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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원수)를 다루는 바람직한 방법-31화 (31/31)

〈 31화 〉 그러길래 하지 말라니까

* * *

"어디 갈까요?"

"피방."

네, 그러시겠죠. 유한은 허허롭게 웃었다.

처음 한 두 번이야 기대한가득 담아왔지만 이젠 슬슬 현실이 보였다. 그는 하늘에게 있어서 조금 친한 후배, 그리고 게임 친구였다.

영화관이나 볼링장까진 바라지도 않았다. 하다못해 만화카페를 가거나 근처를 거닐며 대화를 나눌 수는 없는 걸까.

단란하고 오붓한 시간이 있어야 서로에 대해 알아갈 수 있을 텐데 하늘은 그럴 여지를 전혀 주지 않았다. 일부러 철벽을 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동안 하늘에 대해 알게 된 것이라고는 힐러와 탱커 유저이며 티어가 플래티넘이고 모 하이퍼 FPS 게임의 광팬이라는 사실이었다. 하나 같이 게임에 관련된 사실 뿐이었다.

"아, 저 씨발 새끼가!"

그리고 입도 좀 거칠었다. 주로 게임을 하다가 화가 나면 한마디씩 튀어 오곤 했다.

그래, 유한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빈이 이미 말하지 않았던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부장 형은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다행히도 그는 게임을 좋아했고, 게임을 잘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같은 게임에서도 하늘보다 티어가 3단계는 높았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가장 높았다.

이 또래 남자들 그룹에서 게임을 잘한다는 것은 하나의 스테이터스였다. 그의 캐릭터가 총구에서 불을 뿜을 때마다 채팅창은 감탄사로 도배되곤 했다.

그래, 이거였다. 그는 묘한 우월감과 성취감에 휩싸였다.

이전에는 임진우라는 무시무시한 선배가 끼여 있어서 분위기가 요상하게 흘러 갔던 것뿐이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옳았다.

"와 개쩐다."

선배, 그, 말 좀 예쁘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한마디가 한숨이 되어 잇새를 누볐다.

저런 말이라도 기쁘게 듣는 자신을 부정할 수 없는 까닭이었다.

"나 너무 쉬운 거 아냐?"

"응? 뭐라고 했어?"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예요."

이대로 괜찮은 걸까 진짜.

이제 막 17살이 된 청소년에게 첫사랑 성취라는 목표는 아직 멀고도 멀었다.

하늘은 그의 속도 모르고 잡아먹을듯이 화면을 응시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시아에게 할 사과는 이미 내일할 일로 밀려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간과한 한 가지 사실.

세상에 제 맘대로 흘러가는 일이란 매우 희귀하다는 것을.

#

"유빈아, 유빈아."

금요일 아침 자습시간. 평소 인사 정도만 하면서 지내던 여학생이 흥분한 기색으로 손짓 했다.

"왜?"

복잡해진 머리를 벅벅 긁으며 수학을 풀던 유빈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한껏 상기된 여학생의 얼굴이 영 불길한 신호처럼 느껴졌다.

"하늘이한테 들었어. 네가 1학년 때 시아를 도와 줬다며?"

"...응?"

맥락도 없이 튀어나온 말에 유빈의 사고가 한순간 브레이크를 걸었다. 그걸 왜 말한 거야 도대체?

분명히 그때의 일은 함구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 같은데. 이번 사태의 원인을 코앞에서 마주친 유빈이 길고 긴 한탄을 흘렸다.

크리스쳔도 아니건만 손으로 성호를 긋고 싶었다. 인생이 고달플 때 인간은 종교를 찾게 되는 법이었다.

하늘은 한 명, 혹은 몇 명에게만 말할 생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입 밖에 나온 순간 비밀은 비밀이 아니었다.

가십에 미쳐 사는 옆집 아주머니처럼 쉴 새 없이 시아와 유빈의 관계에 대한 관심을 읊어대는 꼴이 이미 수십 명에게는 같은 이야기를 했을 것 같은 능숙함이었다.

가능한 한 문제를 조용히 덮어 버리기로 시아와 의견을 모았던 그로서는 골이 땡길 수밖에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조용히 뒤따라왔던 시아의 숨소리가 슬그머니 거칠어졌다는 사실이었다. 분노와 배신감 사이의 어딘가에서 헤매는 그 감정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전날 책상에 머리를 박고 끙끙거리던 하늘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기 잘못인 줄은 알았나.

