빨리 도착했었다. 문제는 수정이였다. 수정이가 올지 안 올지... 알 수가 없었다. 수정이는 전화도 안 받고 문자도 보지 않았다. 수정이에게 약속 시간은 알려줬기에 오지 않는다는 건 어제의 연장선으로 뭔가 불편한 일이 있다는 의미였다.

    안타깝게도 약속된 시간이 지나도 수정이는 도착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는 나의 말에 유나도 수긍해줬다.

    "율아 머리 묶는 게 시원하지 않아?"

    가만히 수정이를 기다리고 있던 나에게 유나는 그런 말을 했다. 아까부터 유나가 이상하리만큼 얌전하다고 느꼈는데 내 머리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나보다.

    "응, 좀 덥네."

    나는 말을 하면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봄의 막바지에 접어들어서 그런지 햇빛은 싱그럽지 못하고 강렬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의 날씨에도 머리카락이 덮은 목덜미에는 땀이 맺혀있는 것 같았다.

    조금 축축하기도 하고. 생머리는 다른 말로 하면 담요였다. 그 정도로 보온력이 뛰어났다.

    "저번에 내가 준 머리끈 지금 가지고 있어?"

    "아! 그거 가방 안에 있어."

    흰 꽃이 검정색 리본위에 올라가 있는 조신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 머리끈은 가방에 일단 넣어두었다. 바로바로 쓸 수 있게 넣어두었는데 잊어버리고 있었다. 지금의 유나의 말로 기억이 났다.

    난 가방을 뒤적이다 머리끈으로 보이는 물체를 꺼냈다. 유나가 준 그날 하루만 써보고는 쓰지 못했다.

    유나는 들고 있던 핸드백에서 손거울을 꺼냈다. 여자들은 저렇게 작은 가방 안에 뭘 저렇게 많이 넣고 다니는 걸까. 아님 유나가 특별한 걸까... 아마 저기에 손수건이랑 물티슈, 화장품 등등 아무튼 놀라울 지경. 속으로 잠시 감탄했다.

    "들고 있어 줄 테니까. 묶어. 보기만 해도 더운데......."

    유나의 머리는 항상 양갈래로 고정되어 있었는데 풀었을 때의 그 길이도 만만치 않았다. 나와 길이가 비슷했다. 그래서 이 기분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날씨가 더운 터라 나 역시 묶고야 싶지만 어릴 때부터 같이 있던 유나임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게 있었다.

    "묶을 줄 몰라."

    그리 말했으나 유나는 의외로 담담했다.

    "응, 그러니까 묶...... 다시 말해봐. 뭘 모른다고?"

    뒤늦게 되물어 보는 유나에게 다시 말하자. 한숨을 내쉬며 안쓰럽게 바라봤다. 아까는 못들은 것뿐이었네.

    "머리는 이렇게나 길면서 머리 묶을 줄 모른다고?"

    한심하다는 말투로 말하는 유나이기에 조금 의기소침해졌다. 요즘 나를 막 대하는 거 같은데. 유나야......

    "머리카락이야 알아서 자라는 거잖아."

    "참... 남자 같은 사고방식이네."

    유나의 그런 말에 혼자서 뜨끔했다.

    "나....남자라니 이렇게 예... 예쁜 남자 봤어?"

    당황하자 헛소리가 멋대로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과민반응에 유나는 내 머리를 툭 밀쳤다.

    자기 입으로 예쁘다는 소리를 해대니까 어이가 없었나 보다. 좀 아팠다... 평소에는 자기가 예쁘다고 말해주면서 이럴 때는 칼같이 정색을 했다.

    "돌아봐. 내가 해줄게."

    유나는 투덜거리며 손거울을 넘겨주고는 내 손에 있는 머리끈을 가져갔다. 아까 자화자찬했던 말이 부끄러워서 순순히 유나의 말에 따랐다.

    도둑이 제발을 저리다.라는 표현은 지금 딱 들어맞았다.

    상식적으로 유나는 그냥 해본 말임에 분명했는데. 나를 보고 100명 중, 100명이 여자라고 생각할게 뻔한데 그럼에도 그 말을 듣고 초조하다는 건, 의외로 자신이 남자였었다는 사실에 아직도 신경을 쓰고 있는 걸 의미하는 거였다.

    유나가 머리카락을 한 뭉텅이로 묶자. 아주 긴 포니테일이 완성되었다.

    역시 조금 자르는 게 좋겠지. 귀찮다고 미용실에 가지 않았던 게 이 지경까지 되었구나. 묶여진 내 머리는 허리 언저리까지 오는 길이었다. 그런 거대한 장막이 사라졌으니 시원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와우. 땀 맺힌 거 봐."

    유나는 그렇게 감탄을 했다. 머리를 묶자 바람이 통하기 시작해 목덜미가 선선해졌다. 그런 시원한 느낌에 얼굴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유나가 묶어준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얼마 전까지 머리를 묶는다는 것에 거부반응이 있었는데. 요즘은 그런 게 전혀 없었다. '해도 상관없다.'는 사고방식이 머리에 생겼기 때문인가. 변하고 싶다고 마음먹어서 그런가?

    나와 유나는 간간히 사람들이 오가는 골목을 바라봤다.

    "수정이... 안 오려는 걸까?"

    내 옆을 서있던 유나는 불쑥 귀에 대고는 소곤거렸다.

    "그러게. 무슨 일 있었나."

    “태수 오빠 때문인가?”

    “음... 태수가 뭔 짓을 했어?”

    유나는 턱을 매만지다가 멈칫했다.

    “번호를 달라고 한 게 무서웠다던가?”

    “설마... 우리들도 있었는데?”

    아무리 수정이가 소극적이라 해도 그게 이유라고는 못하겠다.

    “하긴... 너무 오바인가.”

    “태수가 너무 마음에 안 들었나?”

    “취향은 다 다르니까... 첫인상과는 다른 모습에 충격을 받았나?”

    “모르겠어...”

    “나두... 아 정말! 갑자기 왜 그러는 거지? 연락은 돼야 할 거 아니야!”

    답답한 마음에 폰을 들어 수정이의 번호를 찍었다. 통화음이 계속 갔다. 포기하고 끊으려는 그때였다.

    [응...]

    힘없는 목소리였다. 왜 연락이 안 되냐고 따지고 싶었는데... 그 목소리를 들으니 쏙 하고 들어갔다.

    “무슨 일 있어?”

    [아니야... 미안해 율아.]

    “뭐가 미안해. 괜찮으니까... 그것보다 오늘 안 올 거야?”

    [응... 내일 시험이잖아. 집에서... 혼자 공부하고... 싶어.]

    “그래. 너가 그렇고 싶으면 그렇게 해. 내일 보자.”

    통화는 짧게 끝났다. 수정이하고 나 사이에 갑자기 벽이 생긴 느낌이 들었다.

    “수정이, 내 전화는 안 받던데!”

    유나가 호들갑을 떨었다.

    “나랑 더 친하니까 그러지.”

    “그럴 수가... 수정이를 더 챙겨줘야겠어. 그런데... 온데?”

    “아니... 집에서 혼자 공부한데.”

    정말로 공부를 하려는 건지... 아님 우리와 벽을 두려는 건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전화를 받아준 게 일단은 괜찮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리 생각하기로 했다.

    “어쩔 수 없네... 얼른 가자. 지은이 기다릴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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