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중간고사 2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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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없는 말이 천리간다.
그렇다면 천리는 커녕 학생 30명 정도가 겨우 들어가는 좁은 교실 안에서는 어떻겠는가?
'너한테만 가르쳐주는 건데...', '이건 비밀인데...',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마...'
이런 식으로 시작되는 말에 진정한 비밀이란 있을 수 없었다. 애초에 입 밖으로 나온 시점에서 완벽한 비밀이란 물 건너 갔다고 보는 것이 타당했다.
어쩌면 정말로 공고한 신뢰 관계를 기반으로 한 둘, 셋 사이의 비밀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게 넷, 다섯, 그 이상으로 늘어날 수록 비밀이 지켜질 확률은 기하급수적으로 곤두박질 친다.
어딘가로 한번 세어나간 순간 비밀이라는 말은 그 의미를 잃는다. 소문의 시작이다.
그리고 지금. 한번 죽었던 소문이 다시 고개를 처들었다.
중간고사 2일차.
전날보다 진화한 좀비, 말하자면 강화 좀비라고 할 만한 몰골의 유빈은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대충 넘기고 교실을 나섰다.
쌩하니 사라지는 유빈에게 묘한 섭섭함을 느낀 시아는 그래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불만스러운 표정이 드러나는 것은 피할 수 없었지만 어차피 유빈은 보지도 못했다.
짐을 정리하고 일어나는 그녀는 어쩐지 목덜미가 간지러운 느낌에 어깨를 움츠렸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이쪽을 힐끔거리며 떠드는 여학생들 그룹이 하나.
언제나 있는 일이지만 어쩐지 섬찟한 감각. 시아는 재빠르게 짐을 정리했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거야. 이대로 걸어서 나가면 돼.
그녀는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었다. 곁에 유빈이 있을 때는 저런 같잖은 일에 조금도 신경쓰지 않지만 이렇게 혼자가 됐을 때는 어김없이 끔찍했던 기억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겨우 한명 없어졌을 뿐인데 빈 자리는 너무나 컸다.
잰걸음으로 교실을 벗어난 그녀는 교문 밖까지 나와서야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학기 초에는 작년의 소문이 남아 있어서 이런 일이 자주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옅어지는 빈도에 소문이 좀 묻혔나보다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다시 그녀의 이야기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 같았다. 어째서?
누가 일부러 그녀에 대해서 말을 꺼내기라도 한 듯한 상황이었다.
"걘가?"
저번에 대놓고 뒷담을 까다가 유빈에게 당한 여자애.
생각해보니 아직도 이름을 몰랐다. 한창 주변을 경계하던 시기라면 이미 이름은 물론이고 주변 관계까지 꿰고 있었을텐데.
그녀는 그제서야 자신이 너무 풀어져 있었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었다.
유빈이라는 요람에 안도하여 자신의 처지를 망각하고 있었다.
정말 그녀의 편이라고 할 수 있는 상대는, 이 학교에서 유빈 뿐이란 걸 알고 있었을텐데.
지금은 한창 시험을 보는 기간.
시험 시작일 일주일 전부터 시험 종료일까지는 유빈이 가장 여유가 없는 시기였다. 즉, 그는 그 예민한 청각이 무색하게 이 기간 동안 아무것도 깨닫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시아가 직접 도움을 요청하면 흔쾌히이런 시기에 일을 만든 주동자, 혹은 주동자들을 열심히 씹으면서나서주겠지만 그건 피하고 싶었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방해를 하고 싶지 않았다. 공부따위 될대로 되라고 방치한 자신과는 다르니까.
굳이 고쳐 말하자면 그는 공부를 열심히 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그래도 내일이면 시험은 끝난다. 겨우 며칠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 같지는 않았다. 누가 굳이 새로운 떡밥을 던진게 아니라면 호수는 다시 잔잔해 질 것이다. 시기로 따지자면 1년이 지난 일이 이제와서 불타봤자 얼마나 뜨겁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며 학교 앞 공원을 가로질러 걷다보니 떠오르는 건 작년의 기억이었다.
