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 그럼에도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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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색 열쇠를 문고리에 꽂았다. 키가 알맞은 소리를 냈고 열쇠를 돌리자 ‘철컥’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텅 빈 시청각실은 꽤나 신비스러운 장소이다. 왜 시청각실의 괴담 그런 거 있지 않나. 휑한 공간 특유의 서늘한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하아 돌겠다.”
기지개를 펴며 속에 있던 말을 뱉어냈다. 개운하긴 커녕 소름끼치게 가슴이 먹먹하다. 창 밖에는 그런 내 마음을 알려주듯 비가 내렸다.
먹구름 진 하늘에서 빗줄기가 추적추적. 어떤 물방울은 창문에 부딪히고 어떤 건 바닥으로 곤두박질 친다. 이런 게 진정 좋은 날씨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신에게 좋은 날씨야 말로 그날의 좋은 날씨이지 않을까. 맑은 날씨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나처럼 비 오는 날이 운치가 있어서 좋다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시청각실은 꽤 마음에 들었다. 아무도 없는 건 물론이고 조용하기까지. 듣기 좋은 빗소리만이 나와 함께 있다. 아침에는 분명 맑았다고 생각하는데...... 어느새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무릎을 끌어안고 아무 바닥에나 쭈그리고 앉았다. 멀쩡한 의자보다 이런 곳이 편한 건 내 천성이려나.
이런 날은 비에 젖으며 미친년처럼 날뛰고 싶었다. 그래도 멀쩡한 척 집에 들어가야 하니 그건 참도록 하자. 아니 어차피 우산이 없으니 집에 가면서 비를 맞아야 되는 거는 피할 수 없다. 그렇다고 막상하려니 꺼려지는 게 사람 심리다.
노장선생님의 따듯한 대우가 과거의 나를 떠올리게 했다. 그 꺼림칙한 기억에서 벗어나고자 도망치듯 교실을 뛰쳐나갔지만 붙잡지는 않으셨다. 그에 감사했다. 누구라도 나를 붙잡았다면 그 자리에서 울어버렸을 지도 모른다.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곱씹어본다. 학생들을 도맡아 인도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런 행위가 강요되지는 않는다.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선생들이 있다. 학생들을 기피하며 단지 수업이라는 행위를 하는 자들과 길을 알려주며 앞에 닥친 문제 해결력을 길러주는 그리고 같이 생각해주는 자들도 있다.
내가 봐온 선생들은 그 둘 중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난 그들의 학생조차 아니었으니까. 그저 걸림돌에 불과한 길거리에 있는 흔한 돌과도 같은 것이었다. 무심코 차버릴 정도였을 테니까.
괜찮다고.
선생님만 믿으라고.
그들이 입에 발린 이런 헛소리만이라도 해줬으면 어땠을까? 내가 처한 상황에 도움이 되지는 않아도 그들이 나의 증오의 대상은 되지 않았을 거다.
생각하기도 싫다. 해결되지 않는 과거고 해결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냥 지금 이대로 어떠한 결말도 나지 않은 상태로 살아가도 고통은 없다. 최소한의 관계만을 유지하며 최소한의 감정을 소모하는 지금의 생활이 무척이나 행복하다. 정말이다.
고개를 푹 숙인다. 아픔이라....... 내가 그렇게 아파보였는가. 모르겠다. 내 일상 표정이 어떤지.
“많이도 내린다.”
시청각실 문이 열리며 최승현이 들어왔다. 여긴 또 어떻게 알고 온 것인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자. 허락한 적도 없는데 나의 옆자리에 앉는다.
“너 뭐야.”
“강수 확률 20퍼였는데 내가 그 확률을 믿고 아침에 가져왔다.”
자랑스레 우산을 흔드는 최승현이다. 지금 그 말은 나의 물음에 전혀 알맞지 않다. 선생님과의 대화를 엿들은 건가? 아니 그렇다고 해도 여기까지 찾아오는 것은 설명되지 않는다.
이 자식하고 내가 얼마나 친하다고........ 불과 어제 본 사이다.
“그래서?”
“아까 나갈 때 우산을 안 챙겨가서 올라왔는데. 네가 막 뛰어가더라고. 뭔 일 있나 해서 와줬다.”
지금 네가 내 옆에 앉은 것 자체가 큰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그래. 아무 일 없어. 잘 가.”
감정을 죽이고 담담히 이야기 했다. 전에 친해지고 싶다는 말은 진심이었나? 그때 분명히 친해지는 것은 거부했을 텐데. 최승현은 나를 멀뚱히 바라봤다. 이 놈아 뚫리겠다.
“네 눈 진짜 검다. 보통 약간 갈색도 섞여 있지 않나?”
여전히 막무가내구나. 얼굴 들이밀지 마. 미친놈아. 필요 이상으로 접근한 면상을 손으로 밀어냈다.
“비위 상하는 것 좀 치워줄래?”
