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동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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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히 입장한 동물원은 꽤 컸다. 한국에서 손에 꼽히는 동물원이라는 말이 소책자에도 적혀있었는데 그건 허세가 아니었나보다. 크기도 크기였고 동물의 가짓수도 엄청 많았다. 물론 사람들도 많았다...
주위를 둘러보자 아기자기하게 동물캐릭터들의 일러스트들이 곳곳에 붙여져 있었다. 그 밑에는 그 동물캐릭터의 모티브가 된 동물들의 설명이 자세히 써 붙여져서 생소한 동물들에게 친숙하게 접할 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
당연히 귀엽게 그려진 일러스트와는 달리 실재외형은 꽤 많이 달랐다.
지은이는 여러 동물들을 보곤 탄성을 내질렀다.
지은이를 위해서 맨 처음 가게 된 '소동물빌리지'라고 하는 곳에는 작고 귀여운 동물들이 많아서 연신 ‘귀엽다.’를 연발하는 여성 관람자들이 많이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이나 연인들이 주로 많이 보였다.
미어캣이나 토끼 같은 털이 복슬복슬한 동물들을 만지며 표정이 풀린 지은이를 보며 우리 고등학생 일동들은 더욱 귀여운 걸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작은 동물들이 있는 울타리 주변을 돌며 간식을 파는 사육사님께서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우리들에게 다가와 갖은 물품들을 보여주셨다. 음식들 외에도 아이들의 눈길을 끌만한 것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토끼 귀를 닮은 머리띠도 있었다.
지은이는 물론이거니와 유나가 딱 좋아할 만한 상품이었다.
“다들... 이걸 사는 거야.”
아니나 다를까 유나가 홀린 듯 토끼 머리띠를 바라봤다.
“지은이 꺼 하나 사면되지.”
“그래, 지은이만 사자.”
무슨 일로 최승현하고 의견이 맞았다. 유나는 볼이 볼록해졌다.
“여기 온 기념으로 사자니까? 어때? 수정아.”
“응... 나도... 괜찮아 보여.”
수정이하고 유나가 팀을 먹었다. 수정이도 이런 거 좋아하는구나... 의외였다. 부끄러워서 안할 줄 알았는데. 유나랑 친해져서 그런지 면역이 생긴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전혀 안 생겨서 문제였다.
“기념으로 하고 싶은 사람만 사.”
“그거 좋네.”
최승현의 말에 격하게 동의했다. 기념으로 남기고 싶은 사람만 구입하면 되는 일.
“승현아... 율이가 이거 쓴 거 안 보고 싶어?”
흰색의 토끼 머리띠를 들고선 유나는 나에게 다가왔다.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다. 저 보기만 해도 귀여운 걸 쓰라고?
최승현은 나와 머리띠를 번갈아 보더니 고민에 빠졌다. 이거 아무리 봐도 최승현은 유나한테 넘어갈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고민하는 거 자체가 일단 반반이라는 의미니까.
“내가 살 테니 넌 쓰기만 하면 돼!”
“최승현도 쓰는 걸로. 그럼 나도 쓸게.”
지금까지 살아온 바로 내가 유나에게 이길 수가 없었다. 그러니... 여기선 물귀신이 되리라. 최승현이 거부하면... 나도 거기 편승해 따라갈 생각이었다.
남자인 입장에서 이런 물건을 차는 것에는 일단 거부감이 들기 마련이었다. 여친이라는 인물이 쓰자고 해야 울며 겨자 먹기로 착용할 정도.
주변을 돌아보면 여자친구의 비위에 맞춰주기 위해 낙담한 표정으로 동물 귀를 차용한 남성들이 많이 보였다. 그러니 같은 학교 여자들에게 비위를 맞춰줄 남자 따위...
“좋아. 까짓 거 쓰지 뭐.”
“나이스! 이거 다섯 개 주세요!”
아... 최승현을 믿는 게 아니었다. 불을 뿜을 것처럼 최승현을 노려봤다. 그는 그런 나를 무시했다.
유나가 건내 준 토끼 귀는 내 머리색과 잘 어울리는 흰색의 머리띠였다. 내 손에 들린 토끼 머리띠를 멍하니 바라봤다. 이걸 지금 안 쓴다고 하면 분위기가 나빠지겠지...
유나나 수정이의 기대하는 눈빛은 어떻게는 무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은이의 기대까지 저버릴 수는 없었다. 내가 어린아이를 이렇게나 좋아했었나...
