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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해도 괜찮아-29화 (29/54)
  • 〈 29화 〉 한 번 더 힘내자

    * * *

    그다지 특별한 일은 없었다. 수정이와 태수가 친해졌다는 정도. 수정이는 변했고 태수는 어릴 때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조금 장난이 더 많아진 것 빼고.

    태수와 놀러 나온 건 의외로 유나랑 노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남자여도 어릴 때의 모습이 계속 생각나 꺼려지지는 않았다. 그런 사실에 어린 시절의 자신이 태수에게도 꽤나 마음을 열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유나의 말대로 아는 사이였으니까 그런가. 말을 걸어지는 것도 내가 말을 거는 것도 불편하지 않는 게 신기했다.

    카페에 앉아 잡담을 나눴다. 어디 독특한 곳에 가거나... 무언가를 하지도 않았다. 그저 오랜 배포를 풀 듯이 이야기보따리를 푸는 게 전부였다. 주로 태수하고 유나가.

    “결국 오늘 보자고 한 건...”

    “무슨 이유가 있어야 보니... 그냥 놀고 싶으면 보는 거지.”

    그래.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니까 오랜만에 만나면 놀고 싶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나도 안심하고 태수를 만날 수 있으리라.

    “우리... 시험 기간이에요. 태수 오빠...”

    수정이가 불만을 말하자... 태수는 놀라며 유나를 바라봤다.

    “야. 너 시험기간 아니라며.”

    “내가 그랬어? 어떻게든 놀고 싶다고 한건 태수 오빠였잖아.”

    “아니지.. 놀자고 한건 맞는데 시험기간이면 다음에 놀자고 했지. 시험이 언젠데?”

    “다음 주 월요일.”

    유나가 화를 내는 태수를 피해 나의 등 뒤로 숨었다.

    “와... 이틀 남았네... 오늘은 빨리 쫑내자.”

    “수정이랑 나는 괜찮은데? 유나가 문제지 공부를 더럽게 안 해.”

    “내일 승현이네 집에서 공부하잖아... 오늘은 놀면 안 되는 거야?”

    유나가 칭얼거리자.

    “오늘은?... 항상 놀잖아 유나는...”

    수정이가 돌직구를 날렸다. 내가 하는 말보다 수정이의 말에 더욱 충격 받아 보였다. 눈을 크게 뜨고선 수정이를 보며 너무하다고 투덜거렸다.

    “그래도 빨리 끝내자. 시험 친다는 데 붙잡고 있는 것도 사람이 아니지.”

    태수는 이미 결정한 듯 보였다. 나도 일찍 집에 가는 건 상관없었다. 그런데 수정이가 조금 마음에 걸렸다. 어제 학교에서는 태수하고 만난다니까 은근히 흥분을 했던 것 같은데... 오늘은 어쩐지 차분해보였다. 만나보니 별로였나?

    “수정아? 괜찮아?”

    “응, 나는... 율이랑 유나 볼 수 있어서... 만족해...”

    “내일도 볼 건데?”

    “그래서... 더 좋아...”

    수정이는 점점 표현이 직설적으로 변해갔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뭔가 눈을 못 마주치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수정이는 의외로 직진하는 스타일이었구나.

    “그럼 가기 전에... 수정이하고 율아. 번호 좀 주라.”

    “우와... 태수 오빠. 둘 다 마음에 든 거야?”

    “뭐래... 수정이는 네들 친구고... 율이는 저번에 직접 번호 따가라고 했고.”

    “내 번호 비싸서 아무도 안주는데... 귀찮게 하면 차단 박을 거야. 할 말 있을 때만 연락하해.”

    태수의 폰을 뺏어다가 내 번호를 입력해 통화를 걸었다. 폰이 울리는 걸 확인하고서야 다시 돌려줬다.

    “오... 고맙. 수정이도 줘.”

    “정말... 정말 제 번호도 받고 싶어요?”

    수정이는 곰곰이 생각하는 게 있어보였다. 음... 정말 태수가 마음에 안 드는 건가? 어제하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잖아.

    “주면 고맙게 받아야지.”

    태수는 자연스레 웃었다.

    그 얼굴을 본 수정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작게 떨었다. 마치 학교폭력을 당했던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카페의 바닥만 바라봤다. 조금씩 스멀스멀 걱정이 피어올랐다. 이제는 이렇게까지 암울해 보인 적이 없었다.

    “거짓말...”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수정이를 다들 놀란 듯 바라봤다. 자신도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이따금씩 불안하게 떨렸다.

    “미안...해... 내가 무슨 짓을...”

    “수정아?!”

    유나가... 벌떡 일어나 카페를 나가버린 수정이를 쫒아갔다.

    ­

    정신을 차린 내가 밖으로 나가자 당연히 거긴 유나도 수정이도 없었다.

