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내 인생은 빌어먹을 블랙 코미디야. 잊은 적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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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늘은 지금까지 따돌림은 당했을지언정 괴롭힘을 당한 적은 없었다.
따돌림이 괴롭힘이 아니라는 말은 아니고, 직접 공격받은 적은 없다는 의미였다.
지난 학창 시절동안 친구가 없던 적은 몇 번 있었다. 그치만 그 이상의 무언가를 당한 적은 없었다.
그녀의 외모는 모종의 벽을 만든 원인이었으면서도 동시에 그녀를 지켜 주는 벽이었다.
친구가 없을 때도 외롭다고는 생각했지만, 그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기간으로 따지면 3개월 정도에 불과했고 그 후로는 싫어도 들러붙는 인간군상들 때문에 오히려 교제에 지쳤다.
1학년 때는 시아와 반이 달랐고 친구가 된 것도 2학기부터였다. 그래서 그녀는 사건의 개요는 알았지만 시아가 겪었던 일들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반 전체에 만연한 불편한 공기. 따끔따끔한 시선이 반의 한구석으로 몰려 있었다.
하늘은 마치 바늘에라도 찔린 것처럼 몸을 떨었다. 정작 시선이 향하는 시아는 미동도 하지 않고 책을 읽고 있었다.
만약 저 자리에 있는 것이 자신이었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빼어난 외모 때문에 시선을 끄는 일이야 자주 있었지만, 그 종류가 달랐다.
경계, 적의, 관심.
시아는 어떻게 멀쩡한 걸까. 그녀는 마치 이 교실에 있는 것이 자신 뿐이라는 듯이. 정확히는 자신과 유빈 뿐이라는 듯이 행동했다.
지금도 옆자리에 있는 유빈의 옷자락을 꾹꾹 잡아당기면서 말을 걸었다. 어쩐지 둘 사이의 거리감이 조금 가까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착각일까?
누구에게나 살갑고 싹싹한 귀여운 친구. 문득 지금은 이를 악물고 애써 평온을 가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얕보였다간 끝이었다. 한계까지 몰린 관심은 안개 너머의 실체가 연약한 소동물이라는 것을 알아챈 순간 흉포한 짐승처럼 물어뜯을 것이다.
호기심은 순식간에 조롱과 비웃음으로 변할 것임에.
겪어본 적이야 없지만, 그 광경은 쉬이 상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생각하기에 시아는 악의에 맞서 이겨 낼 만큼 강하지 않았다.
하늘이 한 일 때문에 시아가 울기라도 한다면, 누가 탓하는 것 이전에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을 것이었다.
일단 이 상황의 원인을 설명하고, 사과해야했다. 해결 방법을 찾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이후의 일이었다.
그래, 사과해야 했다.
오늘은 목요일이었고, 시아는 유빈과 함께 도서관에 가는 날이었다. 즉, 점심시간에 찾아가서 방해를 했다간 두 배로 화를 낼지도 몰랐다.
가능하다면 종례 이후. 혹은 내일 낮. 조용한 곳에서 진심 어린 태도로.
잘못을 인정 못 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게 그냥 넘어갈 수 있을 만큼 작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용서받지 못 할지도 모르지만 그게 사과하지 않을 이유는 되지 않았다.
째깍째깍 시각은 가는데 점심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다. 친구들의 말도 건성으로 흘려넘기며 멍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
평소에도 그리 귀 기울이지 않았던 수업은 머릿속에 하나도 남지 않았다.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어쩐지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친구들의 걱정.
그러나 그 친구들도 결국에는 하늘에게 들은 이야기를 다시 퍼트린, 말하자면 2차 전파자가 아닌가. 하늘로서는 야속하게 느껴졌다.
비밀이라고 했는데.
하지만 비밀은 입 밖에 낸 시점에서 반쯤은 비밀이 아닌 법이었다. 그리고 방심과 안이함은 사고를 불러오는 주된 이유 중 하나였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다들 숙제 제대로 해와라."
"차렷. 경례."
종례 종이 울리고, 당장에라도 시아를 불러세우려던 하늘은 반쯤 일어나다 만 엉거주춤한 자세로 얼굴을 와락 구겼다.
임진우. 그 녀석이 유빈과 시아를 끼고 무언가를 시끄럽게 짖고 있었다.
