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중간고사 2일차(과거)
* * *
언제였을까. 그와 친해지고 얼마 되지 않았던 무렵 물어본 적이 있었다.
힘들잖아. 왜 도망치지 않는거야?
당장이라도 죽겠다고 곡소리를 내면서도 가출 한번 해본 적 없다던 그. 물음에 대한 답은 곧 돌아왔다.
그것도 결국에는 도망칠 용기가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거야
그때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용기라는 건 맞서 싸울때나 필요한 것이 아닌가?
결국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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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는 건 없다. 그렇게 생각 했었다.
도대체 왜 변하는거지.
"차렷, 경례!"
교사가 나가고 쉬는 시간이 찾아왔다. 그런데 아무도 그녀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몇명씩 와서 시시덕거리며 그녀를 위협하곤 했는데.
자리를 바꾼 후부터 괴롭힘이 확 줄었다. 정말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복도에서 발을 걸거나 비웃고 낄낄거리는 사람들은 여전히 종종 있었다. 그러나 책상 서랍의 물건이 없어지거나, 책상에 낙서가 되어 있는 일이 없어졌다. 그녀의 자리까지 직접 와서 뭐라고 하는 경우도 없어졌고, 자리를 벗어나지 않으면 최소한의 안전은 보장되었다.
사실 짐작가는 이유가 없지는 않았다. 지금도 옆자리에 앉아있는 유빈의 존재였다.
뭐가 그리 마음에 안드는지 한숨을 푹푹 쉬어가며 문제집을 푸는데, 오전 오후 내내 자리에서 일어나는 법이 없었다.
화장실도 안가고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안하는데 주변 친구들이 자연스럽게 그 옆에 와서 떠들고 가곤 했다.
가만히 보고 있었더니 시선을 느낀 유빈이 고개를 들었다. 마주치는 눈동자. 언외로 '왜?'라고 물어보는 듯해서 시아는 슬쩍 고개를 저어주고 시선을 돌렸다.
다른 사람의 책상서랍을 뒤지려는데 옆자리에 모범생이 앉아있으면 당연히 껄끄러워진다.
시비를 걸려고 왔는데 옆자리에 모범생이 앉아있으면 당연히 망설임이 생긴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그 옆에서 단단한 체격의 스포츠맨이 떠들고 있다면 더더욱.
시아가 보기에 저 임진우라는 남학생은 유빈 이외에는 친구가 없는게 분명해 보였다. 아니라면 어떻게 매 쉬는시간마다 빠짐없이 옆반에서 유빈을 찾아오겠는가.
하는 말을 듣자하니 말도 거칠고 행동도 영락없는 양아치인데 어쩌다 저런 녀석과 친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그 두 사람이 옆에 있다보니 그녀를 향한 괴롭힘은 그 수위가 순식간에 낮아졌다.
"야, 어쩌지?"
"뭘 어째! 쟤네 없을 때까지 기다려!"
"나 유빈이랑 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는데, 어지간하면 자리에서 안 움직이더라. 진짜 공부벌레야."
"레알?"
"점심에는 다른 애들이랑 농구나 배드민턴을 하긴 한다는데... 곧 중간고사잖아. 화장실 갔다 오는게 아니면 꿈쩍도 안할걸?"
"진짜 공부 열심히 하나보네."
구석에서 쑥덕거리던 그들은 질린 눈빛으로 유빈을 응시하다가 곧 흩어졌다. 당장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소문에 의하면 남자 두 명을 가지고 놀다가 버린 희대의 악녀 윤시아에게 합당한 벌을 준다. 그게 그들이 생각하는 자신들의 역할이었다.
우등생에 모범생이고, 선생님들에게 관심을 받는 홍유빈을 건드리는 것은 그 범주를 벗어나는 일이었다.
공부를 하면서, 그리고 진우의 이야기를 흘려 들으면서도 그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유빈은 코웃음을 쳤다.
왕따를 만드는데에 참 거창한 이유까지 가져다 붙이고 계십니다들, 그려.
유빈은 진상을 하나도 모른다. 시아와 친한 것도 아니고, 얼마 전에 차인 두 남학생들이랑은 얼굴 마주치면 인사를 건낼 뿐인 정도.
