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 의외의 만남
* * *
우리는 시청각실에 왔다. 노장선생님께서 주신 장소가 점점 나 말고도 다른 아이들이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유나는 나 뿐만이 아니라 수정이까지 이곳에 끌고 왔다.
“별 것 없는 곳이지만 편하게 있어!”
유나는 마치 자기 방인 것 마냥 너스레를 떨었다.
우리 세 명은 의자가 아닌 구석진 땅바닥에 옹기종기 모였다. 수정이는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살피기 바빴다.
“김유나... 서율... 여기... 에는 왜?”
뭔가 어정쩡한 부름이 들려왔다. 분명 이름을 부르는 건데 이렇게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도 재능이지 않을까.
“수정아. 그렇게 딱딱하게 말구. 유나야~ 율아~ 이렇게 불러봐.”
나랑 같은 생각인지 유나는 수정이의 어깨를 턱하고 붙잡고선 말했다. 유나는 정말이지 감정을 숨기지 않는구나. 수정이가 보여주는 거리감에도 유나는 막힘이 없었다.
"응... 유나... 율이?..."
"내 이름을 이렇게 쑥스럽게 불러주니까. 안 좋은 것에 눈뜰 것 같아."
몸을 배배꼬며 수정이에게 다가가는 유나를 제지했다. 황홀한 표정의 유나는 이미 어떤 성향의 눈을 뜬것 같았다.
처음 봤을 때 수정이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며 안절부절 못했다. 그런 그녀에게 유나는 스스럼없이 다가갔다.
몸은 자라도 정신 연령은 그대로인지 유나의 친화력은 유치원생에 맞먹었다. 나의 착각일 수도 있는데 수정이는 어느 정도 유나의 분위기에 익숙해 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난 수정이에게 들러붙으려는 유나를 때어 놓고는 입을 열었다.
"수정아. 우리가 이러는 거 힘들어?"
"조... 조금? 걱정이... 돼. 새로운 괴롭힘... 이지 않을까... 하고"
하긴 그렇다. 예전부터 알던 사이도 아니었고... 갑자기 이렇게 들이대버리면 거부반응이 나오는 게 당연했다.
확실히 해두는 게 좋겠지. 수정이 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 그냥... 친... 친구가... 되려는 거니까.
흠... 그러고 보니 친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고민하고 있자 유나가 수정이를 품에 안았다. 그리곤 따뜻하게 말했다.
"우린 아무것도 하지 않아. 그냥 같이 있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혹시나 믿기 힘들다면 말해줘."
"말... 말하면 어떻게 할 거야?"
수정이는 유나의 품에서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하면 그때 또 말 할 거야. 우린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라고."
진심이 전해질 때까지 전한다. 어쩐지 유나다운 대답이었다.
유나는 수정이를 품에서 풀어주더니 내 옆에 와서 앉았다. 그리곤 팔꿈치로 나를 툭툭 건드렸다. 내가 유나를 바라보자 입모양으로 뭔 갈 전했다.
‘여기서 율이의 한마디!’
여기까지 와서 나에게 바통터치? 그러자 수정이까지 나를 바라봤다. 작은 사시나무를 하나를 꼽아놓은 듯 수정이는 바들바들 정신이 없어보였다. 지금 이 상황이 무서운 걸까? 그러니까 더 부담되잖아!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난 말을 꾸며서 말하는 건 잘 못했다. 그러니까 여기선... 본론만 말하는 게 중요했다.
“나랑... 친... 친구하자.”
왜 말을 더듬었을까? 말을 뱉어내고는 고개를 푹하고 숙였다. 단 한 번도 내 입으로 말해본 적이 없는 단어였다. 나의 그 말에 미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뭐야. 뭐가 잘못된 건가?
“...”
“푸핫!!!”
수정이는 나를 멍하니 바라봤고. 유나는 잠시 가만히 있더니 박장대소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 유나의 행동에 난 발끈했다.
“뭐! 뭐가?! 웃겨?”
난 유나의 부드러운 볼을 꼬집으며 발악을 했다. 유나는 그런 나의 공격에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으아아아악! 그만 웃어!!”
“알았어. 알았어.”
유나는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진정하는 듯 보였다. 정말 못된 유나다.
내가 이렇게 말한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아니 유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방금 나를 보며 지어준 미소는 아까의 장난처럼 웃어대던 것과는 다른 웃음이었다. 잘했다고 칭찬해 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수정이는 진지하게 생각하는 듯 보였고 잠시 뜸들이더니 조금 안쓰러운 말을 내뱉었다.
“나... 같은... 거랑 친하게 지내도... 괜찮아?”
“너 같은 거라는 게 무슨 말이야?”
난 수정이의 말에 되물었다. 그러자 수정이는 흠칫하면서도 뜸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런 행위에서 느껴졌다. 자신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고 있고 그걸 매일 곱씹으며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유나... 도 율이... 도 알잖아. 나 왕따인 거... 나랑 친구하면... 다들 안 좋게... 볼 거야.”
고개를 숙이며 수정이는 말끝을 흐렸다. 그에 유나가 대답했다.
"이런걸 뭐라고 하더라? 그... 그... 보호생물?"
난 유나가 하려는 말을 알아차리곤 말했다.
"보호본능?"
“그래 그거. 남자 애들한테 인기 많을 거 같잖아? 이건 아무나 가지지 못하는 재능이야.”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수정이에게 다가가는 유나를 물리고는 말했다. 수정이가 계속해서 생각하며 자신을 헐뜯던 고민들은 우리가 볼 때는 아무것도 아닌 거였다.
“우리는 그런 거 신경 안 써.”
“그래! 율이하고 내가 지켜줄게!”
난 지켜준다고는 안했는데. 유나가 멋대로 약속을 해댔다.
