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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해도 괜찮아-20화 (20/54)

〈 20화 〉 의외의 만남

* * *

얼추 쇼핑을 마친 우리들은 거리로 나섰다. 집까지의 거리는 걸어서 가면 어림잡아 30분 정도였다. 결코 돈을 막 쓰는 성격이 아닌 나임에도 오늘만큼은 택시를 타고 싶은 기분이었다.

상상이상이었다. 3월의 늦바람이 이렇게도 창피한 것일 줄이야. 치맛자락을 잡은 체 걸음을 신중히 내디디며 나아갔다.

“너무 신경 쓰면 사람들이 더 쳐다볼걸?”

나의 모습을 보던 유나는 씰룩 웃으며 말했다. 그런 유나의 모습이 얄미웠다. 근데도 유나에게 대꾸하지도 못할 정도로 나는 창피함 외의 다른 감정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유나를 방패삼아 걸음을 옮기면서도 옷매무세를 다듬느라 정신을 못 차렸다.

으으 바람들어오잖아! 같은 치마인데 뭐가 이렇게 다른 거야!! 진정해 서율. 괜찮아. 넌 매일 학교에 치마를 입고 간 경험도 있어.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잖아? 그렇지? 그럴 거야... 그런데도. 이건 너무 창피해!! 다리 다 내놓고. 팔뚝까지 보이고... 으아아!

“얼른 집에 가자.”

거듭되어가는 난처함에 난 평소보다 다급했다. 그런 나의 말에 유나는 모르는 척 했다.

“모처럼 시내인데 카페라도 들러서 뭐 좀 마시고 가자!”

“카... 페?!”

유나의 말에 놀란 것은 내가 아니라 수정이었다. 그걸 듣고 역시나 라고 생각했다. 이런 여학생들이 노는 것에 수정이는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게 당연했다. 뭐든 처음 하는 일에는 불안한 게 인간이었다.

“자자, 유나야 수정이도 가기 싫어하는 거 같은데 빨리 돌아가자고.”

“진심? 그런 거야?”

유나는 기운 빠진 표정으로 수정이를 바라봤다. 그러자 거절할 줄 알았던 수정이는 의외로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처음 가보는 곳... 이라서... 기대... 돼”

“라고 하는데? 율아 가자? 응?!”

“수정아, 거기 별거 없어. 안 가도 되는 곳이야. 그래도 가고 싶어?”

난 수정이를 설득하기 위해서 말해보았다. 집에 가자는 의미를 담아 강압적인 말투였으나.

“치... 친구... 하고 가는 거 소원... 이었거든.”

수정이는 나를 보고서도 안절부절 못했으면서도 할 말은 했다. 그 사실에 조금 놀라면서도 신기했다. 수정이는 우리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자신을 더욱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었다. 그게 조금 눈부시면서도 동경심이 일었다.

수정이의 말과 분위기는 명백하게 가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하고 있었다. 난 그걸 보곤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곤 머리를 집었고 그 다음으로는 자신의 옷을 살펴봤다. 암울했다.

우선적으로 밖을 나오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의 당장 집에 돌아가고 싶어서 죽을 지경이긴 했다. 세 명중 둘이 가고 싶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었다.

여하튼 문제가 있다면 지금 입고 있는 이 옷이 창피하다는 것이었다. 가릴 곳은 다 가린 이 옷임에도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생각해보면. 한눈에 봐도 여성복이라는 것에 있었다.

즐겨 애용하는 트레이닝 복 같은 경우 남자 여자라는 구분이 되어 있는 게 아니다보니 신경 쓰지 않고 입을 수 있었다.

물론 이런 나다 보니 옷장에 들어있는 옷의 절반은 사용하지 않았다. 밋밋한 꾸밈이 없는 옷들이 주로 입는 옷이었다.

딸이 생겨 기뻤던 엄마가 사온 밝은 색상의 옷가지들은 옷장의 깊은 구석에 잘 보관되어 있었다. 그런 옷들은 자신이 여자라는 걸 인식하게 만들었다. 학교에서까지가 아니라 평상시의 자신까지도 여자로 만들어 버릴 것 같아서 꺼렸다.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분명 나는 생물학적 여자였고 그렇기에 앞으로 살면서 만나게 될 인물들, 상황들에 대해서 고민해 본 적도 당연히 있었다.

머지않아 사랑을 하고 아이를 가지고 백발의 할머니가 될 때까지 살게 될 터. 그게 당연한 거였다. 그 사실이 이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의 성별을 보자면 그게 옳은 거였다. 하지만 이전 삶을 포함하면 나에게 그런 자연적인 삶도 폭력이 되어버렸다.

그만하자. 이런 생각을 너무 많이 했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설레발치며 머리 아파했다. 조금은 용서해도 되지 않을까. 남자였던 자신을 조금만... 아주 조금만 내려놓고 여자가 되는 것 정도는 용서해줘도 되지 않을까.

성별이 바뀐다고 해서 자신이 바뀌지는 않았다. 그건 생각으로는 알고 있었다. 몸은 변해도 마음은 하나니까.

