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초라해도 괜찮아-22화 (22/54)

〈 22화 〉 동물원

* * *

내가 제시한 성적에 맞춘 유나 탓에 동물원에 가게 되었다.

그 약속은 고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맺어진 것이었다. 그 때의 자신은 영문도 모른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게 화근이 되었다. 너무 간단하게 생각했다. 그깟 동물원 한번 가주는 게 뭐가 어렵다고. 하는 마인드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깟 동물원이라고 해야 할 정도의 거리가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우리 지역 주변에 동물원이 있다는 건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 지역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정말 제대로 된 동물원에 가려면 반드시 다른 지역에 방문해야했다.

"가는데 두 시간 이라고?"

"검색해보니 그렇던데."

사실을 확인하는 나의 질문에 최승현이 폰을 들이밀었다. 난 미간을 찌푸리며 폰을 들여다봤다. 진짜네... 아직 출발하기 전인데도 녹초가 되는 기분이었다.

“오 미친...”

작게 탄식했다.

우린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합류하기로 한 수정이를 제외하곤 다 여기에 모였다. 다들 집이 가깝다보니 가기 전에 만나기로 한 것. 동물원 약속을 잡은 장본인인 유나와 최승현과 아직 초등학생인 최승현의 동생 지은이도 따라오게 되었다.

"율이 언니, 오늘은 운동복 아니네?"

지은이는 신기한 듯 날 살폈다. 지은이의 말대로 오늘의 나는 트레이닝복을 입지 않았다. 그냥 조금 생각이 달라졌을 뿐이다. 누구 좋으라고 옷을 입는 다기 보단 친한 사람들이 나랑 같이 있을 때 편안하게 있을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였다.

그 장소에 맞는 옷차림이라고 하는 것은 중요했다. 다시 생각해보면 사시사철 밖에 나갈 때 트레이닝복이라고 하는 것은 날 자주 보는 사람들이 볼 때는 굉장히 이상한 짓임에는 틀림없었다. 심지어 지은이까지 이런 말을 하는 거 보면 말 다했다.

머리는 빗질을 해서 단정했다. 상의로는 하얀색 나시를 입은 상태에서 위에 청남방을 걸쳤다. 하의로는 검은색 스키니진을 입었다. 솔직히 치마를 입을까 고민은 했지만. 아직은 나에게 무리였나 보다. 도저히 손이 가지 않았다. 다음에 시도해 보자.

"어때? 어울려?"

지은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살짝 미소 지어 보았다. 그러자 지은이도 베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선택은 틀리지 않았나보다. 뭐든 어울릴 것 같은 하이스펙의 외모이긴 해도 역시 이왕 꾸밀 거 잘 살리고 싶었다고나 할까.

남자였던 적이 있어서 그런지 자신이 여성들을 볼 때 매력 있다고 느꼈던 옷차림을 인터넷으로 찾아보았었다. 그러곤 집 옷장에 있는 옷들을 뒤적여서 골라 입고 온 것이 지금의 스타일이라는 것이다. 내 옷장에는 매치할 수 있는 옷들이 대부분 갖춰져 있었다. 나 몰래 엄마가 넣어 놓은 옷들이었다.

어느덧 시외버스터미널이 모습을 드러냈다. 5분 남짓한 거리라 걸어서 여기까지 왔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 그리 힘들진 않았지만 이제부터 힘들어질 것을 생각하니 머리가 다 아파왔다.

­

수정이와 합류하곤 시외버스에 올랐다. 우리 인원은 총 다섯 명. 두 명씩 앉는 다고 하면 한 명의 낙오자가 생기고 만다. 그렇기에 난 내가 그 낙오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있었으나 웬걸 맨 뒷자리에 다섯 명 모두 앉을 수 있게 예약되어 있었다. 아마 유나의 센스겠지?

버스를 타면 창가 쪽을 선호하기에 그쪽으로 앉자 지은이가 졸졸 쫒아 와서 내 옆에 앉았다. 그 옆을 유나가 앉고 그 옆을 최승현이 남은 자리를 수정이가 앉게 되었다.

수정이랑 최승현은 오늘 처음 만난 사이였으나 최승현이 친화력이 좋은지 아니면 유나랑 닮은 건지 변화한 수정이의 외모에 일단 칭찬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둘 사이에 어색한 기류 같은 건 흐르지 않았고 소소한 이야기 정도는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된 거 같았다.

