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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해도 괜찮아-8화 (8/54)
  • 〈 8화 〉 그럼에도 살아야지

    * * *

    남자한테 우산 같이 쓰자는 제의가 올 줄이야.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전혀 기쁘지 않은 배려이고 남자들이 고백을 하거나 나에게 마음을 쓸 때마다. 나는 내 가슴이 구타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숨이 턱 막히고 피부를 뚫고 나올 정도로 소름이 뻗쳤다.

    예전부터 내가 화를 내고 거부를 해도 남성들은 그걸 진심으로 보지 않았었다. 그들 중의 몇은 알아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발걸음을 돌려서 돌아갈 때까지는 너무 오랜 시간동안 대치하고 있어야 했고 그 시간 속에서 나의 감정은 당할 만큼 당해 멍투성이가 되어갔다.

    왜 나의 분노를 곧이곧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것일까? 너무도 어이가 없었으며 알고 싶은 마음에 집에서 거울을 보며 인상을 써본 적도 있지만....... 거울상에 비친 나의 신경질은 그저 귀여운 앙탈일 뿐이었다.

    그 사실에 허탈해서 울은 건 나 혼자만이 아는 사실이다. 악에 악을 쓰며 진심을 다해 그들을 내쳤지만 그들의 눈에 나는 간보는 소녀로 밖에 보이지 않았겠지.

    그들의 감정은 나에게 폭력이고 나를 조롱하는 행위일 뿐이었다. 그들의 접근은 전혀 기쁘지 않고 오히려 민폐였다.

    "꺼져. 역겨우니까."

    냉정히 가라앉은 마음에 툭 내뱉었다.

    너희들의 감정을 나에게 부딪치지 마.

    너희들이 하고 싶다고 나에게 배려하지 마.

    너희들이 멋대로 해놓고 나에게 같은 것을 강요하지 마.

    유나의 소꿉친구? 이제 결론을 내렸다. 그런 건 필요 없었다. 유나의 친구라고 해서 다른 애들과 다른 게 아니었다. 나를 귀찮게 하는 건 그냥 타인에 불과했다. 놀란 최승현을 싸늘히 올려다봤다.

    행동으로 전해지지 않는 감정이 있다면 말로 표현할 뿐이었다. 역겹고 더럽고 징그럽고 소름이 돋으니 그만하라고. 찬찬히 조곤조곤 알아들을 수 있게.

    "매너? 배려? 그딴 거 내가 해달라고 했어? 미친, 매너남 좋아하시네....... 언제부터 자기만족에 찌든 걸 매너라고 부르는데."

    내 목소리를 듣고 나도 놀랬다. 차분히 내려간 음정에 감정이라곤 분노 하나 뿐이었다. 다시는 안볼 정도로 그를 대했다. 이제 보지 않을 사람으로 내안에서 정의되자 막말이 흘러나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게 무척이나 마음이 편안했다. 그런 나의 모습에 깨달았다.

    내가 엄청나게 참고 있었구나. 참는 건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이 몸으로 17년, 사람사이에 숨김이라곤 없었다. 내가 생각한 감정과 기분을 솔직하게 전하는 게 나의 대화법이다. 꽤 좋은 대화법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대화의 끝에 남는 것은 상대방의 일그러진 얼굴뿐이었다.

    호감을 표하고 나와의 친밀한 관계를 원하던 사람들과. 사람의 접촉을 싫어하는 나. 나와 그들이 어울릴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난 그들을 지금까지 살면서 솔직하게 거부해왔다.

    최승현이라는 존재 때문에 지금까지 만들어온 자신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잠시나마 완만하게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내 자신이 너무도 미웠다.

    “너.......”

    최승현은 나를 보며 입을 열었지만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

    “따라오면 정말로 죽여 버릴 거야. 이거 진심.”

