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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원수)를 다루는 바람직한 방법-28화 (28/31)
  • 〈 28화 〉 만화카페는 정말 자기 좋다(경험담)

    * * *

    "......"

    중간고사 3일차.

    마지막 시험 종료를 알리는 벨소리에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터져나왔다.

    "조용! 시험지 걷을 때까지는 아직 끝난거 아니야!"

    쾅쾅. 지시봉으로 칠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곤히 잠들어있던 유빈의 의식을 일깨웠다.

    시험이라는 건 사실 수험자에게 굉장히 불합리한 구조로 이루어져있다.

    시험을 대비하기 위해 유빈이 들이는 기간은 최소 2개월. 제대로 몰두하는 기간만 따져도 1개월이다.

    그에 반해 시험을 보는 것은 대게 3일. 그마저도 각 하루마다 3시간 정도. 들이는 시간에 비해 쓰이는 시간이 말도 안되게 적다.

    그렇다고 결과가 항상 노력한 만큼 나오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실수 한번에 지난 2개월이 아무런 가치도 없었던 시간이 되어버린다.

    그런 구조 자체가 수험자에게 스트레스로 작용하고 긴장을 유발한다. 긴장을 할 수록 실수를 할 확률은 올라가서 악순환이 계속되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설령 한번 결과가 잘 나와도 그건 1년에 4번 있는 시험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1년은 3번 있지. 평가는 얼어죽을. 그냥 다 뒤졌으면 좋겠다."

    마침 시험지를 내고 유빈에게 다가가던 시아가 고개를 살며시 흔들었다. 스트레스에 성격이 날카로워진 건 알겠지만 살의에 가득차 있는 걸 보니 완전히 정신력이 떨어져 있는 모양이었다.

    이런걸 인간성 고갈이라고 하던가. 시아는 얼마 전부터 보기 시작했던 유튜버의 유다희 챌린지를 떠올렸다.

    "어때? 잘 봤어?"

    "몰라. 이젠 내 알바 아니야. 망하든 말든 성적 나올때까진 그냥 잊을래."

    어차피 결과가 나올 때까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도 없긴 했다.

    "오늘은 학원 없는거 맞지?"

    "어."

    시험 종료 당일에는 쉬었다. 일반적으로는.

    이전에는 진우에게 선수를 빼앗겼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시험 기간의 유빈은 무지막지하게 신경질적인 존재. 그 막돼먹고 후안무치한 임진우조차 이 기간에는 유빈에게 필요 이상으로 접촉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시험이 끝난 이 순간이라면 그녀가 중2병 스포츠맨보다 빨랐다.

    "그럼 오늘은 나랑 놀자."

    지칠대로 지친 유빈은 거절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카페에서 음료라도 사주겠다고 권유하면 75%의 확률로 넘어오긴 할 것이다.

    남은 25%는 수면욕구가 상정 이상으로 비대해졌을 경우였다.

    이야기를 듣자하니 최근 일주일은 평균 4­5시간 밖에 자지 못했다는 모양이라 처음 한번은 거절당할게 분명했다.

    허니 토스트도 사준다고 하면 따라오지 않을까?

    사탕으로 어린아이를 꼬시는 수상한 아저씨가 된 기분이었다.

    낚여라~ 낚여라~ 하고 머릿속에서 텔레파시를 보내고 있던 그때, 유빈이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

    "오?"

    아직 뭐 사준다는 말도 안 꺼냈는데 한번에 승낙이 나왔다. 솔직히 의외였다.

    "왜. 네가 가자며."

    "피곤해 보이니까 거절할 줄 알았지."

    "그래, 피곤해."

    지금도 시험이 끝난 해방감은 흔적도 없고 끈적한 피로가 눈꺼풀을 잡아누르고 있었다.

    "그래도 그건 집 가서 일찍 자면 되는 일이고. 오늘 정도는 나도 놀고 싶으니까."

    정말일까? 매점도 안가고 쉬는 시간마다 기절하듯 잠드는 그가 '놀고 싶으니까' 잠을 자지 않는다?

    시아는 그 의문을 살며시 넘겼다. 유빈이 무슨 생각을 했든 결과가 좋으면 된 것이었다.

    만약 잠보다 그녀와 있는 것을 선택해 준 것이라면 그건 정말 좋은 일이고, 아니어도 상관 없었다.

    "그럼 가자. 카페갈래? 내가 살게."

    "진짜?"

    어차피 쓸데도 없는 용돈인데 못 사줄게 있을까. 데이트한다고 했더니 어머니가 노란색 지폐를 두 장이나 얹어줬다.

    "일단 일어나자. 진우가 오기 전에."

    그 녀석이 오면 유빈을 끌고 농구장으로 갈지도 몰랐다. 시아는 조심스럽게 진우의 자리를 살폈으나 드물게도 이미 자리에 없었다.

    "아, 진우는 이쪽에 안 와. 오늘 너랑 논다고 했... 아차."

    이미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주워담을 수 없었다.

