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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해도 괜찮아-13화 (13/54)

〈 13화 〉 학교라는 지옥

* * *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지금은 방과 후 주황빛으로 물든 창공이 교실 창문으로 보였다. 가장 좋아하는 날씨는 비 오는 날이며 그와는 전혀 반대되는 날임에도.......

"날씨 좋네?"

라고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잘 보여주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유나를 바라봤다. 그러자 살짝 움찔하더니. 유나는 양손을 자신의 허벅지 사이로 감추며 혓바닥을 내밀며 웃어 보였다. 귀엽다만 그 행위로는 이 사태를 넘길 수 없었다.

“동물원 못 갈지도 모른다고?”

물론 안가면 나는 좋았다. 하지만 부탁받은 게 있으니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모의고사 평균 40점이면....... 못 이룰 점수가 아닌데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내손에 들린 유나의 문제지를 바라봤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여기다가 다 담아놓은 것 같은 폭우였다. 국어는 어느 정도 눈이 내리긴 하지만 비의 양이 많아 진눈깨비에 불과했고 영어 같은 경우는........ 보기 싫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눈 버렸다고 할 수 있었다.

"서율 선생님. 잘 부탁드립니다."

유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그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부탁받고 싶지 않은 학생이었다.

만약 이 제자가 유나가 아니었다면 문제지를 찢어버리고 교실을 나가버렸겠지. 그 정도로 처참하고 무엇을 알려줘야 할지 앞이 막막했다.

난 혼자 하는 건 잘하지만 누굴 가르치는 건 힘들다보니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좀 해봐야겠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기본부터 하나하나 새로 해야겠지?

“우선 나도 풀어봐야 하니까.........”

“꼭 이거 해야 하는 거야?”

유나는 자신의 앞에 놓인 문제지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꽤 건방진 태도로 말이다.

아침의 자신감은 어디 갔는지 유나는 칭얼거리기 바빴다.

성적도 성적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건 유나의 아빠가 부탁하신 일이었다.

아저씨는 나의 제2의 아빠 정도 되는 그런 분이셨고 유나에게 나를 본받으라며 혼내기도 하시는 분이셨다. 성질 더러운 나를 닮아라고 무시무시한 소리를 하실 정도로 우리 아빠와 비슷한 딸바보셨다.

아저씨가 중학교 3학년 졸업식 날, 유나 몰래 부탁하신 거였다. 최근 정말 여러 가지 일이 있어서 까먹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도 귀찮음을 무릅쓰고 하는 일이니 잘 따라 줬으면 좋겠다.

공부 외의 모든 걸 좋아하고 잘하는 유나니 집중시키기에는 모종의 거래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내 말에 잘 따라주면 베스킨라벤스에서 아무거나 하나 사줄게.”

지갑을 흔들며 말하자 유나는 미끼를 물고 말았다. 슬그머니 올라간 입고리가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최근에 나온 베스킨라벤스 신제품인 솜사탕블라스트를 무척이나 먹고 싶어 했었던 걸 기억해내서 다행이었다.

“따.......딱히 먹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니까!”

“그래, 잘 알겠으니까. 집에 가자.”

유나의 츤츤거림에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의고사까지는 5일 정도 남았다. 그 사이에 주말도 끼어있으니 틈틈이 공부하면 바보 유나라도 40점은 실현가능한 점수였다. 모의고사에서 기본 문제만 맞출 수 있게 하면 되었다.

일단 나도 성적을 잘 받아야 하니 다시 공부를 시작해야 할 것 같았다. 예전 지식만 믿고 있다가 점수가 떨어지면 가족들이 실망할 수도 있었다. 그건 안 되니까.

이번 생에서 공부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할 것이 없으니 공부를 했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할 게 없으면 잠을 잤으니까. 모든 게 귀찮은 나는 잠자는 게 제 1순위였다.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잘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시험 성적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전생의 기억이 있으니까.’였다.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한데 그 때의 나는 정말 공부를 잘했었다.

고등학교는 나오지 못했어도 검정고시로 패스했고 꽤 좋은 대학까지 붙었던 것으로 기억을 하고 있었다. 어디였는지까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니까. 과거의 나의 영향으로 공부에 관한 측면에서는 도움이 되었다. 그 시절 열심히 해준 나에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가족에게 미움 받지 않을 정도로 하면서도 휴식을 취할 수 있었으니까.

“배스킨라벤스 가자! 오늘 사줄 거야?”

“아니. 모의고사 끝나는 그날에......”

­툭

1반 교실 문을 열고 유나와 대화를 하면서 나서는 중이었다.

나의 안일함 탓인가 누군가와 부딪혔다. 그냥 서로가 살짝 밀리는 정도의 충격이었다. 아프지도 그렇다고 아무 느낌도 없는 건 아닌 그런 감각이었다.

자세히 보니 점심시간에 1반에서 본 여학생이었다. 안경을 끼고 앞머리가 길었다. 난 그 여학생을 바라봤다.

