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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해도 괜찮아-28화 (28/54)
  • 〈 28화 〉 조금은 편안해진 일상

    * * *

    대학생인 그가 고등학생과 놀러가면서 이렇게 차려입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어릴 적 친구라고 해도 서율은 태수에게 특별했다.

    처음부터 특별한 감정이 들었던 건 아니었다.

    보육원에서 있을 때는 얄미운 아이라고 생각했다. 서율은 선생님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면서도 모든 것이 귀찮아 보였다. 아이들을 귀찮은 존재라고 여기면서도 뒤에서는 마치 큰누나처럼 아이들을 챙겼다.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아이들이 있었음에도 그래야 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그 당시에는 몰랐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율이에게 도움받았던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사실... 싫어할 구석이 없는 아이였다. 보육원 동기들에게 물어보면 왜 자기들이 서율을 따돌렸는지 후회한다고 했다. 그건 자기들 잘못이었다. 태수는 율이를 싫어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보육원의 다른 아이들보다 사이가 좋은 축이었다.

    태수가 대학 때문에 마을에 돌아왔을 때, 그렇게 율이와 만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율이는 어릴 적에도 귀여운 아이였다. 동글동글한 젖살과 깊은 검은 눈동자는 볼 때마다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그건 아이의 귀여움의 영역이었다.

    나이를 먹고는 서로가 처음 보는 거였다. 어릴 때의 모습으로 크면 어떻게 자랄지 상상을 하는 건 가능했다. 하지만 그 상상과는 모습이 전혀 달랐다. 오히려 자신의 상상력이 이 정도 밖에 안 된다고 좌절했다.

    카페에 있던 모든 손님이 율이에게 눈길을 줬다. 서율은 존재자체가 또렷했다. 어디에 있어도 눈에 보일 것 같은 존재감이었다.

    머리카락도 눈동자도... 서율은 모든 게 짙은 검은 빛이었다. 마치 자신이 어둠을 다 가져가겠다는 느낌마저도 들었다. 그럼에도 피부는 그렇지 않았다. 뽀얗고 투명한 피부는 새빨간 입술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유나와 눈을 맞추고... 또 다른 아이가 메뉴를 고르는 걸 흐뭇하게 바라보는 모습은... 어릴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그래도 그 시절에는 없던 남들에게 벽을 두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자신의 착각이 아니었다.

    그가 말을 걸고자 다가갔을 때, 서율은 눈조차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경계를 풀지 않다가... 태수가 누군지 알고 나서야 그때서야 눈을 마주볼 수 있었다. 어릴 적, 매번 자신을 살펴주던 익숙한 눈길이었다.

    그에 뭔가 사건이 있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태수가 버스에서 내리자. 그의 눈앞에 서율이가 있었다. 약속장소로 가는 듯한 그녀에게 누군가 쫓아다녔다. 지긋지긋하게 쫓아오는 상대방 탓에 짜증이 가득한 얼굴이 점점 지침으로 바뀌어갔다.

    도와주고 싶어도 자기 자신도 그리 비춰질 것 같아... 무서웠다. 하지만... 그건 그때 생각하기로 했다.

    얼굴에 그늘이 져가는 그런 모습을 보자...

    이미 태수는 몸이 움직였고 서율의 손을 깍지를 끼듯 잡고 있었다.

    그 상황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태수를 올려다보는 서율.... 태수는 주책없이 멋대로 움직이는 심장에 인상을 구기며 상대방을 바라봤다.

    율이가 뿌리치지 말아주었으면 해서 더욱 강하게 그녀의 손을 쥐었다.

    ­

    멀리서 나를 발견한 유나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같이 있는 태수를 힐끔 보고 나에게 눈길을 돌렸다.

    “율아, 왜 이렇게 늦었어... 난 또 이상한 남자한테 붙잡힌 줄 알았잖아.”

    “왜 나를 보고 그런 얘기를 하니.”