    정말 일방적인 언급이었다. 그리고 진심이었다. 비 오는 운동장을 다급히 가로질렀다. 차가운 빗방울이 교복 위에 닿았다. 천천히 교복을 적셔가는 빗물에 몸을 맡겼다.

    *

    "감기 걸리겠다........ 괜찮겠지?"

    혼잣말을 하면서도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기분은 처참했다.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이 목 언저리에 딱 달라붙자 오들오들 떨리기 까지 했다. 피부가 차가웠다. 봄비라는 산뜻한 이름에 걸맞지 않는 싸늘한 빗물이었다.

    물 젖은 흙바닥에 비가 닿는 소리와 작은 운동화가 그 길 위를 걷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신발만 내려다보며 그렇게 집으로 가고 있었다. 내가 한 짓이지만 흰 운동화라서 빨래하기 귀찮겠다. 잘 씻기도록 집에 가서 바로 물에 담가나야겠다. 엄마, 힘들게 할 수 없으니 내가 해두자.

    기본적으로 버스를 타야하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미 교복도 젖어버려 남들에게 보여줄 몰골이 아니었다. 다행히 흰색 와이셔츠 위에 털조끼를 걸치는 게 우리학교 교복이기에 젖어서 브라 끈 같은 노출은 방지 됐다.

    차가운 비를 맞으며 계속해서 걷자 어느덧 상가까지 왔다. 여기까지 오면 거의 반 온 거였다.

    멈춰 서서 상가 유리창에 비쳐진 자신을 바라봤다.

    "미쳤네....... 진짜 싫다."

    유리창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유리창 안의 나는 반대쪽 손바닥을 똑같이 올렸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라도 흰 피부와 젖은 검은 생머리는 갓 샤워를 마친 것처럼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외모 상 청조한 분위기를 뿜어냈다. 비를 맞아 몸에 달라붙은 옷감들이 노골적이었다. 고혹적이고 매력적인 자신의 모습에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유리창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이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다. 세상은 이랬다. 꼭 필요한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지 않았다. 나에게 이 외모가 필요 없듯이 말이다........... 아니 아니다. 그보다 더 원천적인 요인이 하나 있다. 난 삶을 원하지 않았다. 그걸 우선적으로 내 품에 안겨줬다는 건 역시 세상은 의도적인 조절자가 있다는 것일까?

    다시 걸음을 옮기려했다. 어슬어슬한 것이 감기가 양팔을 벌리고 나를 환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산 없으면 학교에 가만히 있어야 할 거 아냐!!"

    머리 위로 우산하나가 드리워졌다. 검은색의 큰 우산은 두 명이 나란히 걸어가도 비 맞을 걱정이 없을 것 같았다.

    "어? 오빠다. 하이~"

    환희 웃으며 오빠를 맞이했다. 짧은 머리에 큰 키, 듬직한 오빠가 서있었다. 오빠의 표정은 전혀 좋아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화난 얼굴은 아니었다. 걱정을 온몸에 두른 오빠의 모습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솟았다.

    집 방향이 아니라 내가 걸어온 방향에서 나온 오빠는 버스로 학교까지 갔다가 여기까지 와본 모양이었다.

    거친 숨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왔으며 우산을 썼기에 비는 맞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송골송골 맺힌 이마를 보니 명백한 사실인가보다. 조금 미안했다. 그리 짧은 거리가 아님에도 한달음에 달려와 준 것인가?

    오빠는 가족이다. 피를 나눈 남매는 아닌 가짜가족이지만 오빠는 분명 나를 가족으로 인정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찾아와 준 거겠지.

    추위에 경련하듯 떨고 있는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더니 오빠는 자신이 입고 있던 코트를 벗었다. 그런데......... 그 행동이 어째선지 최승현과 겹쳐보였다. 난 나에게 다가오는 그 코트를 밀어내며 말했다.

    “난 가족이지?”

    난 여자가 아니라는 말을 돌려 말한 것이었다. 오빠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이번엔 화난 것 같은데?