“하지만... 그러면... 피해가.”
“피해? 내가 피해만 입고 사는 사람으로 보이니...?”
“그건... 아닌데.”
수정이는 나를 한 번 쓱 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저 쓸데없이 위축되는 것만 없으면 많이 나아질 것 같은데 말이야.
“수정아. 자신감을 가져.”
“그거야!”
내 말에 유나는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감으로는 수정이는 꾸미면 모든 단점을 커버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어. 여자들의 자신감은 바깥으로부터 나오는 거니까. 예쁜 옷 입으면 조금 바뀔지도 몰라!”
맞는 말 인거 같았다. 자신을 가꾼다는 거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그런 방식도 표현의 일부였다. 사람의 호감을 끌면 긍정적인 영향을 불러 오는 것은 사실이니까. 자신감도 생기고 말이야.
“수정아, 유나랑 갔다 와.”
“뭐? 너도 가야지!”
“나는 빼주라. 사람 많은 거 싫어.”
내 말을 들은 유나는 수정이에게 다가가 귀에다가 쑥덕거렸다. 수정이는 알겠다는 듯 끄덕거리고는 나를 보면서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치... 친... 구로써... 부탁... 이야... 같이... 가자?”
비겁한 유나자식!! 이렇게 되면 거절하기 힘들게 되었다. 내가 여기서 거절하면......... 수정이가 상처받을 게 분명했다. 그걸 알면서도 수정이에게 부탁한 유나의 소악마적인 행위에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가면 되잖아!”
사람 많지 않을까......... 난 속으로 그런 걱정을 했다. 나의 대답을 들은 유나는 수정이와 계획을 짜기 바빴다. 계획이라고 해봐야 대부분 유나가 다 짜는 것이었고 나는 그런 쪽으로 전혀 관심이 없다보니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안경은 벗으면 전혀 안 보이는 거야?”
유나가 수정이의 안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응... 눈이... 많이 안 좋아.”
“흠, 그럼 렌즈도 맞추고. 일단...”
유나는 주머니에서 머리핀을 꺼내곤 수정이의 앞머리에 달아주었다.
“이 커튼 같은 앞머리부터 처리하고 엉성하게 묶은 머리끈도 정리하면...”
“호~”
난 머리하나만 바꿨을 뿐인데 달라진 수정이를 보며 탄식을 흘렸다.
유나의 손을 거치자 다른 사람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 지저분하다고 느꼈던 머리가 차분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길게 내려온 앞머리가 눈썹 위까지 덮어버려 답답한 느낌을 주고 있었는데 그게 사라져서 보는 사람들도 시원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앞머리에 가려져 있던 순수한 눈망울이 나타난 것에 유나는 물론 나까지도 놀랬다.
“나 갑자기 어릴 때 율이가 가르쳐준 단어가 생각났어.”
“뭔데.”
“지금 상황이 갭이 엄청나게 크다고 하는 거지?”
갭. 맞았다. 수정이의 기존의 스타일에서 조금의 변화를 줬을 뿐인데 완전 다른 사람 같았다.
유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정이를 바라봤고 나도 역시 그랬다. 수정이는 그런 우리가 신기한 걸 봤다는 듯 바라보자. 겁먹은 작은 동물처럼 안절부절 못했다.
나는 문뜩 생각이 들었다. 작은 변화에도 이렇게까지 다른 사람 같으니까. 수정이에게 부족한 자신감, 어쩌면 해결 할 수 있을 지도 몰랐다.
*
지금 우리가 와있는 곳은 쇼핑몰들이 즐비해있는 대학가거리, 수정이는 다가오는 사람들의 사이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기를 반복해서 어쩔 수 없이 나와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유나는 나에게 팔짱을 끼고 있었고 유나를 필두로 나와 수정이는 끌려가는 중이었다.
“유나야 대충 사는 게 어떨까.”
내가 그리 말해도 유나는 나를 힐끔 보더니 대답 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자들이 몸에 걸치는 옷들은 그 시간대의 최고의 선택들이 낳은 결과물이야. 그러니 대충이라는 말은 넣어둬.”
무슨 스위치가 켜졌는지 유나의 눈에는 불이 난 듯 반짝였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은 거 같은데. 무슨 이유가 있는 걸까?
“좋은... 일... 있어? 유... 유나야?”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수정이가 유나에게 물어봤다. 그에 유나는 만면에 웃음을 담으며 말했다.
“수정이는 모르지? 율이 놀러갈 때마다 트레이닝복만 입고 온단 말이야. 한창때의 여자애가 그런 것만 입으면 안 된다구. 옷 사러 가자고 하면 맨날 귀찮다고 하면서 안가니까 오늘 다 살 거야.”
“정말?... 율이 교복... 입은 거 외에는... 본 적이... 없어.”
유나의 그 말에 수정이까지 기대하는 눈초리를 보냈다.
애초에 여기 내가 여기 온 것은 수정이의 이미지 변신을 보기 위해 서지 나의 옷을 사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었다. 난 발걸음을 멈췄다.
“목적이 바뀐 거 같은데.....?”
“오늘은 도망칠 수 없어. 율아.”
유나는 나에게 낀 팔짱을 더욱 단단히 했다. 어쩐지 수정이가 잡고 있는 손에서도 힘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에 수정이를 바라보자. 기대 반, 불안 반 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 안가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옷 갈아입는 마네킹이 되기도 싫었다.
“나 돈 없는데?”
이번 상황을 벗어나고자 했지만 유나는 실성한 듯 웃었다. 잠시 후 그 요상한 웃음을 멈추며 말했다.
“나중에 갚아.”
검지와 중지에 끼인 카드가 그렇게 원망스럽게 보인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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