사람은 상황에 따라 변했다. 주위 사람에 의해서도 변하고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서도 변했다. 너무 변동하기 쉽고 변질되기 용이한 것이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율'이라는 자신을 거부하고 밀어내자 거기에 남는 건 안심이 아니라 상처였다. 이런 식으로 밀어내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바꿀 수 없었다. 이 다음의 자신이 어떤 식으로 변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밀어내는 게 아니라 상황을 받아드림으로써 긍정적으로 변하리라는 것을 수정이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지금 내가 이 옷을 입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이후 어떤 변화를 불러올지는 모르겠다. 좋게 나쁘게 그 어떤 식으로든 변하게 되리라. 하나를 선택하고 그 결과를 기다리는 것. 거기에 의의를 두자.

그렇다고 해서. 바로 바뀌는 것도 아니지만.

벌서 몸에 익은 생활 습관도 있고 바로라고 하는 것은 무리였다. 우선은 익숙해지는 것이겠지. 난 그런 생각을 하며 끈질기게 잡고 있던 치마 끝에서 손을 놓았다. 위축되어 있던 어깨가 펴지더니 아까까지 창피함을 전해주던 눈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부러움, 관심, 흥미, 질투 등.... 여러 가지가 섞인 시선. 그런 여러 가지 감정들을 받으며 쑥스럽지만 조금은 당당해졌다. 수정이가 가졌으면 했던 자신감. 어쩌면 나에게 필요했던 것일지도.

"그런데... 의외야... 율이는,,, 이런 옷... 많을 거 같은데."

"옷은 많을 걸? 아주머니께서 사놓으셔도 정작 입을 사람이 안 입으니까.

수정이와 유나는 나를 보며 말을 주고받았다.

"그런 건 됐고. 카페 간다며? 가자."

내가 그들 사이에서 툭 내뱉자 유나가 대답했다.

"안 간다고 하면 어떻게 할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무슨 바람이 분거야?"

"바람까지는 아니고 생각해보니 가도 괜찮겠다싶어서."

내가 말을 마치자 수정이가 내 팔을 슬쩍 건들렸다.

"미안해, 율아... 나 때문에."

"너 때문만은 아니야. 같이 안가면 유나가 미친 듯이 시끄럽거든."

유나하고 놀러 나오면 갑작스럽게 계획이 변경되는 일이 잦았다. 나 같은 경우 할 일은 다 정해놓고 처리하기에 그런 유나와의 약속 날은 진이 다 빠지는 게 일상이었다. 그래서 유나의 요청을 거부하는 일도 많았다. 그렇게 되면 기분이 나빠진 유나를 달래기에는 너무도 많은 시간이 흘러야 했다.

그런 걸 겪다보니 어디 가자는 요청에는 잘 따라주는 게 오히려 더 편한 일이었다.

"내가 언제 그랬다구!!"

"응응, 많이 그랬어."

"둘은... 정말 친한 거... 같아."

그런 수정이의 말에 유나와 난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웃음 지었다. 그렇게 보인다면 그건 그거대로 기쁜 일이었다.

"수정이도 얼른 친해지면 되지."

유나의 말을 들은 수정이는 볼을 긁적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쑥스러운가 보다.

­

카페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역시 평일. 이거라면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동하는데 조금 오래 걸었다 보니 앉고 싶었다. 카페에 온 것은 꽤 괜찮은 초이스였던 것 같다.

"난 아메리카노."

"나는... 흠음... 카라멜 마키아또,"

내가 툭 말하자. 그 뒤를 이어 유나가 대답했다. 그런 우리를 멀뚱멀뚱 바라보는 수정이와 눈이 맞았다.

우리 둘이 눈짓으로 뭐 먹을 건지 묻자. 수정이는 메뉴판과 사귀는 사이처럼 맹렬하게 바라볼 뿐 입을 통해서 메뉴를 말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먼저 하셔도 되요."

"그래요? 감사합니다."

그런 상황에 난 카운터에서 잠시 물러나며 우리 뒤에 줄서있던 일행들에게 순서를 양보했다. 나를 보곤 수정이는 안절부절 못했다. 그런 수정이를 안심하라며 미소 지었다. 처음 온 곳이 무서운 강아지 같아서 은근히 귀여웠다.

"천천히 골라. 처음 왔는데 맛있는 거 먹어봐야지."

"응 느긋하게 골라도 돼. 난 지금부터 어떤 케이크를 먹을지 골라야하니까."

그 유나에 말에 난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단 거 좀 작작 퍼먹어."

"내 돈으로 먹는 거니까 괜찮아!"

"아니, 너 요즘 살쪘다니까?"

단 음식을 너무 자주 먹는 유나이기에 살을 언급해 봤더니 표정이 천천히 굳어갔다. 초점 잃은 눈으로 자신의 배를 살펴보기도 모자라 어루만지고선 글썽거리는 눈으로 날 봤다.

"거짓말... 조금 찐 거 같기도 해..."

"그렇게 퍼먹고 안 찌는 게 이상한 거지."

"율이는 안 찌잖아."

"난 많이 안 퍼먹어."