저기에 끼어들어서 시아만 빼가려 했다가는 제 호기심에 끈적하게 달라붙는 임진우 때문에 씨름만 한 세월은 해야 할 것이었다.
일단 임진우가 가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저 들개 같은 양아치만은 조심, 또 조심해야 사고를 피할 수 있었다.
하는 수 없었다. 저 맘에 드는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화상은 말도 많았다. 딱 봐도 시아의 심기가 점점 불편해지는 것이 사과하기 좋은 타이밍이라고는 죽어도 생각할 수 없었다.
인생에서 도움이 안 돼요, 저 녀석은!
어떻게 하지? 사과는 내일할까?
하지만 때를 봐가면서 하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 사과일까. 어떻게 되든 지금 당장 가서 고개를 숙이는 게 올바른 자세인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은 하면서도 임진우를 앞에 둔 몸이 제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하늘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생리적으로 무리.
안 그래도 떼어내질 못해서 열불이 나는데 굳이 접근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른 거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사과를 했겠는데 임진우 만큼은 예외였다.
"...사과는 내일 하자."
앞으로도 한참을 떠들 것 같은 세 사람을 뒤로하고 하늘은 교실을 나섰다. 유한이랑 피씨방을 가기로 약속한 터라 여유 시간이 없었다.
하루, 그래. 고작 하루였다. 사과가 하루 밀린다고 세상이 멸망하는 것도 아니고.
그녀는 가슴 한 켠이 불편하게 쑤시는 것을 애써 참으며 걸음을 옮겼다. 정문을 나서자 저만치에서 두 팔을 흔드는 골든 리트리버 한 마리. 날씨는 쓸데없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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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냐? 애들이 엄청 떠들던데."
다가온 진우가 대뜸 그런 말을 던졌다.
"뭘?"
"너 말이야. 시아랑 같이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 소문이 돌면서 너도 언급되고 있다고."
"솔직히 말하면 엄청 거슬리지."
유빈은 귀가 좋은 편이었다. 교실 내에서 하는 이야기는 조금만 신경 쓰면 다 들렸다.
구석에서 자기들끼리 쑥덕거리거나 교실 밖에서 이야기한다면 차라리 양반이었다. 같은 교실 안에서, 듣기 싫어도 들릴 만한 성량으로 낄낄거리는 게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불편했다.
그 녀석들도 악의는 없었다. 단지 남을 소재로 떠드는 게 즐거울 뿐이었다. 그걸 세간에서는 일종의 괴롭힘이라고 보지만 자각은 없을게 뻔했다.
이 임진우도 옆에 시아가 앉아 있는데 이런 이야기부터 꺼내는 것을 보면 몰지각한 인종 중 하나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시아는 네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한숨 한번 내쉬고 넘어갔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는 법이었다.
"여우한테 홀렸다는 소릴 진심으로 하는걸까? 어이가 없어서 원."
아주 악질적인 소문에 따르면 두 남자를 농락하던 악녀가 위기에 몰리자 택한 방패막이. 그런 식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단짝인 두 사람을 봐 온 같은 반의 친구들은 대부분 웃어넘길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어딜 가나 과몰입하는 이상한 녀석들은 있기 마련이었다.
그래, 저번에 시아에게 정면으로 시비를 걸던 그 여학생이라던가.
유빈은 어지러운 머리를 붕붕 흔들었다.
"왜 그래?"
"현기증. 좀 어지럽네."
"좀 쉬어가면서 하라니까. 어젠 몇 시에 잤냐?"
"2시."
기상이 7시라는 것을 생각하보면 수면 시각은 5시간 정도. 한창 자랄 청소년에게 충분한 시각은 아니었다.
"어떻게 할 거야?"
"뭘."
"작년처럼 해결할 수는 없어?"
"못해. 내가 무슨 재주로.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작년에 내가 한 조치들이 잘 먹힌건 운이 좋았던 것뿐이야."
유빈은 경찰에 신고하는 것까지 시야에 넣고 있었다. 마침 학교 폭력의 심각성이 대두되고 있던 시기라면 조용히 묻히거나 솜방망이 처벌로 끝날 가능성도 적었다.
"내가 애들한테 몇 마디 한다고 바뀌는 것도 없을 거야. 선생님께 말씀 드리면 오히려 문제가 다른 방향으로 튈 수도 있어. 지금은 작년이랑 다르게 이야기만 나오고 누가 시아를 괴롭히는 것도 아니잖아. 지금 할 수 있는 건 소문이 잠잠해질 때까지 가만히 있는 것뿐이야."