만일 그녀가 먼저 와서 사과했다면 조금 나았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이미 시아는 제 3자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

"돕긴 뭘 도와. 한 게 없는데."

"에이, 발뺌은."

말을 해도 하필 이런 사람한테 한걸 보면 사람 보는 눈이 어지간히도 없는걸지도 모른다. 임진우와 아직도 친구로 지내는 걸 생각해 보면 그것도 당연한 걸지도.

"난 아무것도 안 했어. 네가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이야기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전하고 자리로 돌아온 유빈은 지끈거리를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어찌 원흉을 밝혔는데 문제가 더 심각해진 느낌이 들었다. 힐끔 시아의 표정을 살피니 이거 금방 풀릴 화가 아니었다.

"어제."

"응?"

"어제 하늘이는 유한이랑 피씨방에 갔지?"

아차. 유빈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자기가 잘못한 줄 알면서 사과도 안 하고 놀러 갔단 말이지?"

뭐라 변호해 주고 싶어도 할 말이 없었다. 하늘이는 어제 피씨방에 갔다고 인증샷까지 찍어올렸다.

시아의 시선이 교실 구석에서 웃고 떠드는 하늘이를 쫓았다. 차갑게 굳은 눈빛이 그녀의 상심을 표현해주는 듯했다.

"난 역시. 김하늘이 싫어."

"...그래."

1년 전과는 다르게 이번 일은 평화롭게 해결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시아가 하늘이에게 걸음을 옮겼다.

유빈도 따라가려 했지만, 가벼운 손짓에 막혀 다시 앉을 수밖에 없었다.

"오래 안 걸릴 거야."

"......"

끝까지 지켜볼 자신도 없었다. 유빈은 일부러 고개를 돌려 문제 집에 집중하기로 했다.

입이 가벼웠다. 시아도 유빈도 하늘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자기가 찬 남자들이 어떤 '쓰레기 같은' 어프로치를 해왔는지 구구절절 읊어 주곤 했다. 하나 같이 개그성 넘치는 이야기들이라 유빈이야 즐겁게 들었지만 당사자들은 알려지길 원치 않았을지도 몰랐다.

가끔 다른 사람과의 문자에서도 어처구니없거나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 일이 있으면 캡쳐를 해서 단톡방에서 웃음거리로 삼기도 했다.

직접 뭐라고 하지는 못했지만 유빈은 그런 행동이 다소 '경박하다'고 느낀 적이 있었다. 그녀가 받은 고통이나 곤혹을 이해하지만 그것과는 또 별개의 문제였다.

이번에 일어난 일은 결국 그런 그녀의 행동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봐야 했다.

"하늘아."

하늘이를 부르는 시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결국, 유빈은 문제를 읽다가 질끈 눈을 감았다. 이놈의 귀는 너무 좋아서 문제였다.

#

"응? 시아야. 왜?"

"잠깐 이야기하고 싶은데, 괜찮아?"

"응."

하늘의 머릿속에서는 전날 한결심이 반쯤 증발해 있었다. 그래서 아침 자습 시간이 시작되자마자 사과한다는 선택지를 고르지 못했다.

그게 그녀가 범한 통한의 실수였다.

"네가, 이야기했다며?"

그 말을 듣고서야 하늘이는 떠올렸다. 자신이 저지른 대형 사고는 전혀, 요만큼도 수습되지 못한 채였다는 것을.

가만히 있다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처럼 돌고 돌아서 결국에는 밝혀지고 말 태니까.

"......"

"유빈이 어떻게 했는지도 다 말한 거지?"

덕분에 유빈도 시아와 더불어 관심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본인은 별거 아니라고 했지만 시아로서는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그랬어?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던거야?"

"난 그냥... 도움이 될 거로 생각해서."

"너도 애들 소문에는 많이 당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기분 좋았나 봐? 그게 도움이 될 거로 생각했어?"

가면은 진작에 던져 버렸다. 하늘은 처음 보는 시아의 날카로운 표정에 말도 꺼내지 못했다.

1분, 2분, 그리고 3분. 하늘은 제 신발 끝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됐어. 아무 말도 할 생각 없다면."

무슨 말을 해야 했을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하늘의 사고는 그 두 문장만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난."

