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로망은 로망으로 남는 이유가 있다
* * *
깜빡.
눈꺼풀이 한번 닫혔다 열렸다.
옆칸에서 들려오는 웅성임, 낯설지만 푹신한 쿠션의 감촉.
자다가 깬 것치고는 맑은 정신이 노곤한 몸을 자각했다.
이렇게 근심 없이 잔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네.
마음 편히 있는 것도 오늘내일까지였다. 지금 만끽해두어야 했다.
하지만 만화카페까지 와서 잠만 자기는 아까운 일이었다. 밀려오는 졸음을 참지 못한 것은 둘째 치고, 조금 자기는 했으니 다시 만화를 봐야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후에야 유빈은 뺨을 갈아버릴 듯 진하게 꽂히는 시선을 알아챘다.
몸을 옆으로 돌리자 마치 거울을 보는 듯 시아가 같은 자세로 마주 누워있었다.
좀 가까운 것 같은데. 유빈은 울렁거리는 속을 꾹 눌러참았다.
"...시아야?"
"응?"
"나 얼마나 잤어?"
"30분 정도."
피로가 좀 풀린것에 비해 잔 시간은 길지 않았다.
"넌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어?"
"30분 전부터."
세상에. 이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고도 그다지 놀라지 않은 스스로가 가장 놀라웠다.
"뭐 보기 좋은게 있다고."
"난 충분히 볼만 한 것 같은데."
"그러십니까."
취향이야 천차만별이고 개인적인 감상에 대고 옳고 그름을 따져봐야 의미가 없었다. 유빈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자기 외모가 못난 편이라고 생각했다.
짙은 다크써클에 날카로운 눈매. 종일 책상 앞에만 앉아 있다가 굽은 등과 목. 키도 큰 편은 아니었다.
대놓고 못생기진 않았지만 평균 아래. 퍽 냉정한 자평이었다.
하긴 시아에게 외모가 그렇게 중요한 기준은 아니겠지만.
"더 잘래?"
"아니. 일단 만화를 더 읽긴 해야지."
"더 잘래?"
"그래도 돈은 냈으니까..."
"더 잘래?"
"...자라고?"
얘는 나한테 뭘 바라는걸까. 일단 알았노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나아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피곤하고 졸린건 마찬가지였다.
슬쩍 눈을 감았더니 앞에서 몸을 일으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머리맡으로 움직이는 발소리.
"쿠션 뺄게?"
"뭐?"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보다 먼저 머리를 받쳐주던 것이 쓱 빠져나갔다. 반사적으로 목에 힘을 줘서 바닥에 머리를 박는 것은 피했지만 당황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유빈이 혼란으로 굳어 있는 사이, 시아는 재빠르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살며시 손을 뻗어 동갑내기 남학생의 머리를 틀어쥐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무릎부터 허벅지를 그 아래로 밀어넣었다.
그랬다. 무릎베개. 로맨스 코미디의 정석. 시아가 최근 플레이한 연애 시뮬레이션에서도 5 작품당 3작품 정도는 등장하는 이벤트였다.
자고 있는 유빈의 옆에 누워서 15분은 멍하니 있었고 15분 정도는 이걸 해도 되나 고민하며 보냈다. 결론, 해도 된다.
아까는 손도 잡았고, 지금 분위기도 나쁘지 않은데다가 둘 뿐인 사실상의 밀실. 자느라 정신이 덜 깬 유빈이라면 이 정도는 허용하고 넘어갈 가능성이 높았다.
이건 틀림없는 기회였다.
"어때?"
기대감인지 부끄러움인지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이 까슬한 뒷머리에 닿은 부분으로부터 천천히 퍼져나갔다.
조금 악셀을 밟은 감이 없진 않지만 이 정도는 평범한 범주일 터. 다른 친구들의 끈적하고 가끔은 질척하기도 한 연애담을 떠올려보면 그리 심한 것도 아니었다.
"선생님, 얼굴을 못 보겠어요..."
"응? 어째서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그가 나지막히 신음을 흘렸다. 평소처럼 무덤덤한 모습을 가장하려는 시도도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여자친구 한번 사귀어 본 적이 없는 쑥맥에게는 이 상황 자체가 자극이 너무 강했다.