    “그런 줄 알았다고 했잖아. 태수 오빠는 이상한 사람 아니라고 인정해 준거니까 고마워해야지.”

    “참으로 고맙다. 눈물이 다나내.”

    “울든지 말든지... 나랑 상관없어. 그것보다 원래 시간 약속 잘 지키던 애가 갑자기 늦으면 걱정하잖아. 어디 아픈 거야?”

    “아픈 건 아니고, 방금 너가 말한 그 이상한 사람 만나서 떨쳐내느라 늦었어.”

    태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를 본건 같은 자리에 있었으니까 설명하는 걸 거들라는 의미였는데... 유나는 아니나 다를까 오해했다.

    “태수 오빠... 인정한 거 취소.”

    유나가 자신을 무시하자 태수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야... 나 아니라니까? 율이 졸졸 쫓아오는 사람 내가 쫒아냈는데. 맞지?”

    “응, 태수가 도와줬어.”

    동의를 바라기에 수긍해줬다. 유나는 우쭐해하는 태수를 팔꿈치로 톡톡 건드렸다.

    “오~ 쫌 하는데?”

    유나가 띄워주자 태수는 다시금 기분이 풀린 것처럼 보였다.

    둘이 장난치는 모습을 보자 어릴 때의 모습이 떠올라 어쩐지 웃음이 났다. 어릴 때도 유나가 태수를 놀리고 태수는 그걸 다 받아줬었다.

    당연히 나는 애들 뒤에서 잘 노는지 감시를 했고. 솔직히 감시할 것도 없이 얌전한 아이들이라 의외로 이 아이들이랑 있는 걸 마음에 들어 했는지도 몰랐다.

    그런 옛 생각에 잠시 웃고 있자 유나하고 얘기하고 있던 태수가 내 쪽을 바라봤다. 그에 시선을 주자 태수는 고개를 슬쩍 돌렸다. 쳐다보기에 나도 본 것뿐인데... 뭔가 피하는 듯 했다. 유나가 놀려서인지 날씨가 더워서인지 귀 끝이 붉었다.

    “그나저나 율아, 친구 한명 더 온다며?”

    태수가 수정이를 언급하기에 주변을 둘러봤는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조용한 아이라 주변에 동화되어있는가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최근에는 마음을 많이 열어서 먼저 말도 걸었고. 학교에서는 내 반까지 자주 찾아와 이야기도 나누었다.

    “응. 유나야 수정이는?”

    “수정이 좀 늦는다고 했어. 아마 좀 있으면 도착하지 않을까? 저기 오네. 수정이.”

    뒤를 돌아보자 수정이가 다급하게 달려오는 게 보였다. 버스를 타고 왔는지. 태수하고 내가 있던 버스정류장 쪽에서 뛰어왔다.

    “아! 미안해.. 늦어서... 늦어서 죄송합니다.”

    사과를 받을 만큼 늦지 않았다. 심지어 우리도 방금 도착했는데. 수정이는 태수에게도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그에 태수는 어색하게 웃었다. 얼굴은 처음 본 게 아니더라도 말을 나누는 건 처음이었다. 태수는 어쩐지 몰라도 수정이는 낯을 많이 가리다보니 둘이 친해지게 하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괜찮아요. 저도 막 도착했어요.”

    태수는 수정이에게 존댓말을 했다. 당연히 유나와 나의 친구라 자신보다 나이는 작았는데... 성급히 말을 놓지 않는 게 어쩐지 사람을 차분하게 보이게 했다.

    “태수 오빠. 왜 매너남인 척 하는 거야?”

    “그러게... 처음 봤네.”

    “상식이 있는 거지. 아무리 너희들 친구라도 나는 처음 봤는데... 대학교 가면 동급생이라도 다 존댓말 쓰고 그러게 된단다.”

    “나이 많아서 좋겠네. 태수야.”

    “딱히... 좋지는 않아.”

    나이 공격에 태수는 침울해졌다.