그때의 그녀는 굳이 표현하자면 멍청하게 순진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자신이 위험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자각이 전혀 없었다는 뜻이었다.
선천적으로 뛰어났던 눈치, 직감에 따라 누구에게나 귀여운 짓을 하고 호감을 사면서 즐거워했다.
어떤 말을 하면, 어떤 행동을 하면, 무엇을 주면 좋아할지 아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 반에서 하는 귀여운 척은 그때랑은 비할 바가 아니었다.
고등학교 1학년. 이성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시기에 그런 짓을 하고 다녔으니 문제가 생기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한 반에서 그녀를 좋아하게 된 남학생만 둘. 그리고 그런 남학생들을 좋아하는 여자애가 각각 하나. 별 생각 없이 유혹을 해버린 시아.
반 전체를 1학기동안 지옥같은 진창으로 몰아넣은, 유빈 명명 '대난투 러브코미디 브라더스'의 시작이었다.
풀 악셀로 대시하는 두 남자. 그런 모습에 질투하는 두 여자. 처음 겪는 일에 별 대처도 못하고 쩔쩔 매는 윤시아.
사실 가장 문제였던 건 시아가 둘 중 누구에게도 이성적인 호감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위태롭게 넘긴 한 두번의 줄타기는 버텨낸 보람도 없이 순식간에 사태는 악화되었다.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한 명이 공개 고백을 했고, 뒤따라 한명이 뒤쫓기듯이 뛰쳐나와 풋풋한 연심을 밝혔다.
집중되는 시선. 빙글빙글 도는 머릿속. 꼴사납게 흔들리는 다리로 가까스로 버티고 선 그녀는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 이후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솔직하게 사귈 생각 없다고 했더니 그냥 남학생을 가지고 논 쓰레기가 되어 버렸다.
순정을 짓밟혔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을까. 직접 차인 두 사람은 어쨌든 두 여학생도 합세해서 시아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직접 면전에서 욕설을 퍼붓거나 폭력을 휘두는 것은 아니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발을 걸려서 넘어지거나, 체육이 강당인지 운동장인지 잘못 전달되거나.
모처럼 매점에서 산 음료수는 누군가와 부딪혀 바닥에 엎어지기 일쑤고, 사물함에 넣어둔 물건은 성한 것이 남지 않았다.
교과서만은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이 그나마의 위안일까. 학교 수업에 문제가 생겼다간 교사에게 알려지기 쉽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묘한 부분에서 세심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대로 1학년이 끝날 때까지, 어쩌면 졸업 할 때까지 지내야 하는 것일까.
그 때였다. 1학년 들어서 2번째 자리바꾸기 날이 온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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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짝꿍은 날카로운 눈매의 우등생이었다. 이름은 홍유빈. 학년 내에서도 유명한 범생이였다.
시아로서는 어찌되든 상관 없는 일이었다. 흉흉한 반내 분위기에서도 그녀에게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는 것 만큼은 장점이라고 할 만 했지만 그렇다고 해결된 문제는 없었다.
아니,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없을 시간을 노려 일부러 늦게 체육복을 갈아입은 시아가 반에 도착했을 때, 이미 반은 텅 비어 있었다.
강당인가 운동장인가. 칠판은 거칠게 지워진 행선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일단 강당부터 가 봐야."
"운동장."
깜짝 놀란 시아의 어깨가 거칠게 튀어올랐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던 교실의 한 곳에서 사람이라곤 생각 못했던 마이 덩어리가 들썩거렸다.
"이것들이 진짜. 자는 사람 위에 뭘 이렇게 올려놓은거야."
후두둑. 쌓여있던 마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자려고 업드린 그를 위해 겉옷을 벗어준 친구들이 꽤 많았던 모양이었다.
주섬주섬 마이를 끌어모은 그는 대충 책상 위에 뭉쳐서 올려두었다.
