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초라해도 괜찮아-14화 (14/54)

〈 14화 〉 학교라는 지옥

* * *

“아주머니 아저씨, 저 왔어요.”

화창한 주말, 이런 날에는 아침 먹고 잠자고 점심 먹고 잠자고 저녁 먹고 잠자는 게 최고의 휴식이었다. 그 모든 파라다이스를 접어두고 어느 한 집 앞에 섰다.

파란 대문에 파란 지붕.......... 그림 같은 집이라는 말은 이런 집에다가 쓰는 말이겠지. 흰색의 외각 벽에 마당에는 초록의 잔디를 심어놓았고 드문드문 피어있는 다채로운 꽃들도 눈에 들어왔다.

보자마자 평화로운 집이라는 생각을 했다. 집은 옮겨져도 그 집의 구성원들의 분위기는 그대로였다. 여기가 바로 그 유나의 집이었다.

유나의 아빠는 전원주택을 가지는 게 일생의 꿈이라고 하셨다. 아저씨는 그럼에 돈을 악착같이 모아 최근 이 집을 장만하셨다. 직업이 공무원이시니.......... 죄송한 말이지만 평생 빚 갚으셔야 하는 거 아닐까? 걱정이 앞섰다.

내가 여기 온 이유는 다음 주 월요일이 모의고사 날이라 유나의 마지막 점검을 위해서였다.

알아서 잘해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혼자 주말에 공부하라고 맡겨두었다. 근데 모의고사에 대한 정보는 어디서 얻으셨는지 유나의 부모님이 각각 나에게 친히 전화를 주셨다. 애원하시듯 나에게 매달리는 통에 어쩔 수 없었다. 부모님이 이렇게나 부탁하는데 미리 공부 좀 하지 그랬니. 유나야.

날 기다리고 있었는지 초인종을 누르지도 않았는데 대문이 활짝 열렸다. 거기에서 튀어나온 아주머니가 나를 덥석 안았다. 미미한 화장품 향이 코를 간질였다. 그 품의 온기는 익숙했다. 어릴 때부터 유나네 엄마는 나를 종종 이렇게 안아주셨다.

“서율아! 어쩜... 더 예뻐질 수가 있니!”

“아주머니에겐 져요.”

미세한 웃음을 흘리며 장난스레 말하자 아주머니는 무척이나 기뻐 보이셨다. 립서비스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근데 유전자는 못 속이는 거라. 아주머니는 유나가 곱게 나이든 버전이라고 보면 되었다.

“호호호. 애가 벌써부터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하네~ 율이한테 잡힌 남자는 복 받았어.”

저한테 잡힌 남자라뇨. 잡을 생각도 없어요. 아무튼 그 남자는 아주 큰일입니다.

그런 나의 생각도 모른 체 아주머니는 호탕한 웃음을 흘리시며 날 집안으로 안내하셨다.

외관에서도 느꼈지만 내부에도 많은 신경을 쓰신 것 같았다. 우리 집도 떨어지지는 않는데 여기는 신축주택이라 그런지 여기저기에서 새 것이라는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흰색이라는 게 가구에 들어가면 이처럼 고급스럽게 보이는 거구나. 하고 감탄했다.

아주머니의 손에 이끌려 집안을 살펴보며 돌아다녔다. 그때 거실로 보이는 문이 열리며 아저씨께서 나오셨다. 그에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약속은 지켰어요.”

“율이가 해주는 거니 믿을 수 있지. 어때? 조금 나아진 것 같니?”

“나아졌다고 하기에는 애매하네요. 확실히 저번보다 아는 건 많아 졌을 거예요.”

“애매하다니?”

“알고 있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시험이라는 건 정답을 맞힐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점이니까요.”

아저씨는 씁쓸한 웃음을 보이셨다. 주름진 얼굴에서 힘듦이 느껴졌다.

부모는 자식이 잘되기를 바랐다. 그게 당연한 거였다.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되는 불변의 바람이니까. 성적은 삶에서 성공하기 위한 일부이기도 하면서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그걸 잘 알고 있는 분들이 다름 아니라 부모님이었다. 그래서 공부해라 공부해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제가 잘 해볼게요.”

안심하라는 식으로 피식 웃어보였다. 그런 나를 보시더니 아저씨도 표정을 푸셨다.

“율아, 잘 부탁한다.”

아주머니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셨다. 아저씨는 허허 웃으며 입을 여셨다.

“유나의 친구로 있어줘서 고맙구나.”

아저씨가 내뱉은 그 말을 듣고선 너무도 죄송했다.

그야 나 같은 친구는 없는 게 나으니까. 가식 덩어리에 말 한마디에도 진심을 담아내기가 힘들었다. 유나를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아무런 말도 해주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난 그들이 모르는 너무 많은걸 품고 있었고 많은 고통도 받았다. 그 고통 속에서 어떻게 망가져 있는지도 몰랐다. 난 이들과 다르고 아마 끝도 다르지 않을까......

*

“유나야, 율이 왔어.”

‘유나 방’이라는 귀여운 고양이 팻말이 걸린 문을 노크 없이 아주머니는 여셨다.

역시 엄마의 힘인가. 노크해달라고 당부해도 그냥 무시하고 여시니까.

각자의 방을 가진 딸들이든 아들들이든 사생활이 중요한 청소년기에는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엄마, 노크 좀 해!’가 아닐까 예상했다.

열린 문 사이로 보인 광경에 조금 놀랐다.