    안심해 태수야 그래봤자 내가 살아온 인생보다는 적었다. 무사히 살아 있었으면 마흔 살 아저씨니까.

    “근데, 태수 오빠... 왜 율이만 특별 대우해?”

    “또 무슨 말을 하려고... 뭐가 또 불만인데?”

    유나가 태수에게 또 불만이 있나보다. 유나는 태수만 보면 쉴 새 없이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이 둘을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

    “불만까지는 아니구. 율이는 오빠한테 반말하는데 기분 안 나쁜 가해서. 세 살 차이면... 좀 크니까 나 같으면 신경 쓰일 것 같은데?”

    유나가 집어주자 그제야 태수하고 내가 세 살 차이가 난다는 걸 기억해냈다. 어린 시절에도 나이가 같은 줄 알았고...

    “세 살이면 크긴 하지... 율이한테 오빠소리 듣는 것도 나쁘진 않네.”

    유나의 말에 긍정하는 태수였다.

    “굉장히 나쁘거든... 오빠 소리 듣고 싶으면 유나나 수정이 한태 실컷 들어...”

    뭔가 태수한테 오빠라고 하게 되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될 것 같았다.

    가족인 진태에게 오빠라 부르는 건 연극과도 같은 일이었다. 가족에게 잘 보이기 위한 연기의 일환으로 목적이 확실하기에 스스럼없이 칭할 수 있었다. 그건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니까.

    하지만 태수에게는 그러기 힘들었다. 단지 여자가 손윗 남자 사람을 부를 때 오빠라 부른다는 그 사실 하나 밖에 안 되니까...

    바뀌려고 다짐까지 했으면서 왜 불만이냐고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마음의 준비가 덜되었다.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바뀌고 싶었다.

    근데 만약 태수가 내가 반말을 하는 게 싫은 거라면? 생각해보면 아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를 힐끔거렸다... 뭔가 피하는 듯 하는 모습도 보였고. 그런가... 거슬렸던 건가.

    나여도 그랬다. 어린 게 반말 찍찍해대면 누가 좋아할까. 어린 시절에는 그랬다 치지만 지금은 서로 알만큼 아는 사이였다. 여기가 외국도 아니고 한국에서는 나이의 맞는 대우를 해주는 게 예의였으니까.

    태수가 불편해 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음... 태수가 정 불편하면 내가 빠질게... 세 명이서 놀다와.”

    그리 말하자.

    “미안해. 율아!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할 줄은 몰랐어... 그냥 신기해서 가볍게 물어 본거야! 자 얼른! 태수 오빠도 한마디 해.”

    “율이도 그렇고 유나도 그렇고 어릴 때부터 봤는데 편할 대로 불러. 솔직히 수정이도 말 편하게 해. 이럼 됐지? 율아?”

    ­

    결론은 나 혼자 심각하게 생각하고 꽁해져서 집에 간다고 한 거였다.

    유나는 태수가 나에게만 특별대우해서 혹시 마음이 있는 건지 떠보려고 한 거였다. 태수의 경우는 남자로 태어난 이상 그냥 오빠라는 소리가 듣기 좋으니 심술한 번 부려본 거라 했다.

    둘 다 흑심 같은 건 없었는데 생각이 삐뚤어진 탓에 부정적인 사고에 빠졌다.

    어쩐지 좀 창피했다.

    “흠흠... 어디 갈 건데?”

    헛기침을 하며 그리 묻자. 태수는 곰곰이 생각했다.

    “율이가 시끄러운 데는 별로 안 좋아하고... 수정이도 그럴 거고... 너는 아무데나 다 가지?”

    “나는 율이 있는 곳은 다 가지.”

    그리 말하며 달라붙는 유나 탓에 잠시 휘청거렸다. 유나를 따라하는 건지 수정이도 내 옆에 와 은근슬쩍 몸을 기댔다.

    “나도... 율이가 가는 곳 갈래...”

    “이것들아... 나 더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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