"......"
그 광경이 워낙 기묘해서 시아는 아무 말도 못하고 굳어있었다.
"저기."
"운동장에 모이라고 하셨어."
유빈은 그 말만을 던지고 교실을 나갔다. 옷은 이미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채였다.
"...기다려준 건가?"
설마. 시아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유빈의 뒤를 따랐다. 수업종이 얼마 남지 않았다.
문을 지나니 복도 저편에서 느릿느릿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살짝 굽은 등, 축 쳐진 어깨에 짙은 다크써클. 딱히 대화해 본 적은 없지만 누가 봐도 음침하고 냉랭할 것 같은 인상.
어쩌면 겉보기와는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유빈의 곁에는 언제나 친구가 몇명씩 모여 있었다. 공부를 하느라 같이 떠들지도 못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별난 상황이었다.
"......"
일부러 남아서 가르쳐 주었다면 고마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바뀌는 건 없었다. 시아는 우울하게 걸음을 옮겼다.
유빈의 걸음걸이가 느긋했던 덕에 금방 뒤따라잡을 수 있었다. 시아가 조용히 물었다. 주변에 절대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저기, 일부러 알려주려고 남아 있었던거야?"
"아니. 갈아입고서 잠깐 업드린다는게 깜빡 잠들어버렸어."
그녀와 대화를 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유빈에게도 피해가 갈 수 있었다. 지금 그녀는 명실상부한 왕따였다.
"그래? 그래도 알려줘서 고마워."
싱긋. 그녀는 버릇대로 웃었다. 설령 이런 행동이 문제를 만들고 말았다는 것을 알아도 몸에 배인 건 어쩔 수 없었다.
유빈은 그녀가 나름 귀엽고 깜찍하다 자부하는 외모와 미소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눈이 반쯤 감겨있는 것이 진짜 피곤해 보였다.
이상하다. 반응은 있는데.
시아는 느껴지는 반응과 상반되는 무관심한 태도에 속으로 의문을 품었다.
"그거."
"응?"
"무릎, 괜찮아?"
시아의 시선이 자신의 무릎으로 향했다. 체육복 반바지는 상처와 그 위를 감싼 반창고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허구한 날 누군가의 다리에 걸려 넘어지다보니 무릎이 상처 투성이였다.
"괜찮아."
"좀 도와줄까?"
힐끔. 어디까지나 지나가는 투로, 별 것 아니라는 식으로 유빈이 그렇게 흘렸다.
도와줘? 나를?
시아는 기가 차서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억눌렀다.
무슨 수로?
지금 그녀를 괴롭히는 4명은 반의 노는 그룹에 속한 인물들이었다. 친구도 많았고, 당연히 그녀를 괴롭히는 사람도 많았다.
괜히 나섰다가 찍히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시아는 마지막 말을 듣지 못한 척 했다.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 했던 스스로를 비난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업자득인 상황이 아닌가. 다른 사람을 끌어들여 피해를 늘릴 필요는 없었다.
무심결에 비집고 나온, 누구도 들을 수 없으리라 여겼던 작은 속삭임 정도는 허용범위라고 생각했다.
"...정말 할 수 있으면 도와줘."
차라리 나비의 날갯소리가 더 시끄러울 것 같은 말. 유빈과는 앞 뒤로 나란히 걸어가고 있다고 해도 거리가 2m는 됐다. 주변은 아직 쉬는시간이 끝나지 않아 날뛰는 학생들의 소음으로 시끄러웠다.
그런 한심한 푸념에 범생이는 응했다. 지독히도 성실하게.
"그래."
"...어?"
아무런 변화 없이 그냥 한마디. 걸음을 늦추지도, 재촉하지도 않고 그 굽은 등을 보인채로. 더 이상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아서 시아는 자신이 환청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운동장에 나선 유빈은 친구들에게 끌려 농구장으로 사라졌고, 그날은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틈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들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시아는 곧 유빈의 대답을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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