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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해도 괜찮아-25화 (25/54)
  • 〈 25화 〉 조금은 편안해진 일상

    * * *

    동물원에서 돌아온 다음날. 학교를 가려고 준비하는 와중에 최근들어 자주 연락을 하는 수정이에게서 카톡이 왔다.

    [이번엔 안 지려고 열심히 하고 있어.]

    이런 문장과 함께 노트를 펴놓고 공부를 하는 듯 펜을 열심히 움직이는 고양이 이모티콘도 같이 왔다. 당연히 수정인 톡으로는 말을 더듬지 않았다. 만약 그러면 진짜 이상한 애라고 생각했을지도.

    교복을 입은 채 벌러덩 침대에 다시 누워 폰을 두드렸다.

    [어제 막 동물원 갔다 왔는데 오늘은 쉬지 그래?]

    수정이에게 맞춰 고양이가 물음표를 띄우는 이모티콘을 써서 함께 보냈다.

    그에 돌아온 대답에 난 살짝 웃음을 터트렸다.

    [율이가 그렇다면 그렇게 할까?]

    [하고 싶은 대로 해. ㅎㅎ]

    [음...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할까해.]

    [잘 생각했어. 지금까지 열심히 했으니까.]

    이건 진심이었다. 수정이는 갖은 핍박 속에서도 노력을 해왔다. 그건 결과가 알려주는 거였으니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나 요즘 너무 행복해. 다 율이랑 유나 덕분이야.]

    평소에는 잘 하지 않는 낯 뜨거운 말을 하는 수정이었다.

    [그래? 그럼 다행이구. 오늘 학교에서 보장. 나 이제 출발. ㅎㅎ]

    마지막으로 그렇게 답장을 준 나는 지금까지 자신이 한 행동에 틀린 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밀어내고 상처를 줘도. 결국엔 나랑 같이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나라는 존재 곁에 있으면서도 변화하는 수정이의 모습에 의외로 힘을 얻었다.

    ­

    4교시가 끝나고 찾아온 점심시간. 매점에서 빵 한 개와 딸기 우유를 사서 시청각실로 가는 중이었다.

    급식을 먹긴 했는데도 오늘은 의외로 달달한 게 당겼다. 초콜릿을 먹을까 하고 고민했는데... 약간 배도 채울 겸 빵으로 했다.

    팥이 가득 들어간 단팥빵이면 좋겠는데 아마 포장지에 적힌 것처럼 많은 팥은 기대도 안했다. 빵을 먹으면서 퍽퍽해질 입안을 축일 겸 우유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딸기 우유를 골랐다.

    노장 선생님에게 받은 시청각실 열쇠를 꺼내 열쇠구멍에 넣고 돌렸다. 나무문이 비명을 지르며 밀려났다. 듣기 싫은 소리라 생각하곤 잠시 인상을 구기며 보다가 완전히 열린 걸 확인하고는 발을 옮겼다.

    서늘한 공기를 잠시 느끼다가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서야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요즘엔 마음 쓰는 일이 많이 없었다. 친구들과도 문제없이 지내고 있고 고백하는 남학생들도 없었다. 정말 무난한 학교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중학교 시절엔 많은 남학생들이 고백을 했었다. 그걸 매몰차게 다 거절해서 그런지 고등학교에서는 그런 고백 같은 해프닝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들 날 포기한 거 같았다. 그게 정말 다행이었다.

    그 상황이 계속되자. 아픈 걸 싫어하는 나인데 성형해서 얼굴을 고칠 생각까지 하고 있었으니까 말 다했다.

    빨대를 딸기 우유에 꼽고는 한 모금 들이켰다. 적당하게 달달한 맛이 입속을 맴돌아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빵 한입, 딸기 우유 한 모금 번갈아가며 섭취를 하며 이런저런 생각들을 아무 걱정 없이 하고 있었다.

    ­끼익

    문소리가 들리기에 문 쪽을 바라봤다. 문은 슬금슬금 밀려나며 열리고 있었다.

    아... 내가 안 닫아 놨네. 이런 실수를 하다니 이게 다 무난한 학교생활 탓이었다.

    “어! 열려있... 서율, 역시 여기 있었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최승현이 모습이 드러났다. 최승현의 모습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싫어할 거 까진...”

    싫어 할 수밖에 없었다. 여긴 내가 마음 놓고 쉬는 곳인데... 유나, 수정이도 들이기를 꺼려하는데... 하물며 남자는 더더욱 싫었다.

    “또 뭔데?”

    동물원에 같이 다녀와서 그런지 의외로 서슴없이 나를 대했다. 그게 좀 신경이 쓰였다.

    “할 말 없으면 가.”

    이제 부터 누워서 시간 좀 때우려고 했는데 이 자식은 떠날 생각이 없어보였다. 내가 그렇게 잠시 바라보고 있자 최승현이 뭔가 기억났는지 헛기침을 했다.

    “용건만 말할게 지은이가 너 보고 싶다고 하던데. 어떻게 시간 안나?”