“어? 예쁜 언니다!”

지은이가 있었고.

“율아 어서와.”

당연히 유나가 있었고.

“서율? 너도 불려온 거?”

있어서는 안 되는 이가 있었다.

영락없는 소꿉친구구나. 남의 집을 자기 집처럼......... 아니 유나 방까지 들어온 건 좀 이상한 거 아니야?

난 그렇게 생각했는데 유나도 최승현도 그 사실에 거리낌이 없었다.

유나는 천연인가. 남자아이를 자기 방에 들이면서 아무 생각도 안 들었나?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하는 나만 이상한 것 같았다. 이게 어릴 때부터 지낸 소꿉친구의 본연의 모습. 생각을 포기하는 게 속편할 것 같았다.

역시 좋아하면 뭐든지 용서가 되나봐.

“그럼 재밌게 놀다가.”

놀러온게 아님에도 아주머니는 그리 말하곤 방을 나가셨다. 나와 최승현 사이에 정적이 흘렀고 유나는 지은이와 이야기에 한창이었다.

“공부하러 온 거지?”

최승현에게 덤덤히 이야기했다. 놀러온 거라면 당장 돌아가라고 하고 싶었다. 그의 앞에 펴진 노트하고 책을 보니 그럴 생각은 없어보였다. 오히려 공부를 하려고 온 것처럼 보였다.

“유나가 부르더라고 좋은 선생님 올 거라고. 그게 너 인줄은 몰랐지...”

“이제 나 인줄 알았으니까. 돌아갈래?”

“전교 2등인 너 공부하는 거 보면 나도 배울 게 있지 않을까.”

“맘대로 하세요......”

이전처럼 나를 보고 초조해 하던 것은 없어져 있었다.

저번에 만났을 때 다 끝난 일이라고 이야기했던 탓인가? 나를 대하는 게 조금 편안해졌다. 하지만 그게 조금 싫었다. 가만히 놔둘 걸 그랬나봐. 성격이 조금 꼬인 탓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방바닥에는 사각탁자가 펴져있었다. 거기에 유나와 최승현은 마주보며 앉아있었다. 내 자리는 그들의 사이인 것 같았다. 별말 없이 그들의 사이에 앉았다. 그리고 가지고 온 문제집을 펼쳤다.

“언니, 공부할거야?”

뒤에서 말소리가 들리더니 지은이가 나의 등에 업혔다. 살짝 무겁다고 느껴지는 체중이 실렸다.

지은이는 전에 나랑 처음 봤을 텐데 이런 스킨십을 할 만큼 마음을 연 것인가. 아니면 아직 아이라서 친화력이 강한 것일 수도 있겠다.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지은이가 마냥 귀엽기만 했다.

“시험이 얼마 안 남았어. 미안해, 공부 조금 끝내면 놀아줄게.”

“응! 알겠어!”

때 쓰지 않는 지은이였다. 이럴 때 때 쓰면서 놀아달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걸 바란 건 아니었다.

내가 아는 아이들은 그렇게 한다고 알고 있었다. 지은이도 혹시 그러지 않을까 했다. 하지만 전혀 그러지 않고 침대로 가서 유나가 소지한 인형들과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 엉뚱하고 귀여운 모습을 잠시 눈에 담고선 책을 펼쳤다.

“유나야,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고.......너는 물어보지 말고.”

유나를 보고 말하다가 최승현에게 삿대질을 하며 덧붙였다. 최승현은 한숨을 쉬곤 책을 내려다 봤다. 유나는 이미 나에게 물어볼 준비가 다되어 있었나보다. 벌써부터 책을 나에게 내밀 고 있었다.

이건 공부가 아니라 일방적인 수업이었다. 유나가 최승현에게 선생님이 올 거라고 말했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다.

기본적인 거부터 심화적인 문제까지 다 물어보는 유나 탓에 내 공부는 전혀 잡히지 않았다.

뭐 사실 내 공부는 따로 하는 척 하려고 들고 온 거라. 딱히 공부할 건 없었다. 지금 이렇게 유나 가르쳐주는 것도 복습에 도움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고 유나의 질문공세가 잠시 뜸해지자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나? 아까 전까지 계속해서 있던 질문이 사라지자 갑자기 심심해졌다.

그때 최승현이 말을 걸었다.

“너가 이정도 인데 우리학교 전교 1등은 뭐야.”

아까 전부터 자기 공부 안하고 유나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걸 같이 듣고 있던 그였다.

예전에 한 축적된 공부와 함께 최근 집에서 계속 분석한 모의고사 유형을 토대로 유나에게 주입시키고 있던 터라 그의 입장에서는 정말 공부를 잘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일단 질문을 받고 막힘이 없이 알려준다는 점에서 최승현은 놀라워했다. 그런 고등학생 많이 없을 테니까.

“수정이 말이야?”

유나가 최승현의 말에 대답했다. 그 이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았다.

“그래, 그 애.”

아 맞아. 1반 앞에서 부딪힌 그 여학생이었다. 수정이란 아이를 떠올리자 속에서 스멀스멀 탁한 것이 올라오는 메스꺼움이 느껴졌다.

난 더는 생각하지 않고 말했다. 다시 기억 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보다 잘하겠지.”

아까 아저씨에게 말한 그대로였다. 시험은 누가 더 맞추고 못 맞추고를 가리는 것. 그 아이가 입학시험에서 나보다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난 그 아이에게 져버렸다.

하지만....... 이 이후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시험이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