그런 그 둘을 짝사랑하던 두 여학생에 이르러서는 이름도 모른다. 자신과 교류가 없는 상대에 대해서는 깊이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홍유빈이라는 인물이었다.
도움을 청하면 돕는다. 물어보면 답한다. 그러나 그래도 이름은 모르는 경우가 있었다.
담백하고 간결하게, 하지만 친절한 태도에 '쿨하다'라는 평가가 붙곤 했다.
"이걸로 적당히 잠잠해지면 좋겠는데."
시아는 모르겠지만 유빈이 이번 자리 바꾸기에서 시아의 옆자리로 정해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선생님이 제비뽑기를 통해 정하는 이 자리 바꾸기, 임의성이란건 결국 담임 교사가 공정하다는 전제 하에서나 보장되는 것이다.
지난 주. 유빈은 아무도 없는 시간을 노려 교무실을 방문해 교사에게 현재 시아의 상황을 우회적으로 전달했다.
'주변 친구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다.'
'친해지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많이 힘들어 보인다.'
'도와주고 싶으니 옆자리에 앉을 수 있으면 좋겠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세 가지 있었다.
첫째로 유빈에 대한 교사의 신뢰도가 꽤 높았던 것. 매 수업마다 성실하게 참여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니까.
만약 다른 학생이었다면 친구 옆자리에 앉으려고 꼼수 쓰는거냐고 욕이나 먹었을 것이다.
둘째로 정말 유빈이 말한 것 같은 문제가 있다면, 혹은 왕따나 따돌림, 괴롭힘 문제가 발생했거나 발생하려고 하는 것이라면 그건 반드시 막아야 하는 일인 것.
만약 피해 학생이 버티다 못해 경찰에라도 신고한다면 담임 교사인 그녀는 책임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유빈이 해결할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세번째. 교무실에 흐르고 있는 묘한 소문.
그녀가 맡고있는 반의 한 여학생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소문이 은근히 흐르고 있었다.
의미심장하게도 그 여학생의 신원은 특정되지 않은 채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봤다는 두루뭉술한 소문.
교사는 만의 하나의 경우를 대비해 유빈의 청을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유빈의 의도 대로였다.
그는 친구들 사이에 슬쩍 윤시아에 대한 이야기를 흘렸다. 그리고 지나가듯이 선생님들께 알리는게 좋지 않을까 일러 두었다. 자연스럽게 소문은 학생들과 교사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사람은 본래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옳다고 믿는다. 그렇게 취해 있는 환각에서 벗어나려면 외부의 충격이 필요했다.
내가 지금 누군가를 괴롭히고 있는데 '누가 누구를 괴롭힌다'라는 소문이 돌면 누군들 찔끔 반응할 수 밖에 없다.
당장은 옆자리에 앉아서 억제하고 있지만 이것도 미봉책에 불과했다. 결국 이 문제는 괴롭힘을 그만둘 때까지 멈추지 않을테니까.
이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었다.
그래도 조금 편안해진 듯 한 시아의 표정. 교사한테 부탁하는 모험을 한 보람은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네."
뭐든 흐름이 끊기면 다시 시작하는 것은 불편해진다. 이렇게 한번 막아 뒀으니 다음에 자리가 바뀌더라도 괴롭히는 사람들은 예전같지 않을 것이다.
자기 살기에 바쁜데 당사자도 아닌 사람들이 계속 나설 정도로 열정적일 리 없었다.
이제 그가 할 일은 없었다.
"뭐가?"
"응?"
무심코 내뱉은 혼잣말에 옆자리에 앉은 시아가 물었다. 의자 째로 몸을 돌려 유빈을 향해 있었다.
"뭐가 다행이야?"
"어... 문제를 해결해서?"
유빈이 손가락으로 펼쳐둔 문제집을 툭툭 두드렸지만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진로 조사 설문지 제출을 위해 교무실에 방문한 시아는 담임 교사에게서 몇가지 당부를 들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 '누가 괴롭히지는 않냐', '힘들면 말해라' 등. 그 중에서도 하나.
