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초라해도 괜찮아-17화 (17/54)

〈 17화 〉 학교라는 지옥

* * *

“수정이 다쳤잖아. 그냥 둬도 되는 거야?”

유나는 나에게 끌려가면서도 차분히 말을 걸었다. 그에 난 발걸음을 멈추고 유나를 바라봤다.

“우리가 없는 편이 더 좋을 거야. 지금은.”

“지금은?

난 유나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나를 묵묵히 따라와 주는 유나가 고맙고 감사했다.

나를 내버려두고 수정이라는 애를 도와주었어도 되었다. 만약 유나가 그렇게 했다면 난 수정이에게 질투했었을 지도 몰랐다.

예전의 자신은 방치되었고 매번 홀로서기를 강행했었다. 그럴 때마다 매번 꼬꾸라졌다.

불행이라는 강물에 축축하게 자신의 발을 담그고서 나올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살짝 밀어주기라도 했다면 그곳을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간간히 생각했었다.

근데 나를 그 강물에서 밀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항상 나의 발은 젖어있었다. 너희들 때문이라며 항상 남 탓을 해 나 자신을 위로했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내 편이라는 행동 하나가 지금의 수정이에게는 엄청난 힘이었다. 그리고 난 그걸 용납하지 못했다. 내가 그렇게 힘들었으니까 너도 그래야만 한다는 끔찍하고 저질스러운 소망 때문에.

정말로 더러운 성격이 아닐 수 없었다.

“나... 진짜 못됐다.”

내 쪽에서 수정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아차 싶어서 다시 거둔 꼴이었다. 참견하지 않았으면 몰라도 발을 들여놓고 나 몰라라 한 셈이었다. 그 혼잣말에 유나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홱하고 기운 내 몸을 유나는 가볍게 품었다. 익숙하고 침착한 냄새가 코끝에서 맴돌았다.

“율이 진짜 멋있었어. 같은 여자인데 반할 정도?”

유나는 항상 이렇게 내 행동이 옳은 거라고 말해줬다.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한 거고 내가 자랑스럽다는 분위기를 뿜어냈다.

그에 어째선지 더욱 초라해 졌다. 내 마음 속은 병들었고 초라하며 칭찬받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 수정이를 보고 달려간 것은 유나였고 그런 수정이를 위해 목소리를 높인 것도 유나였다.

그에 비해 나는 자기만족 위해서 수정이를 돕는 척한 게 끝이었다. 더욱 손을 뻗을 수 있었음에도 아니다 싶어서 도망쳤다. 누가 더 멋있는 인간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유나는 항상 눈부셨다. 올바르며 자신의 원칙이 있었다.

그렇게 바른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게 난 너무 힘들었다. 또 동시에 힘이 나기도 했다. 그런 우리의 사이가 균형이 잡힌 관계인지 아니면 언제 어디서 삐끗하면 무너지는 관계인지 모르겠다. 지금의 이 상태에 만족할 수밖에.

*

어제는 착잡한 마음을 가진 상태로 모의고사 준비를 위해 카페에 갔다.

물론 나는 공부를 하지 않았다. 마음이 계속 정리되지 않아서인지 공부에 손이 가지 않았다. 유나를 봐주는 것도 건성으로 하게 되었다. 묘한 분위기에 유나도 질문을 하지 않고 홀로 공부를 했다. 좋은 느낌의 공부 모임은 아니었다. 다 내 탓이었다.

기껏 꾸민 유나의 노력에 걸맞은 재미있는 하루가 아니었음에도 마지막에 헤어질 때는 은근히 기뻐 보였다. 그때 유나의 한 말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비록 혼잣말 같았는데. 나에게는 똑똑히 들렸다. 아마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옛날에도 그랬는데. 멋진 기사님처럼 불의는 못 참고. 불 같이 화내는. 오늘은 어렸던 율이를 본 것 같아. 정말 기뻐.”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른 점은 유나의 존재 딱 하나였다.

나의 성격은 단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나의 배경도 그리 달라진 것이 없었다. 유나라는 사람 하나로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녀의 존재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녀가 알까?

내 곁에만 있어도 주변 사람들은 불행해졌다.

전염병처럼 불행이 옮겨져 갔다.

나와 관련된 사람은 다 힘들어했다.

과거의 나의 부모들도 범죄자가 되었으며 지금의 오빠도 해서는 안 되는 사랑을 마음에 품었다. 그건 내가 없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 아니었을까? 그리 생각하면 나의 존재의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때 아무것도 없었다.

유나의 친구라는 낚싯줄같이 가늘면서도 튼튼한 인연이 없었다면 난 또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지도 몰랐다. 환생하고 꿈일 거라 생각하며 장난삼아 만든 소꿉친구는 나의 가장 든든한 생명줄이 되었다....

“후아...... 잠이나 자자.”

생각할수록 암울해 질뿐이었다.

어느새 마지막 시험인 탐구시간이었다. 이미 문제를 다 풀은 나는 검토를 하지도 않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억지로 눈을 감고는 몸에 힘을 뺐다. 얼른 잠에 들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 지긋지긋한 자기혐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

모의고사는 대게 그랬다. 성적은 그날 가채점을 통해 발표되었다. 우리 학교도 그랬다.