    뭐야... 귀염둥이 지은이가 나를 보고 싶다고. 그걸 빨리 말해야지.

    근데 시험 기간이 코앞이라... 밖에 싸돌아다니기에는 가족들 눈치가 좀 보였다. 그런 거 신경 안 쓰는 부모님이긴 해도 내가 불편했다. 공부를 안 해도 집에 박혀 있는 게 편했다.

    “나도 보고 싶긴 하지만... 시험기간이라 시간 내기가 좀...”

    나도 아쉬웠다. 지은이는 하는 행동이 너무 귀엽고 계속해서 안기는 게 인형 같아서 하루에 한 번씩 그 모습이 생각났다.

    그냥 지은이가 내 동생이었으면 좋을 텐데.

    최승현보다 더 잘 해줄 자신이 있었다. 요리도 내가 훨씬 잘하고. 공부도 가르쳐 줄 수 있었다. 여자로써... 아니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도움 되는 모든 걸 알려줄 수 있는데. 철벽 치는 것도 좀 알려주고.

    내가 속으로 지은이를 뺏을 궁리를 하고 있는 것도 모른 체 최승현은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었다.

    “정 그러면... 공부를 우리 집에서 해. 애들도 불러서.”

    최승현이 생각한 것 치고는 괜찮은 생각이었다. 공부하는 척도하고 지은이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꽤 마음에 동했다.

    사실은 공부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는데 지은이를 볼 수 있다면야. 용서가 되었다.

    내가 최승현의 말에 조용히 수긍하자 웃으며 지금 하는 말이 본심인 듯 덧붙였다.

    “어차피 나도 공부해야하는데 우리 학교 1, 2등이 와주면 이득이지.”

    최승현이 2등이라는 말에 수정이가 떠올랐다.

    “유나는 당연히 올 거 같은데. 수정이가 올까 모르겠네.”

    수정이의 낯가림을 조금 걱정했다.

    “그 날, 동물원 갔을 때 지은이랑도 꽤 친해졌고 너희들도 있는데 오겠지.”

    그건 그랬다. 요즘 꽤 활달해진 것 같기도 하니까. 괜찮아보였다.

    “알겠어.”

    “날짜는 이번 주 주말이 좋겠지?”

    “아... 나 토요일은 안 돼.”

    토요일은 태수랑 약속이 잡힌 날이었다.

    “왜?”

    “그냥, 어디 갈 때가 있어서.”

    최승현의 물음에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굳이 알려줄 필요가 없으니까.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이 일요일로 해야겠네. 그 다음날이 바로 시험이니 시험정보 뽑아내기에는 최적이네.”

    장난치며 웃는 최승현을 보며 당일에 일어날 유나와 최승현의 질문공세가 상상이 돼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맘대로 하세요.”

    하지마라고 해서 안할 애들도 아니고 그런 거 알려준다고 해서 내 점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

    학교를 파하고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유나에게 끌려 다니며 음식들을 주워 먹는 그런 일상.

    중간고사가 다가오기에 이럴 시간이 없다며 유나를 다그쳐도. 금강산도식후경이라며 유나치고는 유식한 말을 하면서 끌고 다니기에 어쩔 수 없이 따라다녀 주는 중이었다.

    최근에는 수정이 혼자 공부하고 있는 게 아니 꼬아서 내가 솔선수범해 수정이를 데리고 다녔다. 내가 시험 준비를 못 하면 수정이도 못해야 했다. 사실 나는 준비할 것도 없는데도 수정이 혼자 두는 게 좀 마음에 걸렸다.

    수정이를 괴롭혔던 애들이 계속 우리를 살피는 게 눈에 보였기 때문에... 조금만 눈을 때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아무튼 유나가 나를, 내가 수정이를 비엔나소시지처럼 데리고 다녔다.

    그런 나의 생소한 행동에 처음엔 어쩔 줄 몰라 하던 수정이였다. 지금 보니까 어느새 즐거운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리는 학교 근처 분식집에 들려 떡볶이를 주워 먹었다. 수정이는 몇 개 집어먹더니 매운 듯 물 컵을 양손으로 잡고 들이켰다. 그러든지 말든지 유나는 이쑤시개 두 개를 양손에 들고는 흡입했다. 나야 한 조각 먹고는 유나에게 다 밀어준 상태였다.

    "최근에 수정이 인기가 많아졌더라?"

    떡볶이를 하나 입에 집어넣으며 유나가 갑자기 말했다.

    “캑!”

    "진짜?"

    마침 어묵 국물을 마시던 수정이는 깜짝 놀라 사래가 들렸다. 난 물 컵을 건네주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입안의 음식을 꿀꺽 삼킨 유나가 나를 바라봤다.

    "응! 그렇다니까. 나랑 수정이랑 같은 반이잖아. 남자애들이 수정이 소개시켜달라고 난리도 아니야."

    “그... 그럴 리가...”