'무슨 일 있으면 옆자리의 유빈이를 의지해라'
둘이 친한가보다 하며 웃는 모습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제서야 시아는 유빈이 무언가를 했음을 직감했다.
그 순간 떠오르는 지난주의 짧은 대화.
그때 유빈은 정말로 들었던 것이다. 무심결에 나온 한탄을.
"뭘 어떻게 한거야?"
"뭘 어떻게 해. 어쩌다 옆자리에 좀 앉았더니 애들이 날 껄끄러워해서 안 오는거 아니야?"
"왜 날 도와준거야? 그때 한 말 들은거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빙글. 유빈의 손 끝에서 샤프가 한바퀴 돌았다. 유빈의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고 단단했다. 하지만 시아는 그 이상으로 집요했다.
가식이고 뭐고 벗어던진 맨언굴이 어쩐지 뜨거워졌다.
"말 그대로야. 네가 날 도와줄 이유가 없잖아. 잘못하면 너도 찍힌다고. 무섭지도 않아?"
"그래서 안 들키게만 찔끔찔끔 했지."
"그런걸 말하고 있는게 아니잖아."
말해주기 전에는 안 넘어갈 분위기였다. 유빈은 결국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토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무시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걱정되니까."
"뭐? 내가 너의 뭔데 걱정을 해?"
"네가 나의 뭣도 아닌데 걱정은 되니까."
그는 짙은 피로감이 남아있는 목소리로 답하며 눈매를 쓸었다.
뉴스에서는 집단 따돌림 화제가 나왔다하면 자살이 언급된다. 저녁 먹고 양치하면서 뉴스를 보다보면 싫어도 떠오를 수 밖에 없었다.
귀엽고 활발했던, 지금은 죽은 듯이 살아만 있는 급우의 얼굴이.
"내가 천성이 심약해서. 네가 그렇게 힘들어하다가 저세상 갈까봐 무서워서. 그래서 할 수 있는 것만이라도 한거야. 진짜 이게 다니까 더 물어보지 마."
시아는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친하지도 않은데?"
"그래."
그녀는 마음 속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새끼 뭐지? 호구인가?
"너 지금 나 호구라고 생각하고 있지."
"......"
이런거 보면 머리가 나쁜건 아닌데. 시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나 호구다. 그러니까 대충 넘어가."
이게 처음으로 시아가 '가면'의 존재를 자각한 날이며 두 사람이 처음으로 제대로 된 대화를 한 날이었다.
이 날 이후로 시아는 조금씩 유빈에게 말을 걸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찾아오는 유빈의 친구와도 안면을 텄고, 기존의 그룹과는 완전히 그 궤가 다른 부류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나름 가까워진 3명. 학교 최고의 미소녀, 다혈질 중2병 스포츠맨, 유들유들한 무특색 친구캐릭터.
어느덧 그녀를 향하는 직접적인 공격은 완전히 멎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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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벗어 던지고 난 가면은 다시 써도 몰입할 수 없었다. 귀여운 척, 순진한 척 아양을 떨면서도 그런 자신을 비웃는 속 마음이 있었다.
냉정하고 시니컬한 윤시아. 진정한 나. 가족들과의 교류에서 피로를 느끼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본래의 성격대로 행동하면 가족들은 그녀의 몸 상태를 걱정했다. 정작 가장 힘든 건 그런 가족의 모습에서 배신감을 느끼는 스스로의 마음이었는데.
가족들 중 누구도 그녀의 본모습을 알아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녀를 끔찍한 고독으로 몰아넣었다.
가족들에게 잘못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단지 서글플 뿐.
지금까지도 그녀가 나서서 밝히지 않는 것은 가족이라면 언젠가 먼저 '윤시아'의 본모습을 깨달아주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기대 때문이었다.
결국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가식 없이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건 유빈 뿐이었다.
"...하아. 말이라도 해볼까."
내일은 중간고사가 끝나는 날. 집에가서 자겠다고 거절할 가능성이야 높지만 그게 시도도 하지 않을 이유는 되지 못했다.
목표는 하굣길 카페 데이트. 사준다고 하면 오지 않을까?
"잘 되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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