    “내가 잘못한 게 있나보네... 미안하다. 놀러 와서 분위기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뒤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나도 몰랐어. 이걸 예상했으면 애초에 안 나왔지.”

    걱정이 되었다. 이유가 뭔지 알면 좋겠는데... 그것보다 수정이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 걱정을 하고 있던 찰나에 유나에게서 문자가 왔다. 그에 조금은 안심했다.

    “수정이 포획했다네... 상태가 안 좋아서 집에 데려다준대.”

    태수도 마음이 쓰이는 것처럼 보였다. 자기가 말을 걸자 그렇게 뛰쳐나갔으니 원인은 태수에게 있는 듯 했다.

    “다행이네... 저기 율아, 수정이한테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었다면 미안하다고 전해주라.”

    “응, 나도 도통 모르겠어서 정신이 없네... 일단 우리도 집에 가자.”

    얼떨결에 태수하고 나하고 둘만 남았다. 버스 정류장으로 우리는 향했다.

    “어? 서율?”

    그때 당황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에 돌아보자 역시나 아는 사람이었다.

    "오랜만..... 은 아니지. 어제도 봤으니까."

    뛰어왔는지 최승현의 호흡은 거칠었다.

    왼손에는 근처에 있는 마트에서 주는 비닐봉지를 하나 들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점심이나 저녁에 쓸 식재료로 보이는 갖은 채소들이 봉지 위쪽으로 삐죽하니 튀어나와 있었다. 지은이에게 요리를 해주려고 하나보다. 조금 기특했다.

    그런 그에게 아는 사이의 정으로 인사를 건넸으나. 괘씸하게도 인사에 대꾸 하나 없이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너!!"

    뭐 때문에 이렇게나 호들갑을 떠는 걸까. 그래도 나에게 다짜고짜 삿대질 하는 건 그만뒀으면 좋겠다.

    기분이 나빠져 눈앞에 아른거리는 손가락을 상냥하게 쥐며 싸늘하게 말했다.

    “무슨 일인데?”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머릿속으로 생각을 해봤으나 다른 이들이면 몰라도 분명 최승현에게 만큼은 잘못한 게 없었다.

    "아.... 아니. 그게 좀 의외라..."

    최승현은 내게 잡힌 손을 황급히 내리고선 어색하게 웃었다.

    "의외? 뭐가?"

    그리 묻자 최승현은 내 뒤에 서있는 태수를 잠시 흘겨봤다. 최승현의 행동이 나를 보며 어떤 착각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한 눈에 봐도 이 다음 어떤 말을 하려고 하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남자친구가 있는 줄은..."

    역시나 예상한 그대로 말을 하는 최승현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최승현의 말을 듣고 나는 태수를 바라봤으나 의외로 담담했다.

    정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왠지 기뻐보였다.

    뭐가 됐던 최승현의 오해는 풀고 싶었다.

    "이 사람은 같이 돌아다니고 있을 뿐이야."

    난 태수를 가리키며 그리 말했다. 그 말에도 최승현은 궁금증이 해결되지 않았는지 어깨를 으쓱했다. 나의 부정에 쉽사리 믿을 생각은 없어보였다.

    "주말에 남녀가 같이 있는데?"

    최승현의 말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남녀가 같이 있으면 우선적으로 드는 생각이 그것뿐? 너무 일방적인 생각이었다.

    내가 아니라고 하는데도 왜 생각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같이 있다고 남자친구면 너도 나랑 같이 있었던 적이 있는데 너도 내 남자친구?"

    나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최승현과 나의 사이처럼... 태수하고 나와의 관계도 같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말의 의도가 이제야 전해졌는지 최승현은 눈을 끔뻑거리더니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최승현이 소문을 낼 거 같은 아이는 아니라도. 작은 불씨라도 없는 게 확실했다.

    “그렇게 까지 말하는 거 보니 아니겠지..."

    “아니겠지가 아니고 정말로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먹니.”

    일말의 의혹도 남기지 않으려고 끝을 흐리는 최승현에게 강하게 말했다. 이런 식으로 이성문제에 대해 칼같이 확답을 하는 건, 아마 내가 가지게 될 여자마음에 대한 거부반응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몸이 변했고 역시 마음도 그에 따라 변해갔다.

    그에 대한 증거로 예쁜 옷을 입고 싶어 하는 마음과 이상하리만큼 몸가짐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남들에게 헤프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남자였을 때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들에 나는 관심이 가는 것이었다.

    그런 변화에 무섭고 혼란스러웠다.

    사소한 것에 기분이 좋았다가 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확! 떨어지는 조울증 같은 증상도 있었다. 아무튼 나는 말 그대로 불안정했다.

    남자였을 때의 마음만으로 살 수 없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마음조차도 여자가 되어가는 도중이라면 그에 대한 수긍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언젠가 패배할 수밖에 없는 혼자만의 싸움이니까.

    감정적으로 되는 것... 이것도 변해가는 과정이려나... 오늘의 나는 꽤 많은 부분이 바뀌어있는 것 같았다.