이 자식은 꼴에 피부 관리는 하나보다. 또래 남자애들같이 여드름이라는 게 없다. 평범하지만 의외로 축복 받은 얼굴일지도 모른다. 노트에 한줄 채워놓을까? 본의 아니게 피부가 좋아서 놀램. 이라고 말이다.
최승현은 얼굴에서 내 손을 때어냈다.
“이 애는 얼굴과 다르게 입이.......”
말을 하다말고 멈칫한 최승현은 아래로 시선이 내려가더니 갑자기 고개를 정면으로 집중했다. 볼이 붉어지고 그 후로 나의 눈을 바라보지 못했다. 정면만을 직시한다. 그런 그의 행동에 의아함을 느끼며 아래를 바라봤다.
“진심으로 너가 돌았구나. 돈 것이구나.”
무릎을 끌어안고 있었기에 스커트가 아슬아슬하게 허벅지에 걸쳐져있다. 정면에서 지금의 나를 본다면 속옷까지 보일 것이다. 그나마 옆자리라 안보였겠지만 나의 뽀얀 허벅지가 위험할 정도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아오! 진짜........ 살을 찌우던가 해서 몸을 망가트리던가 해야지. 짐승 같은 것들이다. 어떻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게 눈에 들어오는 걸까?
“안 봤는데?”
다리를 펴고 치맛자락을 정리했다. 몸은 솔직한데 시치미는 그만 때라....... 네놈 볼때기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붉게 물들다 못해 볼에서 핏줄이 튀어나오겠다.
“본 애들은 다 그리 이야기하더라고. 일단 죽자.”
“나 죽는 거야!?”
싸늘한 내 표정에 기겁하는 최승현이다.
“죽어도 여한이 없지 않나?”
“그 정도의 허벅지이긴 했어. 고등학생이 그건 반칙이다.”
나의 말에 이런 대답을 날리면서 최승현은 아까 전의 풍경을 생각하는 듯 다시금 볼을 붉히는 것이었다. 진짜 변태구나. 유나가 불상할 지경이다.
“진짜 봤네.....? 성추행 벌금이 얼마더라...... 내가 그런 건 빠삭하거든.”
“미안.......”
그제 서야 꼬리를 내리는 최승현이다. 고개를 푹 숙이는 게 일단 진심으로 보였다.
내가 말하긴 뭣하지만 시선이 고정되어도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성의 다리에게서 눈을 돌리려면 엄청난 결단력이 동반되어야 할 정도다. 본판이 이렇다보니 나를 낳은 친부모님을 보고 싶을 지경이다.
막말로 속옷을 본 것도 아니고 나를 덮친 것도 아니다. 사과까지 받았으니 이번 건은 넘어가도록 하자.
입 싸움하기도 짜증날 지경이다. 이 안건으로 계속 이야기해봤자 시간 끌기 밖에 되지 않는다. 저 자식의 두뇌를 열어서 아까 전 상황을 지워버릴 수도 없다. 그렇다고 죽이지도 못한다. 그럼 포기하는 게 명석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겠지.
남자속내를 내가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고. 여자들은 몸가짐은 참 힘들다. 특히 치마 입은 날에는 걸음걸이조차 조심해야했다. 거리에 부는 바람 전부가 여자들의 적이다.
이해한다고 해도 몸을 보는 걸 가볍게 생각하는 여자라고는 여겨지고 싶진 않았다. 화난 분위기를 내며 덤덤히 앉아있자 최승현은 안절부절 못했다.
이 성추행 자식 때문에 우울했던 기분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다.
유나의 친구라기에 잘 보이려고 연기 좀 하려고 했으나 시도도 해보기 전에 스토커로 의심해 버리면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맘 편히 사람을 대해본 게 유나 이래로 언제였던가 싶다.
계속 이렇게 시청각실에 앉아 있는 것도 그렇고 해서 집에 돌아갈까 했다가 그 생각을 접었다.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 애랑 있는 게 편해서 그러는 게 아니다. 가족들이 더욱 불편하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서로가 인정하는 듯 보이지만 분명 무리를 하며 애쓰고 있다. 부모님들은 내가 부족함을 느끼지 않도록 나는 가족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있다. 문제점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행동 패턴을 바꿀 수가 없다.
내가 아닌 얼굴을 하고 성격을 바꾸고 행동을 하며 호감과 유대를 만들기 위해 억지 모습을 보이는 것. 그게 ‘정답’이다. 나의 본 성격은 그들에게 상처만 줄 뿐일 테니까. 숨기고 숨겨서 드러내지 않게 해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은 나에게는 너무 지옥 같다.
애교 많은 딸, 귀여운 여동생 그 어디에도 나의 본 모습은 없다.
최승현이 갑자기 피식 웃으며 말을 꺼낸다.
“그건 그렇고 최근 내 주가가 상승하고 있는 게 느껴지더라고. 여기저기서 나 찾는다고 난리도 아니다.”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를 하려고 주가이야기가 나오는 걸까. 난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비 내리는 창문을 바라본다. 내가 그러든지 말든지 최승현은 입을 가만히 놀린다.