    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녀는 유빈이 무조건 집에 가서 잘 생각밖에 없으리라 철썩같이 믿고 있었는데.

    "원래부터 나랑 놀 생각이었어?"

    "일단은."

    어색하게 눈을 피하며 뺨을 긁는 모습이 묘하게 달가웠다. 시아는 마음 한 구석에서 피어나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흐흥."

    "...뭐야."

    "흐흥."

    그럼 그렇지. 제아무리 철벽에 쑥맥인 홍유빈이라도 자신처럼 귀여운 여자애가 몇번이고 돌격하면 마음이 동하는게 당연했다.

    유빈이 상대를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게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닐테니까. 사람 마음이란게 그렇게 맘대로 되던가.

    "내가 말 안꺼내면 어쩌려고 했어?"

    "그러면 내가 말 했겠지."

    "꺄 적극적."

    "그거 가지고 적극적이긴 무슨."

    "좋아, 기분이다. 오늘은 특별히 먹을 것도 사줄게."

    "그건 좀 미안한데."

    "어차피 용돈 받아서 쓸 데도 없어."

    어쩐지 얻어먹기만 하는 것 같다. 유빈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조금 부담스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용돈으로는 카페에서 그 어떤 고형물도 먹을 수 없었다. 달마다 50%는 무조건 저축하도록 꼬박꼬박 확인하는 어머니가 있는 까닭에 원하는대로 사용할 수 있는 금액은 쥐꼬리만했다. 저축한 후에는 통장 내역도 주기적으로 확인하기 때문에 함부로 출금해서 쓸 수도 없었다.

    카페의 조각 케이크는 아무리 싸도 4000원 이상이고, 유빈의 소지 금액은 3000원 언저리였다.

    "음."

    그런 그의 슬프고 비참한 심정을 짐작한 시아는 다른 선택지를 제시했다.

    "그럼 그냥 카페 말고 만화카페 갈래? 시간 요금만 내가 낼게."

    "그래. 그렇게 하자. 미안."

    "미안하긴."

    유빈이 가난한 것은 이제와서 놀라거나 문제삼을 일도 아니었다.

    돈은 내가 내면 되지!

    집안의 귀염둥이인 그녀는 집안 행사 때마다 용돈을 주지 못해 안달이 난 친척들에게 현금공세를 받고는 했다. 덕분에 통장은 언제나 돈이 마를 날이 없었다.

    굳이 요구받지 않아도 버릇처럼 애교를 뿌리다보면 어느새 주머니는 가득. 따로 돈 들어가는 곳도 없다보니 쓰지도 않고 모으기만 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결국 유빈의 양심 뿐. 그 정도는 군것질에 굶주린 청소년의 허기를 자극하면 쉽게 무너트릴 수 있었다.

    "하늘이나 유한이는 뭐 한다고 했어?"

    "저번에 도주한 이후로 유한이는 진우를 피해다닌다더라. 오늘은 진우도 있겠다, 민재랑 PC방이나 가겠지. 한이는 자기 친구들이랑 놀거고."

    "진전이 없잖아. 재미없어."

    "신랄하네."

    하늘이에게는 과장 좀 보태 목숨이 걸린 문제라도 시아에게는 심심풀이로 꺼낼 정도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그녀는 본질적으로 하늘이를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단지 '조금' 친한 '몇 없는' 지인 중 하나라는 인식에 불과했다.

    정말 냉정하게 생각하면 하늘이가 진우를 완전히 끊어버리면 끝날 문제였다. 싸운 뒤에 화해하지 말고 연락처라도 지워버리면 된다. 스토킹이라도 당하면 경찰에 신고하면 된다. 그걸 못해서 일년 넘게 질질 끌고 있는데다 그 문제를 유빈에게 도움받는 꼴이 시아에게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유빈의 수고를 덜기 위해 가끔은 그녀가 푸념을 들어주거나 조언을 던져주기도 했지만 들을 수록 짜증만 났다. 겉으로야 싱그럽게 웃어주고 있지만 시아는 분명하게 말해서 하늘이 거슬렸다.

    힐끔. 하늘은 아직 자리에 앉아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작게 손을 흔들었다.

    짜증나.

    "자, 빨리 가자. 밍기적거리기에는 시간이 아까워."

    유빈의 손목을 잡아 끄는 모습에 교실 여기저기서 환호가 날아들었다. 휘파람을 부는 건 진우, '리얼충 죽어라'를 외치는 건 민재였다.

    예상치 못한 관심에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도 잠시. 유빈은 포기하고 이끄는 대로 끌려 걸었다. 어차피 교실을 나가니 시선은 순식간에 없어졌다.

    어쩐지 그녀가 바란대로 흘러가는 느낌이 들었지만 싫은 건 아니었다. 애초에 오늘은 반항할 기력도 없었다.

    만화 카페로 가는 와중에도 시아는 유빈을 놓지 않았다. 교문을 지날 때 쯤부터 슬금 슬금 손이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손목에서 손바닥을 지나 손가락이 얽혔다.