그런 두 사람은 내버려두고 난 앉자마자 잠잘 준비를 했다. 두 시간이라고 하면 숙면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이었고 알람도 필요 없다. 깨워줄 사람이 나를 제외하고 4명이나 있으니까 말이다. 안심하고 잘 수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유리창 쪽으로 머리를 기대곤 숨을 골랐다.

창가자리를 선호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창가자리가 아니면 잠자는 내내 목이 이리저리 꺾이게 되니까. 일단 창문이라는 머리를 놓을 수 있는 거치대가 있는 게 좋았다.

"율이 언니 잘 거야?"

고른 숨을 내뱉으며 가만히 있자 지은이가 내 생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물어왔다. 작은 손으로 꼼지락거리며 머릿결을 나누거나 쓰다듬은 지은이 때문에 간지러워서 지은이를 바라봤다.

“아직 안자.”

지은이는 나를 보며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언니, 남자친구 있어?"

"그런 생물 안 키워."

남자 사람 친구도 없는 마당에 남자친구라니. 아니지 최근에 태수와 만나게 되었으니 한 명있고... 최승현도 아는 사이이긴 하니까 포함시켜줘도 되려나... 딱 아는 사이 그 정도. 남자친구라니... 지금의 상태로는 뇌수가 말라비틀어져도 그럴 일은 없었다.

그런 것 보다 무슨 이유로 아직 어린 지은이가 이런 물음을 던지는 지가 궁금했다.

"갑자기 왜?"

내 물음에 잠시 배시시 웃더니 얼굴을 붉히는 지은이였다. 어린 나이라고 해도 그 분위기는 어엿한 여자였기에 난 기대고 있던 머리를 바로 했다.

"지은이 있잖아? 좋아하는 애가 생겼어."

어려도 여자라는 걸까. 쑥스럽게 뱉어내는 그런 단어가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가랑이 사이에 양손을 감추고선 고개를 푹 숙인 지은이는 사랑하는 아이를 생각하는지 여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사랑에 빠진 소녀를 바라보는 건 이쪽까지도 쑥스러움이 전염되는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나한테 왜 얘기하는 거지?

"좋아하는 애? 그게 나랑 무슨..."

"아이 참! 율아! 그건 당연히 인기 많은 거 같은 예쁜 언니한테 조언 좀 얻으려고 그러는 거잖아."

어느새 듣고 있었는지 유나는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인기라... 내가 그런 게 있었나."

"모르는 척 하는 거 봐. 승현아, 남자인 네가 사실을 말해줘. 아무리 말해줘도 인정하려고 하지를 않아."

갑자기 유나의 의해 언급된 최승현은 나를 힐끔 보더니 중대한 사실을 말하는 상사처럼 팔짱을 꼈다.

"이름 서율, 무청고등학교 재학 중인 17살 여고생. 반은 2반이고 친한 친구는 유치원 시절부터의 소꿉친구인 김유나만 있었으나 최근엔 1반에 박수정과도 자주 노는 것이 포착됨. 남자의 로망인 긴 생머리를 관철하는 앳된 미모의 소유자.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암흑과도 같은 동공에 정신을 홀린 남자도 여럿 있는 것으로 보임... 또 뭐가 있더라....."

뭔 갈 더 생각하는 듯 버스 천장을 올려다보는 최승현의 행동에 이때다 싶어 끼어들었다. 솔직히 이상하잖아. 개인프로필을 렙 하듯 읊어내는 최승현의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뭐야 그거. 기분 더러운데."

"승현이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쌀쌀한 말에 유나 또한 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런 우리의 반응에 최승현은 양손으로 손사래하며 우리를 진정시켰다.

"이런 정보가 학교 중에 떠다닐 정도로 넌 유명하다는 거지.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 건데 나도 이거 들은 이야기일 뿐이니까."

"들은 이야기일 뿐인데 기억하고 있는 너도 충분히 기분 나빠."

"진심 율이가 불쌍해..."

"심지어는 오늘 서율이랑 눈 마주쳤다! 라든지 서율이가 앉은 미술실이나 음악실 자리에 서로들 앉으려고 난리도 아니야."

