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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원수)를 다루는 바람직한 방법-25화 (25/31)

〈 25화 〉 중간고사 1일차

* * *

중간고사.

1학기에 두번 있는 중요한 시험 중 하나지만 그걸 얼마나 중요하세 여기는가는 사람마다 천차만별.

시아나 하늘처럼 될대로 되라고 신경도 쓰지 않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진우처럼 좋은 머리로 대충 때우거나 민재처럼 적당히 중간만 가려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물론 유빈처럼 목숨을 걸고 매달려야 하는 사람도 있었다.

3일동안 진행되는 중간고사 첫날.

눈을 비비며 등교한 시아는 문제집에 코를 박고 죽어있는 유빈을 발견했다.

"...우와."

정말 숨도 안 쉬는 것처럼 꿈쩍도 않고 잠들어 있는게 건드리면 죽여버리겠다는 패기마저 두르고 있는 듯 했다.

지난 일주일 살아있는 좀비같은 빈사스러움으로 걸어다니던 유빈이니 자고 있는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지금이 시험 시작 40분 전이라서 그렇지.

이거 깨워야 하나?

시험 전에 공부하다 피곤해서 깜빡 잠든 것인지, 시험 전에 조금이라도 쉬려고 자고 있는 것인지.

전자라면 깨우는게 맞고, 후자라면 깨우는 순간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노려볼게 뻔했다.

시아는 무슨 일이 있어도 유빈의 호감도가 내려가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얼마 전부터 참고를 위해 몇개 돌려본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을 떠올려보니 몇가지 비슷한 상황이 떠올랐다.

지금은 살며시 겉옷을 덮어주거나 조용히 옆자리에 앉아서 지켜보는게 히로인적으로 포인트가 높을 터.

귀가 밝은 유빈이 깨지 않도록 숨죽여 다가갔더니 그제서야 보이는 오른손. 풀지 않은 팔목 보호대, 한손에 들린 샤프, 벗지 않은 안경.

아, 이건 그냥 졸다가 꺾여서 이마를 책상에 박은거구나.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깨워주는게 맞았다. 당장이야 짜증스러워하겠지만 결국에는 고마워할 것이었다.

살며시 옆자리에 앉았다. 고른 숨소리. 늘 불편하게 구겨져있던 미간이 지금은 편하게 늘어져 있었다.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줄여서 미연시를 참조하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결국 미연시의 히로인들이란 남성 유저를 유혹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생전 처음으로 타인을 유혹하는 그녀의 입장에서는 도움이 될 것이었다.

좀 엄하거나 야하거나 음란, 굳이 말하자면 19세 이상 시청가능인 장면도 꽤 많아서 당황하긴 했어도 나름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녀가 여태껏 타인의 호감을 산 것은 의도적인 부분은 있었어도 그것이 본격적인 연애관계를 위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허구적인 부분, 판타지, 게임이라 가능한 상황을 걸러야 하겠지만 아무튼 그런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는 걸 안 것만으로도 수확은 있었다.

그래, 이렇게.

조심스럽게 책상을 짚고 몸을 가까이 들이민 시아가 입술을 오므렸다.

"후우."

살며시, 불쾌하지 않을 정도로 바람을 불자 안 그래도 청각이 예민한 유빈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윽!"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킨 그가 귀를 감싸며 고개를 휙 돌렸다. 마주하는 건 상상 이상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달게 웃고있는 시아. 순식간에 졸음에서 깨어난 머리가 어렵지 않게 상황을 파악했다.

"무슨 짓이야."

"졸고 있어서 깨운 건데?"

"너..."

무언가 복잡한 표정을 입을 몇번 우물거린 그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까지의 교제가 깊은 시아는 그것이 그냥 넘어가주는 흐름인 것을 알고 있었다.

"많이 피곤했나봐. 공부하다가 졸고."

"어제 좀 늦게까지 공부했더니 버티기 힘들더라. 중간고사 끝나면 몰아서 자야지."

중간고사 준비 때문인지 안그래도 날카로웠던 눈매가 더 어두워져 있었다. 시아는 가끔 저 다크써클을 손가락으로 따라 문질러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했다.

눈 쓸린다고 싫어할까?

묘하게 핀트가 어긋난 부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중간고사 끝나고 모이기로 했던 건?"

"난 못간다고 미리 말했어."