남자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이걸 착용한다 했는데 지금 내가 그런 느낌이었다.
눈을 질끈 감고 머리에 쓰자. 어디서 카메라 셔터음이 들렸다.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뜨자 폰을 든 유나가 서있었다.
“사진 지워라...”
“기념이라니까. 기념!”
“사진 찍은 기념으로 좀 맞자... 기념이니까 괜찮지?”
“우왁! 승현아, 나 좀 살려줘.”
폰을 뺏으려고 손을 뻗자. 유나는 유유히 벗어나면 최승현의 등 뒤로 사라졌다. 키 차이 탓에 그가 나를 내려다봤다.
“잘 어울리네.”
“감상은 필요 없고... 좀 비켜볼래? 내가 오늘 묻을 사람이 있어서.”
“아... 응. 살살해.”
내 눈에는 폰을 들고 뛰어다니는 유나밖에 안보였다.
아쉽게도... 유나는 붙잡았는데. 폰 비번을 몰라서 사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쫓아다니느라 기운이 다 빠진 나는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소동물빌리지를 만끽하고 우리들은 각자 보고 싶은 동물들을 보기 위해 움직였다.
최승현은 물 만난 니모처럼 돌아다니는 지은이를 챙기랴 여념 없었다. 토끼 귀를 낀 지은이는 정말 토끼처럼 날아다녔다. 아이들 체력은 정말 끔찍하게도 좋았다. 저렇게 방방거리는데도 지치지 않으니.
그 뒤를 쫓는 최승현의 머리를 보자 너무 안 어울려서 좀 웃겼다.
유나는 나한테 팔짱을 끼고는 날 끌고 다녔다.
뭐가 그렇게 바쁜지....... 이런 동물원까지 와서는 천천히 둘러보는 게 정석이 아닌가. 속으로만 툴툴거릴 뿐 결국 끌려 다녔다.
유나에게 대꾸한다고 하더라도 논리도 모르는 아이다 보니 결국 유나가 하고 싶은 대로 흘러갈 것이 뻔했다.
수정이는 친구들하고는 처음 와본다며 볼을 붉히며 내 옆을 졸졸 따라왔다.
그러다 어느덧 맹수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 다 달았다. 역시 여럿 맹수들이 있지만 딱 대표적으로 기억나는 두개가 있다고 하면 사자하고 호랑이다. 그 둘 중에서 내 취향에 가까운 것은 호랑이였다. 사자보단 겉모습이 멋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황갈색의 모피에 검은 줄무늬에서는 카리스마까지 느껴진다. 역시 호랑히라고 하면 힘의 상징이라고나 할까. 왜 그렇게 선조들이 용맹한 무인들을 호랑이에 비유했는지 알 것 같았다.
“눈빛 봐...”
강화유리 안의 맹수는 사람을 훑듯이 바라보며 묵직한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런 호랑이의 모습에 난 감탄을 흘렸다. 위압하는 것 같은 그 눈매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호랑이 섹시하다..."
"그러게~"
유나가 작게 흘린 어이없는 말에 나 역시 호랑이에 홀린 듯 대답했다. 우리 둘은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그 섹시한 호랑이를 계속해서 감상했다.
정오부터 오후 6시인 지금까지 쉴 틈 없이 돌아다녔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지은이가 또 토끼가 만지고 싶다고 해서 그곳에 돌아왔다. 입구 근처에 있는 터라 마감시간까지 나가기에는 충분했다.
몽글몽글하면서도 작은 토끼들을 만지면서 지은이는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유난히 즐거워하는 지은이의 모습에 나 역시도 오기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정이만 봐도 그랬다. 의외로 안내책자를 들고 우리를 안내한 것은 유나가 아니라 수정이었다. 오늘은 수정이의 웃는 얼굴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걸 보고 수정이도 많이 변했다는 걸 느꼈다.
말을 더듬는 것은 여전해도 우리끼리 있을 때는 할 말도 확실히 하는 등 자기주장이 뚜렷했다. 이런 변화를 만든 계기는 다름 아닌 매번 친근하게 다가간 유나에게 있었고 변하고자 한 수정이의 노력의 결과였다.