    “무슨 의도로 물은 건지 알 것 같아서 짜증나는데 동생아.”

    “미안, 오라버니. 내가 말하고도 소름이 돋았어.”

    당연했다. 당연한 걸 물었다. 해선 안 되는 의심이었다. 우리는 가족이고 가족이기에 서로를 걱정하고 있는 것 뿐이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기에 때어놓고 싶어도 남이 될 수 없었다.

    이번엔 내 쪽에서 코트를 뺏어들고선 몸에 걸쳤다. 옷이 커서 치마를 다 덮어버렸다........ 본의 아닌 하의실종패션이었다. 치마길이가 절대 짧은 게 아닌데도.

    교복을 줄이는 것은 우선적으로 교복밖에 입지 못하는 학생들이 교칙을 지키면서 자신을 꾸미고 싶을 때 하는 행위였다.

    피어싱도 못하고, 머리도 만지지 못하니 교복이라도 만져야 하지 않겠나. 그런 일련의 과정은 학생들만의 자기표현이 담겨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깨작깨작 교복을 만지는 중, 고등학생이 귀엽게까지 보였다.

    꾸민다는 행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이기에 당연히 교복을 줄이지 않았다. 나는 손대지 않았다. 그럼 누가 그렇게 했는지 찾아봤었는데 교복 판매원의 소행이었다.

    처음부터 줄인 교복을 나한테 팔은 거였다. 처음 착용 할 때 엄마가 조금 짧다고 했던 말을 믿었어야 했는데. 요즘은 교복업체 마음대로 길이를 줄여 준다고 하니....... 세상이 참 노출지향으로 가는 것 같았다.

    “오빠, 휴가 이틀 남았네?”

    “잔인한 동생일세. 생각하기 싫었던 건데.”

    군대를 생각하니 티끌만큼이나마 여자로 태어난 게 다행이었다. 또 남자로 태어났으면 거길 또 가야한다는 사실에 졸도했을지도 몰랐다.

    몸에 좋은 약이 쓰다고 했던가? 군대를 약에 비유하기엔 웃기지만 매우 쓴 약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 효능은 잘 모르겠다. 어느 정도 영향이 없다고 하는 건 억지였다. 사람은 적응하기에 능한 동물이라서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변화했다. 약 2년의 시간을 거기 있다 보면 어떻게든 변하긴 할 거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여자가 되었는데도 군대 생각을 하고 있다니......... 안하려고 해도 주변사람이 가있기 때문이지 계속 생각이 났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난 농담을 던져봤다.

    “날 판 것까지는 아무 말 하지 않을게. 선임들이 날 귀찮게만 안하면 돼. 잘 알고 있지?”

    “세월이 가도 그 귀차니즘은 여전하네.”

    사람은 잘 변하지 못하니까. 울분 섞인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

    그 후로도 별것 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집까지 나란히 걸어갔다.

    코트를 입었음에도 한기가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미 다 젖었다 보니 몸의 기운을 올리려면 목욕을 해야 할 것 같았다. 하루에 이 긴 머리를 두 번이나 감아야 한다니. 벌칙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현관문을 열고 오들오들 떨며 말했다. 애교 장전 연극의 시간이었다.

    “으으...... 엄마 나 추워.......”

    “왜 이리 젖었어! 얼른 들어와. 물 받아놓을게”

    엄마는 허둥지둥 목욕탕으로 달려가셨다. 아직 아빠는 퇴근시간이 되지 않아서 집에는 안 계셨다. 그건 다행이었다. 걱정이 많으신 아빠라 여러 가지 물어볼 것이 뻔하기에 귀찮았다.

    신발을 벗으며 뽀송뽀송한 오빠가 먼저 집안으로 들어섰다. 난 아직까지 엄마의 허락이 있을 때 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오빠는 입을 열었다.

    “코트, 네가 빨아놔.”

    “........응.”

    나지막이 대답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귀찮은 일이 늘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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