시험보고나면 진이 빠져서 숨도 쉬기 힘든데 모여서 놀 수 있을리가 없었다.

집에 가서. 잔다.

시험이 끝난 유빈은 그 단 두마디 문장밖에 떠올릴 수 없는 생물이었다.

낮에 잠을 자도 별 말 안하는 시험 종료 당일에 푹 쉬지 않으면 그 다음날은 눈뜨고 걷지도 못하는 지옥이 펼쳐졌다.

논다는 것도 결국에는 체력을 쓰는 일이었다. 재충전? 리프레쉬? 그것도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때나 의미가 있는 말이었다.

"정말로 잘거야?"

"그럼 가짜로 잘까?"

피로로 충혈되어 핏발이 선 눈이 '지금 장난하냐?'라고 묻는 것 같았다. 시아는 슬그머니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수작을 걸거나 유혹하는 것도 상황을 봐가면서 할 일이었다.

#

1교시 시험 시작 20분 전

"야, 유빈! 중요한 것 좀 찝어주라!"

#

2교시 시험 시작 5분 전

"야, 이번에 어디서 나올 것 같냐?"

#

3교시 시험 시작 5분 전

"야, 야! 유빈!"

#

"그 씨발 새끼 내가 언젠간 꼭 죽인다."

분노조차 느껴지지 않는 평온한 말에 시아의 어깨가 흠칫 흔들렸다.

너무나 평탄한 어조라 오히려 무섭도록 진심으로 들렸다.

"유빈아? 그..."

"한번도 아니고 세번이야. 그것도 시험 직전에 공부하고 있는데."

"마음은 이해하지만 진정해."

"난 지금 흥분하지 않았어. 단지 결심했을 뿐이지."

그게 더 무서운데. 정말로 음색에 높낮이가 없었다. 느낌표 하나 없이 죽이겠다는게 칼만 안들었지 살의가 넘쳐나는 심정을 반영하고 있었다.

시험이 끝나고 학생들이 모조리 빠져나간 교실. 유일하게 가채점을 위해 남아있던 유빈과 그런 유빈을 기다린 시아.

담임 교사는 칠판에 정답을 쭉 써준 뒤 시아에게 윙크를 던지더니 신속하게 자리를 벗어났다.

교사가 그러는게 맞아?

물론 시아와 유빈이 붙어다니는 거야 교사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진 일이었다. 시아가 일부러 드러내놓고 다니기도 했다.

그 영향이 이런식으로 나타날 것이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붉은 볼펜이 시험지를 누비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대부분은 끊임없는 동그라미였지만 가끔 일그러지는 눈매와 함께 날카로운 궤적이 그어졌다.

오늘 본 과목은 1교시부터 순서대로 수학, 영어, 윤리. 점수까지 적어두고 시험지를 정리하는 유빈의 표정을 보니 그렇게 나쁘진 않은 것 같았다.

"잘 봤어?"

"그냥저냥."

즉 85점 아래는 없다는 뜻이었다.

"실수는 안했는데 왜 틀렸는지 모르겠는게 좀 많네. 영어가."

"애들도 어려웠다고 하더라."

"넌? 잘 봤어?"

"다 찍었지."

훗, 하고 의기양양하게 웃는 주제에 정작 시선을 피하는 시아. 유빈은 알만 해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래도 네가 가르쳐준 건 맞췄어!"

"잘됐네. 그래봤자 몇 문제 안되겠지만."

"수학 첫 페이지에서 3개 정도긴 해."

유빈이 도서관에서 공부를 할 때마다 가르쳐 달라고 달라붙은 성과였다. 원래는 접근을 위한 핑계였지만 유빈은 질색하는 그녀를 붙잡아두고 수학을 가르쳤다.

왜 하필 수학이냐는 질문에는 '그게 제일 자신 있으니까'라고.

"문과생인데 왜 수학이 자신있는거야?"

"어머니가 수학 과외를 하셨었거든. 나도 자연스럽게 수학을 많이 공부해야 했지."

국어도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쪽은 독서광 기질 덕을 보는 부분이 많아서 알기 쉽게 가르쳐주기가 어려웠다. 내가 아는 것과 다른 사람을 가르쳐 주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에 반해 수학은 스스로도 하나부터 쌓아 올렸다는 자신이 있었다. 맨 처음부터 차근차근 가르쳐 주는 건 가르치는 방식 이전에 가장 기초적인 방식이므로 실패할 확률도 적었다.