그게 이전의 자신과 수정이의 다른 점이었다. 모든 걸 보듬어 주는 활발한 유나라는 존재와 변할 수 있는 시기를 꽉 붙잡고 놓지 않는 수정이의 궂은 의지. 자신에게서는 눈을 씻고 찾아도 볼 수 없는 것들 뿐.
난 그녀에게서 눈을 돌렸다. 부러웠다. 변하고 있는 그녀를 시기하는 자신이 한심하고 싫었기에 다른 풍경으로 눈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구질구질하고 처량한 자신이지만 이런 자신이라도 변할 수 있는 시기가 주어진다면 변하고 싶었다.
하지만...
'존재자체가 거짓인 내가 어떻게...'
눈 주위를 짓누르며 잠시 침울해졌다. 진짜 나 조울증인가...
"하음~"
의외로 가깝게 들려온 귀여운 하품소리에 우울하게 내려가 있던 정신을 차렸다. 한없이 다가온 어두운 감정을 밀어내고 다가온 인기척에게 반응했다.
미소지어주자 지은이가 눈꺼풀을 비비며 나에게 안겨왔다.
"지은이 피곤해."
"가장 열심히 놀았으니까 그렇지!"
나에게 안겨 투정부리는 지은이에게 유나가 작은 꿀밤을 먹이며 말했다. 그에 베시시 웃는 지은이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제 갈까?"
약속한 듯이 각자 하품을 하는 걸 보니 다들 피곤했나보다. 그렇게 한차례 몸을 움직이더니 다들 동물원에서 원 없이 놀았다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출입구로 걸어갔다.
우린 맡겨둔 짐들을 다시 챙겨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하늘은 주황으로 물들고 배꼽시계가 저녁밥 달라며 시끄러울 때 쯤, 우리는 돌아올 수 있었다.
나에게는 꽤 강행군이었다. 지은이가 말을 잘 듣는 아이긴 해도 어린 아이라 꽤 주의를 기울였다. 사람들이 미친 듯이 많아서 언제 어디서 지은이가 없어질지 몰랐다.
마을로 돌아오자. 수정이는 집이 반대방향이라 먼저 헤어졌다. 최승현 남매, 유나와 함께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지은이는 피곤한지 어느새 최승현의 등에 업혀 잠이 들고 말았다.
땅거미 진 골목길을 우리는 걸어가고 있었다. 서로 무엇인가를 생각하듯 아무 말도 없어서 기분 좋은 침묵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유나가 입을 열어버려서 금방 끝나버리고 말았지만 말이다.
"율아, 다음 주, 주말에 시간 있어?"
"왜?"
"태수 오빠가 그때 보자고 해서."
"나야 괜찮은데... 이제 곧 시험인데."
걸어가며 유나에게 시선을 줬다.
“성적 유지해야 돼서 힘들다고 할까?”
“내 성적은 걱정 말고. 너가 문제야.”
나의 성적 발언에 유나는 쾌활하게 웃어넘겼다.
“그럼 나 빼고 둘이서 만날 거야?”
“그건... 좀.”
유나의 그 말에 공부하라는 말이 싹 들어갔다. 단 둘이 보는 건 좀... 어색... 아니 의식?... 그것도 아니야... 그냥 불편했다.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다니... 율이는 참... 손이 많이 간다니까.”
“너... 다음 주 지나면 두고 봐. 아저씨한테 말해서 용돈 줄이라 할 거야. 놀러 못 가게.”
“그거 반칙!”
유나는 웃으며 앞으로 뛰어갔다. 그 흔들림에 토끼귀가 움직였다. 그걸 보고 자신의 머리를 만졌다.
“정신없이 놀았나보네... 이거 아직도 차고 있었어.”
힘을 줘 머리띠를 뺐다. 고정되어 있던 게 풀리며 검은 머리가 눈을 가렸다 그걸 정리했다.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니 최승현이 있었다. 지은이가 무거운지 인상을 찌푸리며 발을 옮기기에 힘쓰고 있었다.
“인상 좀 펴. 지은이가 그렇게 무거워?”
“아니... 그나저나 하나 물어봐도 될까?”
어쩐지 진지한 분위기에 나는 앞서 걷는 유나의 등을 바라봤다.
“뭔데.”
“유나가 말한 사람... 누구야?”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 유나하고 만난다니까 경계하는 걸까? 아님... 그냥 궁금한 걸까?... 하지만 내가 답해줄 의리는 딱히 없었다.
“유나한테 물어봐... 난 말해줄 생각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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