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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해도 괜찮아-21화 (21/54)
  • 〈 21화 〉 의외의 만남

    * * *

    카페에서 시간을 축내다가 우리들은 헤어졌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옷을 벗어다가 던졌다. 착! 펼쳐지더니 검은색의 원피스는 흐물흐물 날리다가 침대에 볼품없이 떨어졌다. 몇 초 전만해도 이 옷을 자신이 입고 있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지금까지의 옷과는 다른 것이었다.

    "트레이닝 복 이외의 옷을 입어본적이 언제인지..."

    난 책상의자에 앉으며 감탄했다. 수정이의 변화를 목격하면서 자신 속에서도 작은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여자는 아니더라도 여자와 가까운 존재라면 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본다.

    하지만 언제까지 질질 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현재 자신의 모습을 인정해야 하는데 어려웠다. 그냥 여자로써 살아갈 정도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게 살다보면 남자를 좋아하게 되려나... 잘 모르겠다. 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안 따라 줘..."

    남자에게 마음을 전하며 들러붙는 나를 떠올리자 어쩐지 닭살이 돋았다.

    갑자기 지이잉하는 휴대폰 알람이 울렸고 난 액정을 확인해 봤다.

    메시지가 아니라 전화였다. 유나라고 적힌 글자가 보이기에 일단 경계했다. 유나가 전화하는 일은 거의 백퍼센트 귀찮은 일에 말려들게 되니까 말이다. 잠시 뜸을 들이다가 통화 버튼을 슬라이드 했다.

    "왜?"

    [율아, 미안.]

    첫 대답은 사과였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나는 그에 뒤통수를 긁으며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유나가 나에게 사과할 만한 행동을 한 적은 없었다.

    “뭐가 미안한데?”

    뭐든 좋았다. 유나이다 보니 그렇게 큰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은 하고 유나의 일이니 용서할 수 있을 지도.

    [태수 오빠가 너랑 나랑 셋이 놀러가자고 했는데... 내가 가겠다고 해버렸어.]

    “아... 나 밖에 나가는 거 싫어하는 거 알잖아. 근데도 그랬다고?”

    [그래서 사과하는 거잖아.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들떴나봐.]

    태수인가... 보육원 이래로는 7년 만에 보는 거였다.

    어렸을 때의 태수의 이미지는 침착한 어린 아이였다. 모난 곳 없이 성격도 굉장히 올발랐다. 고아였던지라 철이 빨리 든 건지... 아님 그럴려고 가면을 쓴 건지 꽤나 어른스러웠었다. 고작 10살짜리가 철이 들어 봤자인데 다른 또래들 보다야 나았다.

    그래서 나랑 어울렸던 거였고. 그 당시의 난 지금과는 다르게 조금은 활발했었다. 긴 꿈이라 여기며 살았었으니까. 이전 생에서 못 만들었던 친구 만들기에 내 나름대로 적극적이었다. 노력의 방향을 잘 몰라 불화가 좀 있었는데... 유나만이 그런 나랑 친구가 되어주었다.

    태수는 나의 어리숙했던 친구 만들기의 여파로 아는 사이에서 그쳤다. 8살에 내가 입양 간 이후로 만난 적이 없어서... 어정쩡한 끝맺음으로 끝났다.

    같은 보육원 출신이기도 해서 척을 지기에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7년인데... 사람이 어떻게 변했을지 어떻게 알아.”

    새로운 만남은 늘 무서웠다. 그게 연애와 관련된 거라면 오히려 나았다. 그 외의 어떤 부정적인 감정을 내게 표출할지 모르니까. 사람에게 데여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가지는 두려움일지도.

    나를 이해해주고 품어줄 수 있는 사람을 간절히 바라는데도 그런 사람을 만드는 시도를 하는 게 정말 무서웠다.

    [율이가 어떤 걱정을 하는지는 잘 알아... 난 율이가 다양한 사람을 만나봤으면 좋겠어. 처음부터 낯선 사람이기 보단 태수 오빠는 적어도 아는 사람이잖아? 나도 같이 따라가고 말이야.]