    손을 맞잡았다고 하기에는 헐거웠다. 하지만 놓치는 일은 없었다.

    땀으로 살짝 축축한, 긴장으로 차가워진 손의 감촉. 이걸 어쩌나 고민하던것도 잠시. 유빈은 그냥 살짝, 아주 살짝 맞잡아주기로 했다.

    매몰차게 손을 뺄 정도로 싫거나 불쾌한 것도 아니었다. 그간 꾸준히 거리를 좁힌 시아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손을 잡는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하고 유빈은 생각했다.

    다른건 다 재쳐 두고서라도 끌려서 가는게 그냥 걷는 것보다 편했다. 그는 지금 저어엉말로 지쳐있었으니까. 물론 이런 새콤달달한 상황을 난생 처음 겪어서 당혹스러운 감정도 있었다.

    카페에서 '약속'을 할 때도 접촉은 깊었지만 그때는 긴장과 걱정이 더 앞서서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그땐 뱀과 마주친 쥐였다면 지금은 저게 내 짝인지 고민하는 미어캣이라고나 할까.

    괜히 누가 볼까봐 주변을 둘러보지만 겨우 손을 잡는 정도로 두 사람을 주목할 일은 없었다. 이 시간에 하교하는 학생이 수십, 수백이었다. 눈에 띌 정도도 아니었다.

    부끄럽고, 당혹스럽고, 낯간지럽지만 그 아래에서 은근히 두근대는 즐거움이 있었다. 내가 이리도 감상적인 사람이었나. 유빈은 쉽게도 흔들리는 스스로에게 다소 허탈함을 느꼈다.

    학교 근처에 위치한 만화 카페로 들어간 두 사람은 계산대 앞에 선 후에야 조심스럽게 손을 놨다. 그때까지 말 한마디는 커녕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평일 종일권이면 되겠지?"

    "어."

    시험이 끝난 날, 그것도 학교 근처의 만화 카페였지만 안쪽은 상당히 한산했다. 생각해보면 피씨방이나 노래방을 간다는 친구는 많이 보였지만 만화 카페를 간다는 사람은 못 봤다.

    각자 음료를 들고 커튼으로 구분된 방으로 들어가니 푹신한 쿠션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바닥은 약간 말랑한 매트가 깔려 있었다.

    "오."

    어느새 책이 꽂힌 서가까지 다녀온 시아는 기다란 쿠션을 끼고 업드렸다. 뽑아 온 것은 얼마 전에 플레이한 미연시가 원작인 만화. 반가운 제목이 시선을 끄는 바람에 무심코 집어버렸다.

    너무 매니악한가?

    시아가 슬쩍 유빈을 살폈지만 별 반응은 없었다. 제목과 그림체를 보긴 했는데 딱히 신경쓰는 기색은 없었다. 서브 컬쳐 계열에 혐오감이 있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기우였던 모양이었다.

    하긴 유빈인데. 묘한 안심감에 시아는 마음 놓고 만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사락, 사락, 사락.

    조용한 가운데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만 들렸다. 독서 속도가 남다른 유빈은 옆에 대여섯권씩 쌓아뒀다가 20분도 안돼서 다 읽곤 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시아가 문득 고개를 드니 유빈이 바른 자세로 누워서 자고 있었다.

    "......"

    잠시 깨울까 고민했지만 일단은 내버려 두기로 했다. 아까 손까지 잡은 상대를 옆에 두고 잠이나 자고 있는게 조금 열받기는 했지만 그만큼 피곤했을 것이다.

    깨우는 대신, 시아는 옆으로 두 바퀴 굴렀다. 부쩍 가까워진 얼굴은 긴장이나 두근거림 대신 죽은 듯한 고요를 느끼게 만들었다.

    안경도 벗고 배 위에 손을 올린게 영락없이 관에 누운 것 같은 모습. 설마 죽은 건 아닌가 하는 실없는 생각에 슬쩍 손을 뻗어 유빈의 가슴에 올렸다.

    고르게 오르내리는 가슴과 작지만 분명히 뛰는 고동이 거기에 있었다. 깨어날지도 몰라 천천히 손을 떼는 동안에도 유빈은 미동도 없었다.

    "...치."

    조금은 의식해줬다고 생각했는데.

    물론 만화 카페에 온 이상 만화책을 읽는건 당연한 일이었다. 대화가 없다고 화를 내거나 기분이 상할 것이었다면 억지로라도 카페나 공원에 갔어야 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대놓고 자고 있는 것을 보면 야속하면서도 안타까웠다. 아직 고등학교 생활이 반 넘게 남아있었다. 그의 지옥도 그만큼은 남아있었다.

    나는 그를 조금이라도 즐겁게, 편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인가. 자문에 대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읽던 만화의 존재도 잊은 채 옆에 나란히 누운 그대로. 제멋대로 뻗은 손이 유빈의 옷자락을 만지작거는 것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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