    “사이가 좋네?”

    난 태수의 말에 현실로 돌아왔다. 사이가 좋다니... 전혀 아니었다.

    가만히 두면 답답한 면이 있어서 이래저래 손이 많이 간다고 할까. 한마디로 귀찮은 존재였다.

    “사이 굉장히 나쁨. 딱 그 표정인데?”

    태수는 나를 보며 말했으나 대답은 최승현이했다.

    방금 그건 내말을 예측한 걸까. 갑작스런 엉뚱한 행동에 입고리가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언제부터인가 최승현과는 말장난도 나누면서 조언도 해주는 사이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만남을 가져가며 그에 대한 이미지가 조금은 변화했다.

    그래, 귀찮아도 싫어할 수는 없는 아이였다. 그게 내가 지금 느끼는 최승현의 존재였다.

    평범해서 대하기 편하다는 것, 자신의 동생인 지은이에 대한 일이라면 진지하게 생각해 준다는 것, 나의 착각 일수도 있어도 유나의 짝사랑 상대라는 것, 특출한 점은 없지만 손에 꼽을 만한 나쁜 점 또한 없었다.

    지금까지 그를 보면서 느낀 감정들에는 긍정적인 요소가 많이 존재했다.

    지금의 그와 나는 '아는 사이'라고 정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다음 단계인 '친구 사이'로 진전시킬 생각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이 이상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우선적으로 없었다. 그와는 유나의 소꿉친구, 그리고 지은이의 친오빠... 그 정도의 거리감이 가장 이상적이라 생각했다. 최근 들어서 더욱 그러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어째서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느낌이 그랬다. 나의 나쁜 촉은 대부분 들어맞으니까.

    “잘 알고 있네.”

    장난치듯 웃으며 최승현의 말에 동조했다. 그에 어째선지 최승현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평소의 반응과는 다른 침울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그 평가는 여전하네.”

    “뭐야? 혹시 기대라도 한 거야?”

    팔짱을 끼며 가볍게 말했다. 되돌아온 건 침묵이었다. 여기서 대답하지 않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나도 그 의미를 알 수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그 탓에 최승현과 나는 어색하게 서로를 지켜보고 있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은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애가 갑자기 왜 이러지? 평소와 같으면 다시 장난으로 맞받아치는데 지금의 경우 풀이 죽은 게 상처받은 것 같았다. 내가 뭘 특별한 걸 하지 않았다. 최승현하고 항상 같이 있으면 하는 레퍼토리의 일부를 평소처럼 했다. 그가 오늘은 다른 반응을 보였다.

    말하고 싶은 게 있는지 최승현은 입술을 들썩거렸다. 안쓰러워 보이는 눈빛을 나에게 보냈다. 평소와는 다른... 전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거기다가 많이 겪어본 익숙한 분위기에 기분이 나빠진 내 쪽에서 먼저 최승현의 눈길을 피했다.

    “그리고 보니 저희 자기소개도 안했네요. 저는 김태수라고 해요.”

    “아, 전 서율이랑 같은 반인 최승현이라고 합니다.”

    가만히 있는 우리 둘의 정적을 깨며 태수가 최승현에게 말을 걸었다. 최승현은 나를 보던 시선을 돌려 태수를 바라봤다.

    태수에게 고마웠다. 조금만 더 그 상황이 지속되었다면 내가 어떤 말을 했을지 몰랐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는 상황에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이상해도...

    역시 최승현하고는 조금 거리를 두는 게 좋을까... 그래도 같은 반이라 어떻게 해도 만나는 사이였다.

    태수와 최승현은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최승현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러보며 어색함을 표현했으나 태수는 실룩실룩 웃고 있었다. 지금 보니 어색해하는 건 최승현 뿐이었다.

    "붙잡아둬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저희도 집에 가려던 참이라."

    최승현은 이제 제 갈 길을 가려는 듯 태수에게 인사를 하고는 나를 바라봤다. 그가 다시 할말이 있는 듯 본다는 사실이 불안했다. 근데 아까와 같은 묘한 분위기는 없었다.

    "내일 약속 잊지 않았지?"

    "어, 알고 있어."

    그래서 나도 평소처럼 그를 대할 수 있었다.

    최승현의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내일은 분명 최승현 집에서 시험공부 겸 지은이를 만나러가기로 한 날. 수정이도 유나도 참석하기로 했는데... 오늘 일이 있은 이후다. 수정이가 참여를 할지 가늠이 안 되었다.

    최승현은 나의 대답을 듣고선 들고 있던 봉지를 고쳐 잡고는 등을 돌려 걸어갔다. 태수는 그런 나를 내려다봤다.

    “최승현이라고? 저 애.”

    “응, 왜?”

    "아니... 뭔가 나랑 닮아서."

    그 말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닮은 구석은 없는 둘 사이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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