시아는 기대대로의 모습에 만족스러운 미소로 유빈의 손을 툭툭 건드렸다. 얼굴을 가리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정작 자신의 두 뺨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어떻게 자라는거야."
"못 자겠어? 불편해?"
"아니. 불편한건 아닌데."
무릎 조금 위 정도의 길이인 교복 치마 아래로 새하얀 맨다리. 살짝 드러난 허벅지가 뒷목에 맞닿아 있었다.
불편하고 자시고 그냥 부끄러웠다. 뒤통수로 느껴지는 인간의 온기란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으니.
확실히 저돌적인 그녀의 어필은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기뻤다. 지금도 부끄럽고 낯뜨거워서 그렇지 그녀의 호의는 기분이 좋았다.
설령 그것이 일반적인 남녀의 감정과는 다소 동떨어진 것일지라도 그를 좋게 봐준다는 의미였다.
지금 가진 이 유대감과 친밀감이 어떤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약속대로 그녀와 연인이 되는 것이 그리 먼 일은 아니라는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그게 싫지 않았다. 가랑비에 옷젖듯, 그는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기우는 자신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잠들지 못하고 얼굴만 가린채 잠시. 살며시 유빈이 손을 떼자 거꾸로 보이는 시아의 얼굴이 묘하게 불편해 보였다.
마치 무릎 꿇고 앉았다가 다리에 쥐가 난 것 같은 표정. 어쩐지 움찔거리는 허벅지. 그러고보니 인간의 머리통은 상당히 무거운 물건이었다.
"다리 저리구나?"
"윽."
체구가 작고 가늘은 시아가 무릎을 꿇고 앉은채 남정네의 머리까지 위에 올려뒀으니 그야 저릴 만도 했다. 이제는 숫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안마 배게도 아니고. 유빈은 슬며시 머리를 내리려고 했으나 시아의 양 손이 머리를 붙잡았다.
"아냐. 괜찮아."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오기일까. 그녀는 비장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유빈은 그런 그녀의 억지를 들어 줄 생각이 없었다.
피가 안 통하는 상태로 오래 있어서 좋을리 없었다.
"얍."
"갸아!"
머리를 살짝 들었다 내려놓자 그녀는 저림을 참지 못하고 몸부림쳤다. 고통을 호소하며 쑥 빠지는 그녀의 다리. 유빈은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으으. 허벅지가..."
"무릎을 꿇고 앉았으니 그야 그렇게 되겠지.
"분하다."
"뭘 분하기까지 해."
"흥. 다음에는 이렇게 못 넘어갈거야. 각오 하라구."
"예, 예."
잠기운은 이미 달아난지 오래였다. 읽던 만화를 다시 펼친 그의 옆에 시아가 와서 앉았다. 거의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수준이었다.
한마디 할까 하던 유빈은 그냥 만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아까의 무릎배게를 생각하면 새삼스러웠다.
어쩌면 이것까지 노린걸까? 유빈은 쓰게 웃었다.
#
소문이란 건 순식간에 타오르고, 또 순식간에 사라진다.
작년에 시아를 중심으로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들은 유빈이 취한 몇가지 조치로 인해 과거에 묻혔다.
그것이 완전히 잊혔다는 뜻은 아니었다. 지금도 여전히 시아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고, 알게 모르게 뒷담이 오가는 것도 사실이었다.
단지 유빈과 시아가 함께 있는 동안 대놓고 언급하는 사람이 없어졌을 뿐이었다.
시아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이제는 반쯤 연인으로 공인된 유일한 이해자 하나에 지인 이상 친구 미만이 셋 이상. 이 정도면 학창생활을 보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어차피 이대로 1년쯤 지나면 모두의 머릿속에서 잊혀지고 당사자들만 더러운 기억쯤으로 여기며 열심히 씹어대고 말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잔불이라도 장작이 얹어지면 다시 타오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
새로운 떡밥이 던져진 호수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중간고사가 끝난 다음날. 시아는 직감했다.
누군가가 피라냐 떼 사이에 고깃덩이를 던졌다고.
여길 봐도, 저길 봐도 그녀에 대한 이야기로 수근수근수근수근.
반년전까지 매일 마주했던 광경이었다.
"어허. 이거 참."