"다음에는 시험지 첫장을 다 푸는 걸 목표로 해보자."

"에엑. 나 수학 싫어하는데."

"걱정 마."

유빈이 조곤조곤 덧붙였다.

"수학만 말하는게 아니니까."

올해 들은 말중에 가장 무서운 말이었다.

가장 무서운 점은 그렇게 말하는게 유빈이라 피해다닐 수도 없다는 점이었다.

"영어는 나도 자신 없지만 다른 과목은 대충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 열심히 해보자."

"그거 꼭 해야돼?"

유빈은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웃었다.

"진짜?"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아라써."

"걱정 마. 안 어려워."

국영수를 빼면 말이야.

유빈은 굳이 덧붙이진 않았다. 문과니까 과학은 크게 신경쓰지 안아도 되고 사회 과목은 암기만 잘 하면 된다.

국어, 영어, 수학은 유학을 갔다 왔거나 정말 머리가 좋은게 아니라면 꾸준한 공부가 필요했다.

"대신 공부 끝나면 최대한 네가 하고 싶은대로 어울려줄테니까. 응?"

"정말이지?"

정말이었다. 애초에 유빈이 가진 여유로운 시간이라고는 별로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지 않았을 뿐.

지금까지처럼 주말에 도서관에서 보는 정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게 분명했다. 하지만 당장 시아가 꽤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아서 굳이 말하진 않기로 했다.

목표량을 좀 잽싸게 해결하고 남는 시간을 주면 될 일이었다. 그도 여유가 좀처럼 생기지 않을 뿐이지 친구랑 놀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일어날까."

아직 시험은 끝나지 않았다. 오늘의 결과가 어땠든 마음을 다잡고 내일을 대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냥 이 자리에서 엎어져 잠들 것 같은 정신을 붙들고, 유빈은 가방을 둘러 맸다. 일단 신속하게 귀가하고 1시간 정도 잘 생각이었다.

적절한 수면이 학습에 도움이 된다는 건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그렇고 말고.

"내일은 무슨 과목이었지?"

"국어, 사회."

"사실상 내일이면 주요 과목은 다 끝나네."

국어, 수학, 영어에 사회. 그 후에 남는 과목이라면 과학, 체육이라는 사실상 크게 의미를 갖지 못하는 과목들이었다.

"그럼 3일째는 좀 마음 편하게 보겠네?"

"그렇지도 않아..."

유빈은 매마른 웃음과 함께 어깨를 들썩였다.

"평균 점수 깎아 먹었다간 그날로 내 재삿날이 될테니까."

"와우."

"서울대는 못하는 과목이 있으면 못 간다는 모양이야. 웃긴다 진짜."

본인은 갈 마음이 없었지만, 애초에 마음이 있어서 공부를 했던가. 까라면 깐다. 부모 자식이라는 완전한 상하 관계에 놓여있는 한 그 현실은 변하는 법이 없었다.

"덕분에 체육책도 6번은 정독해야 했어. 그나마 애들이 공부를 안하니까 선생님이 시험을 쉽게 내주시는게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어쩌지. 너무 다행이라 울것 같은데."

"울거면 내 가슴에서 울어."

"멋져서 반해버릴 것 같은걸."

"반해도 되는데?"

"아직은 사양해둘게. 시험 끝날때까지는 평정을 유지해야 해."

현관을 거쳐 교문을 지나. 두 사람은 어느새 학교 옆의 공원을 지나고 있었다.

크기가 크진 않지만 곳곳에 벤치가 있고, 운동 기구도 여럿 배치되어 있어서 있을 건 다 있는 곳이었다.

"그러고보면 요즘은 별일 없어?"

"무슨 일?"

"저번에 걔가 뭐라고 했던거."

"아아."

작년의 시아를 알고 있는 유빈은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시아는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랑 친하게 지내기만 해도 어느 정도는 괜찮으니까."

유빈과 친한 사이라는 건 상당한 보호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유빈의 친구 중에 뭐만 있다 하면 물어 뜯겠다고 날뛰는 '그 녀석'이 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였다.

"이런 부분에서는 도움을 받고 있으니까, 그 놈은 성격만 고치면 정말 좋을텐데."

유빈은 갈 데 없는 한탄에 눈살을 찌푸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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