잘게 떨리는 목소리. 다음 한 마디는 작고 뭉게져서 잘 들리지 않았다.

"믿고 싶었는데."

잘 들리지 않았어도, 하늘은 제 숨이 끊어지는 것 같은 둔통을 느꼈다.

정적 속에서 눈도 마주치지 않던 두 사람을 일깨운 것은 반 전체를 휘저은 호통이었다.

"야! 너지? 네가 방해한 거지!"

"우와 이걸 진짜로 오네."

책상과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 어깨와 멱살을 잡힌 유빈이 묘하게 흐리멍덩한 표정으로 딸려 올라갔다.

"이야기 다 들었어. 진짜냐 너? 네가, 작년에..."

"작년에. 뭐?"

유빈은 눈앞의 남학생의 이름을 떠올리려고 노력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작년에, 시아를 괴롭히는 걸, 방해했냐고?"

짧게 짧게 끊어서, 분명하게 말하자 남학생은 차마 그렇다고 말하진 못했다. 긍정했다간 자신이 다른 사람을 괴롭혔다는 것을 긍정하는 꼴이 되었다.

"그만둬. 이래봤자 우리 둘 다 좋게는 안 끝날걸."

"너..."

"침착해. 난 작년에 아무것도 안 했어. 우연하게 옆자리가 됐을 뿐이야. 자리배정이 랜덤인건 너도 알잖아."

과연 이런 설득이 통할까. 유빈은 회의적이었다. 소문이 어떤 식으로 변질됐는지도 알 수 없는 데다 이 나잇대 남학생한테 논리를 들이대도 무시나 안 당하면 다행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야기가 이어질 수록 붉어지던 면상은 임계점에 달했다. 화산 폭발이라 표현하는 것이 옳을까.

"이 새끼가!"

힘껏 당겨지는 오른 주먹. 유빈은 암울한 미래를 예측하고 눈을 감았다. 안경은 피해서 쳐주라.

하지만 그 주먹이 유빈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그 전에 먼저 남학생을 후려치는 주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저기서 울리는 비명. 유빈을 놓고 바닥에 나동그라지는 남학생. 그 뺨이 푸르스름한 멍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가여이 바라보며 유빈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속삭였다.

"그러길래 말했잖아. 좋게는 안 끝날 거라고."

불의의 일격에 정신이 멍해졌는지 일어나지도 못 하는 남학생 앞에서, 눈을 희번덕 뜬 스포츠맨이 지저분하게 으르렁거렸다.

안 그래도 체격 크고 날카로운 인상이 이빨을 드러낸 날짐승이나 마찬가지였다.

"네가 지금 내 친구를 때리려고 했냐?"

멘트 한번 주옥 같네. 물론 입 밖으로는 뱉지 않았다. 대신 고삐를 잡을 수 있을까 싶어 한마디 던져 보았다.

"진정해. 아직 안 맞았잖아."

"야, 대답해. 내 친구 때리려고 했냐고!"

그 친구 말은 듣지도 않지. 이렇게 되면 막을 방법이 없었다.

임진우는 완전히 눈이 돌아가서 아직도 주저앉아 있던 남학생의 정강이를 후려찼다.

아아, 이건 부모님 호출 사안이군. 유빈은 동그랗게 뜬눈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하늘과 시아에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늘이 관련 문제로 1학년 때부터 가까이 있던 그가 지금까지 안전했던 이유. 그것은 바로 근처에서 침을 질질 흘리던 광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변의 남학생들이 우르르 끼어들어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이럴 거면 내가 멱살잡혔을 때도 말려주지 그랬냐. 워낙 갑작스러워서 그랬겠지만 유빈으로서는 그런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용히 나는 모르는 일이라는 태도로 인파를 빠져나온 유빈은 천천히 교무실로 향했다. 제발 어머니한테는 알려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괜찮아?"

"유빈아!"

하늘과 시아가 잰걸음으로 따라붙었다. 어쩐지 대면대면한 분위기에 유빈의 인상이 와락 일그러졌다. 제가 다 불편했다.

"맞은 것도 아니니까 문제없어. 아무튼 이럴지도 모른다고 예상은 하고 있었으니까. 진짜 올 줄은 몰랐지만."

"나 때문이지?"

하늘이 그렇게 물었지만 유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은 잔혹한 게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대답은 되었다. 하늘은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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