유빈이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못하고 입매를 비틀었다. 해결했다고 하기에는 두꺼운 장막 하나 덮어씌운 것에 불과했다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게 이런 식으로 갑자기 튀어나올 일도 아니었다. 마치 다 꺼져가는 불에 기름을 부은 것 같은 상황 아닌가.
듣는 귀가 밝은 그로서는 상당히 불편했다. 듣기 싫은 소리 투성이었으니까.
"이거 어쩌지."
"뭘."
기분이 축 처진 유빈에 비해 시아는 태연했다.
"그냥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괜찮아?"
"괜찮아."
시아는 웃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이전처럼 절망적인 감정은 느끼지 않았다.
그때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은 적어도 한명은 있었다.
"이렇게 떠드는 거 이상으로 뭘 할 것 같지는 않으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
시아의 시선이 반 뒤편에 모인 3인조에게 잠시 머물렀다. 그녀가 자주 대화를 나누던 '친구'들. 그러나 지금은 시아에 대한 이야기로 여념이 없었다.
결국에는 이렇게 되나. 시아는 차갑게 가라앉은 기분으로 자리에 향했다. 잠시 달라붙었다가 떨어지는 시선들. 그녀는 자연스럽게 1년 전을 떠올렸다.
책상에 낙서도 없고, 사물함도 멀쩡하고, 다리를 거는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힘들면 힘들다고 매달릴 상대도 있었다.
의자를 뺀 시아는 천천히 책상 서랍 안쪽을 살폈다. 둘 모두 압정은 들어있지 않았다.
안전을 확인하고 앉은 시아의 눈이 자연스럽게 앞을 향했다. 긴 장발을 늘어뜨린 여학생 하나가 우울함을 뽐내듯이 의자 위에 찌그러져 있었다.
김하늘. 절세의 미소녀. 학교 내 부동의 인기랭킹 1위. 1년간 가장 고백을 많이 받은 여학생.
그런 그녀가 저렇게 축 처져 있는 것은 사실 자주 있는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고백을 받았거나, 임진우가 이상한 짓을 했다면 곧잘 책상에 머리를 박고 괴로워하곤 했다. 그러니 지금 저런다고 딱히 놀라울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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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하늘은 지금 죽을 맛이었다. 피라냐들에게 고깃덩이를 던진건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였기 때문이었다.
오해가 생길까봐 최대한 객관적으로, 혹은 주관적으로 시아의 편에서 이야기를 꺼냈었는데 돌아온건 반 내에 만연한 출처 불명의 뒷담 파티였다.
이제와서는 친구들을 탓할 수도 없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작년 쯤에 유빈이 시아에 대한 이야기는 가능한 한 꺼내지 말자고 이야기 했던게 떠올랐다.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봐도 마땅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는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느끼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싸우거나 절교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었고 격하게 사이가 틀어진 이후로 화해를 할 수 있었던 친구는 한 손에 꼽았다.
그녀가 원인이라는 것을 시아가 알게 된다면 아무리 사근사근하고 싹싹한 시아라도 화를 낼 것이 분명했다.
난 그냥 시아를 도와주고 싶었던 것 뿐인데.
이미 퍼져버린 소문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이미 진실이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하늘이 최대한 편파적으로 알린 정보 덕분에 구설수에는 올라도 그 분위기가 험악하지 않다는 정도. 하지만 작년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낙관할 수는 없었다.
작년에도 우호적인 여론은 있었다. 악의적인 이야기를 퍼트리는 네 학생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단순한 헤프닝으로 끝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하지?
유빈이 어떻게 문제를 해결했는지도 정확하게 아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가능한 한 주변에 아무것도 알리지 않으려고 했다.
지금와서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유빈이 해결한 문제를 다시 끄집어 냈다면 적어도 그녀 자신이 해결하는 것이 최소한의 도리일 터였다.
유빈, 시아를 제외하면 그녀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상대는 많지 않았다.
그녀는 반드시 이 상황을 해결하리라 굳게 다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까지 도움 받은게 얼만데 이대로 잘못을 저지른 채로 모른척 넘어갈 수는 없었다.
일단은 사과를 해야했다. 경솔하게 문제를 만든 행동에 대한 사과.
"자리에 앉아라."
"네."
...수업이 끝나면. 꼭 사과해야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