정확히는 못 먹는 거였다. 음식이 잘 안 들어갔다. 이건 체질상의 문제니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적당한 섭취량이라고 생각하기에 신경 안 쓰고 있었다. 불편한 점이라고 한다면 맛있는 음식을 오랫동안 즐기지 못한다는 거?

유나는 침울해져선 케이크 그림에 올라가 있던 손을 때었다. 너무 놀렸나? 솔직히 아직까지 예쁜 정도였다. 유나 같은 애가 먹는 거에 비해서 안지는 체질이었다.

유나와 내가 그러든지 말든지 수정이는 마법 주문 읊듯이 메뉴를 읽으며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러더니 결정했는지 고개를 들었다.

“아이스티... 로.”

“고민에 고민을 한 결과가 그거구나.”

유나는 수정이를 보며 피식 웃었다.

“뭐 다음에 오면 다른 거 시켜먹으면 되지.”

주문을 한 우리들은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음료를 가지러 가야하기에 카운터와 거리가 있는 곳은 불편한데 그걸 감수하고도 구석진 자리는 편안했다. 사람들도 자주 안다니고 나 같은 사람들이 있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잡담을 나누다가 시간이 흘렀다. 음료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때 쯤. 직원분이 쟁반을 들고 찾아왔다.

우리 3명은 벨을 한번 봤다. 혹시나 못 들어서 직원분이 가져다주신 걸까? 근데 벨은 울은 기색도 없었다. 본래 받으러 올 때까지 진동이 계속되어야 하니까. 의아해 하며 직원 분을 바라보았다.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유나야. 여기서 보내?”

능숙하게 음료를 내려놓은 직원은 유나 바라보며 말했다.

“어? 태수 오빠다.”

태수라 불린 직원은 유나와 아는 사이로 보였다. 의외의 인물을 봤다는 듯 유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나를 바라봤다.

“율아. 기억 안나? 태수 오빠.”

“기억 안 나는데.”

내가 남자 지인을 만든 적이 있어야지.

“어릴 때... 이야기도 몇 번 나눴는데?”

“그런 걸 일일이 기억하면 내가 공부를 1등하지.”

“너 1등이긴 하잖아. 그건 그렇고 기억이 안 난다니 너가 소개시켜줬었는데...”

그건 이상한데. 기억이 조작된 게 아니라면 내가 남자아이를 유나에게 소개 시켜줬다고?

“율아... 같은 보육원 출신인데 그 대우는 너무하네.”

아... 그렇구나. 그 말을 들으니 기억이 났다. 같은 보육원 출신인 태수였다. 난 8살 때 입양되어서 이후로는 보육원에는 발길도 주지 않았다. 그래서 태수가 어떻게 지냈는지는 정확히 몰랐다.

유나와는 7살 때 근처 공원에서 알게 되어 그때 태수하고 몇 번 놀았던 기억이 있는 것도 같았다. 물론 나는 벤치에 앉아서 애들이 잘 노는지 감시하는 게 전부였었다.

“이제 기억났다. 태수구나... 근데 오빠라니. 나랑 나이가 같은 줄 알았는데...”

“말 안했구나. 나 너희보다 3살 위.”

“대학생이야?”

“그렇지 완전 새내기. 거기다 알바생.”

태수는 유니폼을 보여주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어릴 때는 귀여웠는데 지금은 남자다움을 갖추고 있었다. 그때 우리 3명을 살피고 있는 수정이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들만 이야기하고 있어서 소외감이 들게 분명했다.

“알바생이면 얼른 일하러 사라져.”

“하하... 태수 오빠, 얘가 여전히 말투가 강해요.”

“잘 지내고 있어서 다행이네.”

그런 말을 하며 태수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태수는 뒤에서 들려온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부리나케 뛰어갔다. 그러게 일할 때에는 일만 하지. 혼나는 거 아니겠지? 아는 사람이라 그런지 신경이 조금은 쓰였다.

“여기서 태수 오빠를 만나다니. 세상 참 좁아. 그렇지?”

“너는 연락하고 지냈어?”

“1년에 한번 안부 인사 정도? 이 마을로 돌아왔다는 건 방금 알았어.”

유나가 태수랑 연락을 하고 지냈다는 건 의외. 그러고도 지금까지 태수 관련 이야기를 안 꺼낸 것도 의아했다. 유나는 그런 건 곧바로 말할 것 같은 스타일인데.

“어? 태수 오빠한테 문자왔다.”

“뭐래?”

“너 번호 없다고 좀 달라는데? 아까 물어보려고 했는데 불려가서 못 물어봤데.”

태수...라. 흐음... 어릴 때부터 아는 사이라. 싫은 건 아니었다. 근데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냥 아는 사이라서 번호가 필요한 건지. 아님.... 모종의 감정이 있는 건지. 자의식 과잉이라고 해도 좋았다. 하지만 나에겐 중요한 일이었다.

“직접 번호 따가라. 그래.”

“애도... 참 짓궂다니까.”

유나는 키득거리며 폰을 만졌다. 물론 내가 본다고 해서 태수가 티를 낼지 어떨지는 모르겠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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