종례시간, 노장선생님이 들어오셔서 한명씩 이름을 부르셨다. 각 교과의 점수를 표로 만들어 전해주셨다. 이렇게 빨리 만드신 것을 보니 이미 준비 중이던 일 이었나 보다.

그리고 노장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잔인한 짓을 하셨다.

“방금 전해준 순서가 우리 반 등수다.”

그런 노장선생님의 말에 애들은 야유와 고통 섞인 탄식을 흘렸고 그것도 잠시 우리 반에서 누가 공부를 잘하는 지 서열을 매기기 위해 학생들은 자신들의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난 자신의 성적표를 들여다봤다. 총점 394점, 틀린 개수가 총 2개뿐인 경이로운 점수였다. 2개 틀린 게 수학에서 틀렸다 보니 마킹실수 이거나 계산미스가 있었던 거 같다고 자신의 상태를 체크했다. 집에 가서 오답체크나 할까... 그러고 보니 나 맨 처음에 이 쪽지를 받았네.

“헐! 서율 2개 틀렸어!”

그때 내 앞자리에 앉은 평소에 장난을 심하게 치는 시끄러운 남자애가 큰소리로 외쳤다.

“당연한 거 아니야? 서율이 우리 반 1등이고 2등이 누구인지 찾아보자는 거 아니야 지금!”

그 남자애의 말에 날카로운 목소리로 한 여자애가 대꾸했다.

내가 1등인 건 이미 정해진 사실이었나 보다.

“서율이는 우리 반 일등이 아니라 우리학교 1등이란다.”

노장선생님이 시끄러운 반을 향해 그리 말하자 잠시 조용해 졌다. 그리곤 그 정적이 깨지더니 막 떠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말들 중에서 들려온 이름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그럼 1반에 박수정이 우리 학교 2등이 된 거야?”

수정이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그냥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그런 반응을 기대하다니 상당히 악질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근데 이건 나에게 중요한 것이었다. 그녀가 나와 같다면.......... 그녀의 자리가 하나 둘 사라질 때마다 인정하고 거기에 수긍해야하니까.

저질스러운 생각들을 하고 있자니 교실 앞문이 덜컥 열렸다. 그리고 들어온 수정이의 모습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수정이는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얼굴에는 아직 상처가 덜 나아있었고 치마 아래로 나온 허벅지에는 멍이 남아있었다.

혹여나 그 상처 때문에 그런 표정을 짓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수정이는 자신의 영역에, 자신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아있다는 것에 분노한 것이었다. 나를 또렷이 바라보며 눈빛으로 이야기 했다.

난 놀라지 않았다. 그 째려보는 눈빛에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그저.... 그런 수정이를 보고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예전의 자신은 그녀보다 적극적이지도 삶에 대해 열정적이지도 못했다.

내가 있는 이 곳은 비켜줘야 하는 자리이며 내가 작게나마 가지고 있는 영역은 언젠가 뺏기는 것에 불과했으니까. 그게 당연했고 그렇게 당연하게 일어나는 사실에 분노하지 않았다. 서글퍼하지 않았다. 받아드리고 수긍했다. 그리고 피하고 도망쳤다.

“너...”

수정이는 어린아이처럼 울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이 교실에 나와 그녀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른 아이들이 뭐라 이야기를 하지만 그런 소리는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녀와 나의 주변에 벽이라도 쳐진 듯 우리를 방해하는 사람은 없어보였다.

큼지막한 눈물들이 그녀의 상처 난 볼에 흘러내렸다. 그 슬픔을 팔뚝으로 조심스레 훔치고는 수정이는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체념도 수긍도 아닌 분노했다.

“다.. 다음에는.... 반드시! 내가 일등 할 거니까.”

“너.. 진짜.... 대단하다.”

난 감탄했다. 그렇게 처참하게 바닥을 기고 동급생에게 폭력을 당하면서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거기에서 유나와 같은 반짝거림을 느꼈다. 눈이 부셨다. 나에게는 없는 걸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현실에 동경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해온 일들이 나의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선에서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수였으니까 그 외의 방법은 없으니까. 그걸 따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는 느낌을 지금 받았다.

그때 내가 발버둥 쳤으면 어땠을까. 그때 자신도 분노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의 일들이 생각났다. 그런 가정의 끝에 어떤 결과가 있을지는 나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의 수정이라면 나에게 그 선택의 끝에 보이는 결과를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현실에 대해 분노하게 되면 저항하면 어떤 내일이 펼쳐지는 것일까?

난 수정이의 양손을 잡았다. 그리곤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해. 수정아.”

“어?... 으응?......”

나랑 같은 환경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빼앗기기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환경 속에서도 강한 사람이었다.

그게 오싹했고 한편으로는 희망으로 보였다. 수정이가 이제 어떤 길을 걸어갈지 몰랐다. 그래도 한 가지 길밖에 걸어보지 못한 나에게 여러 가지 길을 보여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수정이를 보면서 나도... 어쩌면... 혹시... 과거의 자신을 청산할 수 있지 않을까?

대리만족에... 불과하겠지만. 난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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