화낼 생각도 따질 생각도 없었다. 그냥 부딪힌 게 무엇인지 확인차 그냥 바라본 거였다. 그런데 그 아이는 몸서리를 쳤다. 거기에 난 익숙한 소름을 느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마저도 칼 끝에 찔린 것처럼 아프다는 게 뭔지 알고 있었다. 학교 복도를 걷다가도 부딪히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했던 기억이 있었다. 초라하게도 처량하게도 그런 지긋지긋한 기억들이 머릿속을 휘저어놓았다.

기억에 잠식되는 것 같이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못했다.

“미......미안해. 서율아.”

“괜찮아. 그럼 이만.”

난 복도를 빠르게 걸어갔다. 피하고 싶었다. 같은 공간에 있기가 싫었다.

유나의 발소리도 뒤쪽에서 전해져왔다.

사람이 살다보면 부딪힐 수도 있는 거였다.

그런 거 가지고 누가 잘못 했냐느니 따질 생각도 없었다.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인거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괜찮아? 라고 물어도 되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굉장히 저자세로 나왔고 사과를 했다. 그리고 그 몸의 떨림과 안절부절 못하는 눈동자... 그리고 명백하게도.

“수정이 많이 다쳤던데.”

그 애는 다쳐있었다. 머리가 헝클어져 있고 교복이 형편없었다. 종아리에는 멍 자국이 선명했으며 다리를 저리기까지 했다. 그것도 학교에서 저렇게 되기란 쉽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저렇게 되었는지는 쉽게 예상이 가능했다.

그 이유는 한 가지뿐이었다.

“다치든 말든 알게 뭐야..........”

유나에게 하는 대답치고는 싸늘하게 말이 튀어나왔다.

그에 유나도 당황했고 난 주먹을 강하게 쥘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이 말을 뱉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아직 버리지 못했다. 아직 나는 그걸 품고 있었다. 사라진 게 아니라 잊어버린 거고 그걸 그 아이를 보고선 다시 찾아냈다.

난 심호흡을 했다.

떠오르지 말자.

이제 끝난 일이다.

숨을 들어 마시며 기억의 조각을 포장했고 내쉬면서 그 포장상자들을 더욱 깊숙이 밀어 넣었다.

“야! 서율.”

“괜찮아. 괜찮으니까. 잠시만.”

*

유나가 꽁해 있었다. 아까의 일에 대해 난 또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난 대학가로 올 수 밖에 없었다. 삐져있는 유나를 풀어주려고 힘써야했다. 지금 떠오르는 건 이것뿐이었다.

“솜사탕 블라스트 두 개 주세요.”

우리가 찾은 곳은 베스킨라벤스였다. 차가움을 맡고 있는 이 사업체는 얼음덩이를 파는 것에 특화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그것만 파는 것이 아니었다. 음료도 취급하고 있어서 골라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번에 나온 솜사탕블라스트는 음료와 솜사탕을 합친..........말도 안 되는 조합. 그런 조합이기에 초반 인기가 상당했다. 이벤트 성 상품이라 기한이 지나면 맛볼 수 없는 한정판이었다.

“많이 달 거 같은데......”

음료를 기다리다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게 좋은 거잖아!”

어느새 기분을 풀고는 웃음 짓고 있는 유나였다.

이 아가씨는 이걸 먹기 위해서 삐진 척 하고 있던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빠른 기분 전환이었다. 못 말렸다.

대체로 이곳이 단 것을 파는 곳이라 그런지 여성 손님이 많이 보였다. 커플들도 보이고 여자 친구들과 온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았다.

잠시 기다리자 주문 벨이 울렸고 우리는 음료를 가지러 갔다.

“우와! 기대대!”

갖은 효과음을 내며 솜사탕블라스크를 머금은 유나는 이내 먹는 법을 터득했는지 구름 모양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분홍색 솜들을 주워 먹기 시작했다. 광란의 5분이 흐르고 유나의 광대는 승천하려고 하고 있었다.

“입에 맞나봐?”

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전혀 줄지 않는 내 거를 바라봤다.

“율이는 안 먹어?”

“못 먹겠어........”

한 모금 먹어봤는데 나한테는 안 맞는 거 같았다.

정말....... 엄청나게 달았다. 혀를 설탕에 절인 것 같은 기분. 그래서 구석으로 밀어두었다.

기본적으론 적당히 단 것은 다 먹는 편인데 이 정도로 단 것은 못 먹겠다. 남은 건 유나 주면 되겠지 하고 짬처리를 할 생각이었다.

유나는 자신의 것을 비우곤 내가 준 블라스크를 손에 들었다. 그리곤 주변을 휙 둘러보더니 고개를 숙이곤 나에게 숙덕였다.

“어쩐지 다들 우리 보는 거 같은데.”

“매번 있는 일이잖아.”

여긴 대학가였다. 학생들이 찾아오기에는 거리가 멀었다. 일단 교복을 입고 있는 것만으로도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다.

여대생들은 우리들을 살피며 누가 더 귀여운지를 정하는 듯 했다. 여친과 같이 온 남대생은 눈길을 돌리다 혼나고 있는 게 들려왔다. 너무 익숙한....... 이제 딱히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특히 유나랑 있으면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났다.

“먹는 데 체할 거 같아.”

“이미 하나 드셨잖아요.”

내가 웃으며 유나에게 살짝 꿀밤을 먹이자....... 주변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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