    내가 어떤 걸 걱정하는지 유나는 알고 있었다. 역시 소꿉친구인가.

    유나만 있으면 괜찮지 않을까 했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유나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미래에는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힘들어지리라. 그게 최승현이라는 게 큰 문제였다. 어쩌면 나는 유나에게 의존하고 있는 지도 몰랐다.

    가족이라 생각했던 오빠의 감정을 알게 된 이후, 가족에 대해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리라 생각했던 것이 울타리 안쪽에서부터 점차 부셔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동성이자 하나밖에 없는 친구, 유나에게 몸을 과하게 기대고 있는 꼴이었다. 유나가 사라지면 지지대를 잃은 나는 또 무너져 내리겠지. 최악의 형태로 말이다.

    [율이가 어릴 때 했던 말이 하나 있어.]

    “뭔데.”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고. 그 속에는 어떤 진실 된 모습이 있을지 알 수 없다.]

    그 말은 나를 두고 한 말이었는데 이렇게 되돌아 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유나가 안타까운 웃음을 흘렸다.

    [정 힘들면 말해줘... 취소해도 나는 상관없어. 우리 율이가 싫다는데. 난 율이 편이니까.]

    “든든하네...”

    [내가 좀 그래!]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듯 유나는 밝게 말했다.

    “알겠어. 날짜 정해지면 알려줘.”

    통화가 끊긴 후에도 한동안 바라봤다.

    유나는 또 더 나아가라며 나의 등을 밀어주었다. 낯선 사람보단 태수니까, 적어도 아는 사람이니까 괜찮다라. 맞는 말이었다. 어린 시절 아는 사람과 그저 놀러 가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아마 태수도 반가워서 그런 권유를 했음이 틀림없었다. 나도 그 직원이 태수인걸 알았을 때, 얼떨떨하긴 했는데 한편으로는 신기하고 반가웠다.

    솔직하게 반가우면 반갑다고 하면 되는 일인데... 아 정말. 이 성격 어떻게 안 되려나... 모든 걸 의심부터 하고 보니 성격이 꼬이는 거였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머리를 쥐어뜯던 난 고개를 들었다.

    "들어오세요."

    나의 말에 방문이 열리곤 엄마가 들어왔다.

    "통화 중이었니?"

    "유나랑. 방금 끊었으니 괜찮아요."

    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머리의 움직임에 긴 머리카락들이 사락거렸다.

    "무슨 일이에요?"

    "응, 오늘은 외식할까 해서."

    난 그 말에 시계를 바라봤다. 저녁 7시 반, 우리 집은 아빠가 퇴근을 하시고 나서 다 같이 밥을 먹는 관습이 있었다.

    그게 불편하다고 하면 불편하고 좋다고 하면 좋은 점이었다. 가족의 온기라고 하는 걸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으니까. 두 분 다 나에게 무척이나 잘 대해 주셨기에 가정교육의 부분에서는 합격점이 아닐까.

    저녁담당은 내가 해야 하는데 준비하기에는 시간적으로도 너무 늦었고 오늘 같은 날은 외식을 해 준다면 편하기도 했다.

    "엄마도 율이에게 맛있는 거 해주고 싶은데. 그럴 실력이 없으니 지갑을 열어야 하지 않겠어?"

    "맨날 돈돈하시면서 이럴 때 만큼은 화끈하네요."

    꽤 짠순이 엄마인데 어쩔 때 보면 자주 돈을 쓰시는 거 같았다. 아마 말로 돈이 없다는 것을 뱉어내면서 인식하려고 그러는 거겠지. 그런 식으로 돈이 없다는 것을 계속 말하면 조금 절제하면서 돈을 쓴다고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럼 가요."

    엄마는 나의 확답을 듣고는 기분 좋은 듯 웃었다. 그리곤 내 방을 두리번거리셨다.

    별로 볼 것도 없는 방인지라 엄마의 흥미를 끌 만한 게 있을까? 여전히 내 방에는 별 것 없었다.