    수정이는 우선 부정했다. 우리 반에서도 그런 얘기가 최근에 종종 들리곤 했다. 이미지 변신해서 몰라보겠다든지. 나랑 유나 이야기까지 나오며 끼리끼리 모여 다닌다는 말까지도 나왔다.

    "나라도 그러겠다. 내가 남자였으면... 바로 고백했는데."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아니었다. 남자일적에 평범한 정신머리였다면 유나나 수정이에게 바로 고백하고 차일 자신이 있었다. 진심으로.

    “율아... 너무 놀리지 마...”

    장난스런 나의 말에 수정이는 진짜 고백을 받은 것처럼 부끄러워했다. 나의 철벽 기술로 보자면 이런 반응은 별로 좋지 못했다. 혹시 가능성 있는 거 아니야? 하고 조금 생각해 버릴 것만 같았다.

    “이건 큰 문제야... 우리 수정이 덜컥 고백받는다고 다 받아주고 그러면 안 된다?”

    유나도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연애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어? 뭐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긴 거야?”

    약간의 여지를 열어두는 말에 유나가 헐레벌떡 달려들었다. 수정이는 내가 준 컵을 꼭 쥐었다.

    친구의 연애라... 내 일상 중 처음 있는 일이 아닌가. 아니, 유나도 만들려고 하면 금방 만들겠지. 승현이 말고는 눈에 보이는 이가 없어보였다. 아무튼 이런 핑크빛 감정은 처음 겪어보는 거라 나름대로 신선했다. 그래서 궁금했다.

    “누구야?”

    “그... 그게.”

    말할 듯 말 듯 애간장을 태웠다. 그게 답답했는지 유나가 이쑤시개를 내려놓았다.

    “우리 반 애야?”

    “아니...”

    “그럼... 율이네 반?”

    “아니...”

    유나가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다 물어봐도 수정이는 아니라고 답했다. 그럼 답은 하나뿐이었다.

    “학교 사람이 아니네.”

    “응...”

    “음... 설마 우리가 아는 사람이야?”

    “... 응.”

    나랑 유나가 아는 사람의 교집합은 적었다. 내 반에는 최승현이 있었는데 그건 아니라고 했으니... 딱 한 명뿐이었다. 최근에 본 인물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태수.”

    “태수 오빠!”

    “아... 그게..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냥... 좀 괜찮다... 하는 정도라...”

    수정이는 애꿎은 물만 마셔댔다. 이 반응은 정답이었다.

    “우와... 큰일이네.”

    “뭐가?”

    유나가 크게 놀랬다. 그게 이상했다. 분명 수정이를 응원해 줄 거라 생각했는데.

    “으응... 아무것두 아니야.”

    일단 생각에 잠긴 유나는 내버려두자. 물로 배를 채우려는 수정이의 컵을 빼앗았다.

    “잘 됐네. 이번 주말에 태수랑 놀러가기로 했거든. 수정이도 괜찮으면 올래?”

    “민폐가 아닐까...”

    “유나야? 괜찮지?”

    “나는 괜찮은데... 태수 오빠한테 일단 물어봐야지.”

    유나는 어쩐지 걸리는 게 있는 표정으로 태수와 연락하기 위해 폰을 들고 분식집을 나섰다. 그런 유나의 모습에 혹여 거절당할까봐 수정이는 안절부절 못했다.

    “음... 나도 8살 때 이후로 처음 보는 거긴 한데... 그대로만 자랐으면 괜찮은 사람이야.”

    확답은 해줄 수 없었다. 나도 태수에 대해서 아는 게 많이 없어서 그 사람을 추천까지는 못해줬다.

    “율이랑... 많이 친했어...?”

    “친했으면 지금까지 연락하고 지냈겠지. 저번에 이야기 들었지? 같은 보육원 출신이라고. 그래서 얼굴만 알아.”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한데. 그건 기억할만한 특별한 에피소드는 없었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닐까. 그저 가끔 이야기하고. 가끔 챙겨주는 정도? 딱 그 정도였다.

    “그렇구나... 율아... 나 근데 진짜... 아직 좋아하는 거 아니야...”

    “알겠어. 아직 좋아하는 거 아니잖아.”

    웃으며 수정이가 한 말을 따라 하자. 얼굴을 들지 못했다. 아직 어린 지은이도 그렇고 수정이도 그렇고 내 주변에 사랑을 하는 사람이 꽤 많았다. 어쩌면 최승현하고 유나도 그렇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수정아. 태수 오빠가 괜찮데.”

    아까보다는 얼굴이 밝아진 유나가 분식집에 다시 돌아왔다.

    “다행이네. 그럼 이만 가자. 놀러가기 전에 공부해둬야지.”

    “응... 미리 준비해야겠어.”

    수정이의 말에 웃으며 치마를 정리하며 일어나자. 유나는 접시 위에 남은 떡 한 조각을 덥석 집어 입에 넣었다. 그리곤 분식집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하고선 잰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수정이와 나도 유나를 따라 나섰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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