“어떻게 알게 됐는지, 소개시켜 달라, 애인은 있는지, 어떤 샴푸를 쓰는지, 무슨 운동을 하는지, 별에 별...... 기똥찬 질문들을 하더라고.”
최승현은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는 척을 하다가 이내 포기해 버린다. 질문이 정말 많았다는 그 나름의 행동이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뭘까? 그 이야기를 나에게 하는 이유는? 그런 나의 반응에 최승현은 장난스럽게 이야기를 하다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불려나가서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그에 대해 걱정하는 게 아니라 호기심이다. 이 자식을 이렇게 까지 기분 나쁘게 할 수 있는 스킬이라면 부디 나에게도 알려줬으면 좋겠다. 내가 지금 언짢은 이유는 단 하나다. 시청각실은 노장선생님께서 나만 쓰라고 하신 장소란 말이다. 네가 쓸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고.
유나의 소꿉친구라니 함부로 대할 수도 없고 난감했다. 다음에 들어올 때는 꼭 문을 잠그고 있어야겠다.
최승현은 심각한 고민이 있는 듯 인상이 아까부터 안 좋다. 질문의 내용을 나열하다가 이내 그것도 그만두고선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 고개를 숙이고 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볼까 했지만 굳이 참견할 생각도 없을뿐더러 도움이 필요해 보인다고 선뜻 나서면 그건 그 사람의 성장의 기회를 막는 무자비한 행위이니까.
물론 그런 것보다 귀찮은게 더 컸다.
“가자.”
별로 하고 싶은 이야기도 없었고 내가 가지 않으면 이 녀석은 계속해서 앉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내 쪽에서 제의하자 그때서야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
“잘 가고, 내일은 보지 말자.”
학교 정문 앞에서 선 나는 최승현에게 통보했다. 비의 양은 줄어들 생각이 없었다. 싸늘하게 내리는 봄비에 바람까지 부니 몸의 체온을 확 뺏어갔다. 바람을 정면으로 맞기에는 오들오들 몸이 떨려서 유리창 뒤에 숨었다. 그에 아주 조금은 나아진 기분이었다.
“왜? 너는?”
우산을 펴고 나가던 최승현은 뒤돌아봤다. 그에 빨리 가라고 손짓하며 말했다.
“나? 우산 없어........... 야!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빨리 가라.”
우산 없다는 나의 말을 듣더니 우산을 접고 다시 돌아오는 최승현이다. 네놈이 미쳤구나. 말도 안 된다. 이거 무슨 상황이지............
“우산 없다고 한 네 잘못이야. 우선은 있다고 하고 내가 가고 난 다음에 무슨 수를 쓰던지 해야지. 물어본다고 대뜸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두고 가냐.”
“부탁이야....... 제발 가라.”
내가 남자였으면 이 애는 무조건 두고 갔을 것이다. 아마 자신은 있는 우산을 뽐내며 얄밉게 집으로 갔겠지. 그러고 나는 비에 홀딱 젖은 상태로 걸어서 집에 가게 되었을 것이다.
여자는 비에 맞으면 안 되나? 비에 맞으면 탈모현상이 더 잘 발휘되는 것은 남자들이다. 그러니까 더욱 우산을 써야 한다면 남자들이 써야한다. 남자가 여자에게 우산을 넘겨주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호감 때문인가? 잘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애정이라는 감정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이 많이 없다.
“그냥 나는 무청고의 매너남이 되고 싶을 뿐이지.”
매너남? 속으로 피식 비웃었다. 내 외모 탓에 마음을 전한 남자들은 한 둘이 아니다. 최승현이 품고 있는 게 그런 감정이 아니라면 냉정하게 내칠 필요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런 배려와 매너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었다.
일단 이 녀석하고 이야기 하고 있는 이유는 유나라는 존재 하나 때문이다. 유나가 소개시켜줬고, 다른 유나 친구들과는 다르게 유나와 오랜 시간 있었던 소꿉친구니까. 유나와 최승현의 관계가 무너질 때 까지는 좋든 싫든 엮여야하는 남자애다.
“네가 준 매너, 마음속에 잘 받아 줄 테니까. 갈길 가세요.”
“나 가고 나면 너 어떻게 가려고?”
“비 맞고 가던지...... 아...... 아니 가족 불러서 가야지.”
생각 없이 말해버렸다. 가족을 부를 생각은 전혀 없다고 보면 된다. 휴가 나온 오빠라면 집에 있지만 군대 휴가인데 심부름꾼으로 쓰기에는 미안했다. 쉴 때는 쉬게 나둬야 한다. 그만큼 군대는 더러운 곳이니까.
최승현의 눈이 가늘어 진다.
“나도 안가 그럼.”
“가라고!! 가라니까!!!!”
나는 화가 나서 언성을 높였으나 돌아오는 반응은 무척이나 덤덤했다. 아 진짜 짜증나는 놈이네......
“싫다. 우산 써 그럼 나도 갈 테니까.”
“미친놈아!! 가라고오!!”
우리 둘의 학교 정문에서의 실랑이는 꽤 오래 계속됐다. 아 진짜 싫다 최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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