오늘이후 난 일어서서 수업을 받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최승현의 말에 유나도 극혐의 눈초리로 바뀌었다.

"우리 학교 남자애들 그렇게 안 봤는데........"

"남자니까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여자가 남자를 이해하려고 하지말자. 그건 전혀 다른 종류의 생물이니까 말이다. 나 같은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들의 행동의 대변인이 될 생각도 없으며 옹호해줄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그냥 나에게 폐만 주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지은이는 우리의 대화들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언니는 인기가 많았구나. 내가 봐도 예쁜걸!"

난 그런 지은이의 머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 언니는 금사빠는 필요없단다. 외모의 개연성? 그걸로 사람을 사랑하는 게 맞는 건지.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말이야.

"그래서? 칭찬해도 아무것도 안 나오는데?"

피식 웃으며 지은이를 내려다보자 지은이는 홍조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지은이는 좋아하는 남자애랑 잘 지내고 싶어."

"지은이, 그 남자애랑 사이 안 좋아?"

나의 물음에 지은이는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좋다고 생각해. 하지만 좀 더 친해지고 싶어."

잘 모르겠다. 연애감정... 그건 나와 연이 없는 부분이었다. 다른 세계의 일이라고 할까. 이성들끼리 팔짱을 끼고 애정행각을 벌이는 것 그런 것을 내 눈으로 보면서도 별 감흥이 없었다.

이전의 자신이 30살까지 살았다면 대마법사를 넘어서고 현자의 자리까지 넘볼 인재였다는 것은 불평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역시 나로는 지은이의 감정에 공감해 줄 수가 없었다. 하물며 조언까지 해줄 수가 없었다. 지은이의 감정은 내가 느끼지 못한 감정이었으니.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 경험도 없는 자의 도움도 되지 않는 말을 조언이랍시고 뱉을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기대하고 있는 지은이에게 실망을 주고 싶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사랑이라는 감정에 인색한 볼품없는 인간성을 숨기고 싶어서 그런 걸 수도 있었다.

"친해지자........고 하면 되지 않을까?"

자신이 뭘 안다고 아는 척인지. 자신을 질책하면서도 입은 멋대로 열렸다.

"생각은 잘 전해지지 않아. 입으로 말해야 전해지는 것이 있으니까. 지은이가 그 아이에게 하고 싶은 말 솔직하게 하면 될 거 같아. 그럼..."

나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는 지은이의 행동에 멈칫했다. 이런 생각이 든 것이다. 잘 안되면 어떡하지. 진심은 요만큼도 없는 조언으로 자신도 하지 못한 형편에만 좋은 말들로 지은이를 현혹하려고 하고 있었다.

난 끝말을 뱉어내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의아한 듯 하던 말을 멈춘 날 올려다보는 지은이에게 무척이나 미안했다. 그런 와중에도 난 번복할 말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었다. 그때...

"그럼 잘 될 거야. 그치 율아?"

"......."

유나가 끝맺음을 해버렸다. 유나의 말을 들은 지은이는 각오를 다지며 학교에 갈 날만을 고대하고 있는 눈초리였다. 유나는 가만히 있는 나를 보며 입모양만을 움직여 말을 했다.

'입으로 말해야 전해지는 것이 있으니까.'

유냐의 입모양에 가슴이 시큰해져 고개를 돌려 창밖을 봤다.

아직 출발을 하지 않는 버스, 창 밖에는 버스에 타고자 온 사람들이 보였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친구끼리 오순도순 모여 무리지어 다니는 그들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들의 관계는 진실 된 관계일까. 혹 속이고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아마 작은 거짓말 몇 개쯤은 그들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기둥이 되어주겠지.

하지만 근본부터가 거짓이라면 어떨까. 모든 게 드러나고 사실이 알려져도 그들은 서로를 아끼며 살 수 있을까.

처참하게 부서지고 상처만이 남지 않을까.

"위선자..."

작게 뱉어낸 그 말은 아무도 듣지 못했다. 이 말은 내가 나에게 하는 질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는 출발 음을 흘렸다. 안전벨트를 하라는 기사님의 말씀대로 버스 특유의 불편한 안전벨트를 착용하자 버스가 흔들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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