현실은 주인공이 멋지게 활약하는 소설이나 영화랑은 달랐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극히 한정되어 있고, 지금은 아무런 방도가 없었다.
만약 이 녀석이 당사자였다면 어땠을까? 유빈은 집에 가기 전에 농구라도 하자는 원수를 흘겨보았다. 대화하는 중인데 손가락 끝에서 농구공을 돌리다가 떨어트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진짜 한대 치고 싶네.
분명 그날로 유혈사태가 벌어지고 문제는 해결되었을 것이다. 더 큰 문제가 발생했을지도 모르지만.
구급차에 대여섯 명이 실려 나가는 광경이 눈앞에 선했다. 저 미친놈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성격이 더러운데 힘도 쎘다.
그리고 방금도 분명...
"오늘은 패스. 학원 숙제가 좀 남았거든. 집 가서 끝내둬야 제시간에 잘 수 있어."
"그래? 어쩔 수 없지. 시아 너는?"
"농구 싫어."
철벽과도 같은 거절. 귀엽게 싱긋 웃으면서도 단호한 대답이었다. 오늘도 가면은 완벽했다.
진우는 혀를 차더니 농구공을 요란하게 튕기며 교실 밖으로 사라졌다. 곧 들려오는 교사의 호통. 드리블이라도 하다가 걸린 모양이었다.
"나도 이제 가야겠다."
한참은 남은 영어 숙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교과서는 전부 사물함에 있으니 어깨를 짖누르는 것은 온전히 숙제의 무게라. 저절로 표정이 흐려졌다.
꾸욱.
"왜?"
"......"
일어난 유빈의 옷자락을 잡아당긴 건 애교 만점의 미소를 뿌리는 시아였다.
"저어기, 혹시 집에 가는 길에 카페라도 들리지 않을래?"
상대적으로 키가 작아 치켜뜬 눈(물론 노렸다). 소매를 잡아당긴다는 소극적이면서도 살짝 수줍어보이는 행동(이것도 노렸다). 발랄하면서도 머뭇거림이 묻어나는 목소리(당연히 노렸다).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게 슬픈 남자의 생리. 뱀을 앞에 둔 두꺼비는 그 자리에서 덜컥 돌처럼 굳었다.
다음 순간에 꿀꺽 집어삼켜질 것이라는 강렬한 예감. 하지만 이미 붙잡힌 그가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안 될까? 응? 유빈아."
어질어질했다. 이게 평소의 현기증인지 아니면 당분 과다한 목소리를 투입당한 탓인지. 유빈의 눈동자가 불안 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숙제 해야 하는데. 다 못하면 어머니한테 박살 나는데.
하지만 오늘 같은 날에 정서적으로 위안을 받고 싶다는 시아를 내버리는 짓을, 유빈은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되니까. 숙제하고 있어도 상관없으니까. 으응?"
꾸며낸 말 뒤로 간절함이 스며들었다. 결국, 유빈은 떠오른 수만 가지 핑계를 한글자도 뱉지 못했다.
그래. 착한 아들, 착한 사람, 착한 친구가 되어야지.
그것은 그의 인생의 맨 꼭대기에 있는 전제이자 명령이었다.
거짓과 선함이 그의 입술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알았어. 가자."
"진짜?"
"그래, 숙제 해도 된다는데 그 정도야. 가는 길에 도서관만 들리자."
"응! 가자!"
종종걸음으로 가방을 챙긴 그녀가 약삭빠르게 유빈의 손을 잡아챘다. 저항할 틈도 없이 엮이는 손가락. 전날 보다 퍽 당당해진 기색이 역력했다.
사람이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은 다 거짓말인 게 분명했다. 유빈은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푹 숙여야 했으니까.
사람을 돕고 위로하는 일은 올바른 일일 터. 유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그에게 운명처럼 놓인 위선(?)을 제외하더라도.
그는 그녀는 내버려 둘 수 없었다.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곤 곁에 있는 것뿐이었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길게 위로한 두마디를 건네는 것이 그의 역할이 아니겠는가 싶었다.
비록 그것이 다소 음흉하고, 어쩌면 까만색에 가까운 마음에 의한 것이라도. 그 또한 시아가 원하던 것이었다.
결국, 유빈은 그렇게 생각했다. 시아가 귀여운 게 문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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