    인형도 없고 악세사리도 없으며 심지어 가구들이 예쁜 것도 아니었다. 심플하고 모던한 디자인을 가진 값싼 가구들이었고 이 들은 전부 내가 골랐다. 부모님은 더 좋은 걸 사주고 싶어했는데 내가 극구 말렸다. 내가 불편하니까.

    "저거? 오늘 산거니?"

    침대 위에 놓인 원피스를 가리키며 엄마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

    "응, 유나가 골라줬어."

    "저거 입고 가자꾸나. 아빠가 얼마나 좋아하실지."

    난 밖에 잘 나가지 않았다. 나간다고 하더라도 꾸민 적은 없었다. 역시 그렇기에 아빠나 엄마는 나의 차려입은 외출복차림을 본적이 없었다.

    부모라면 자식이 예쁘게 하고 멋있게 하고 다니면 기쁜 법인가? 부모가 되어본 적 이 없어서 모르겠다.

    난 툴툴거렸다.

    "이거 입는다고 아빠가 왜 좋아해요. 방정맞다고 화내실 텐데."

    대게 아빠라고 하는 이미지는 그렇다. 딸의 옷차림이 단정했으면 좋겠고 위험한 짓은 안했으면 좋겠고 좋은 남자....... 뭐 이건 지금 나랑 상관없네. 아무튼 좋은 남자를 만났으면 좋겠는 것. 그게 내 맘 속에 있는 아빠의 이미지였다.

    "율이 아빠도 딸을 얻고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하셨데. 근데 다른 또래 학생들과 다르게 활동적이지 못하니까 오히려 걱정하셨어. 지금은 오히려 봤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더구나."

    "엄마는요?"

    "엄만... 율이는 그 자체로도 좋지만. 더 예쁘고 싶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잘 보이고 싶고 그렇지 않을까?"

    "좋아하는 사람 없어요."

    "사랑하는 거 말고 좋아하는 사람 말이야. 친구라던가 가족이라던가."

    "흐음....... 이걸 입으면 기뻐요?"

    그런 나의 물음에 엄만 포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예쁜 딸보고 기쁘지 않는 부모가 어디에 있니."

    난 그 말을 듣고 생각했다. 입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혹 나는 이유를 찾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남자였었던 자신이 이런 옷을 입는 것은 맞지 않다고 그 누구도 기뻐하지 않는다고. 여자처럼 행동하고 옷을 입는다면 자신의 변태적인 만족감만이 충족될 뿐 아무도 원하지 않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건 기우였다.

    생각해보면 엄마는 내게 계속해서 옷을 사주셨다. 유나는 내게 같이 쇼핑하자고 권유했었다. 그들의 이유는 생각하지 않고 난 내가 생각한 대로만 해석하고 행동했다.

    어리석음에 끝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말처럼 나의 이런 행동 끝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전진도 후진도 없는 정체였다.

    정체 속에서 내 행동이 옳은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거기에 익숙해 졌다. 변화가 없는 게 맞는 거라고 자신을 설득하고 억압하고 있었다. 그 억압을 약하게 해준 게 수정이고 날 다른 방향으로 설득해 준 게 부모님이고 항상 변함없이 곁에 있어준 유나였다. 다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처음으로 옷다운 옷을 입었다. 그 옷은 예뻤고 포근했으며 어쩐지 친근감이 있었다. 그럼에도 어색했다. 그건 내 맘이 아직은 남자라는 증거니 상관없었다. 그건 그거대로 나라는 거니까. 지금은 이 정도로도 큰 진보였다. 내 스스로 이 옷을 입었다는 게 놀라운 일이었다.

    "우리 딸 진짜 예쁘다."

    엄마의 말에 나도 웃어보였다. 감사한 일이었다. 나의 행동으로 나를 위하는 사람들이 기쁠 수 있다는 건.

    이후 외식하러 간 가게에 온 아빠의 표정은 놀램 그 자체였다. 난 그걸 보고 의외로 즐겁다는 감정을 느꼈다. 외식하는 내내 아빠는 웃음이 떠나질 안았다. 주위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하며 자신의 딸이라고 큰소리치는 아빠의 모습은 조금 꼴불견이긴 했는데 썩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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