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중간고사 인카운트
* * *
"도대체 언제 끝나?"
"곧."
말을 걸면 대답은 곧잘 해주면서도 손이 멈추는 일이 없었다. 이것도 그 썩을 친구와 지내면서 체득한 기술일까. 쉬는 시간마다 옆에서 쨍알거리는 진우를 적당히 넘기면서 공부를 하는 유빈. 그 모습이 쉬이 떠올랐다.
매일같이 보는 광경이긴 했다. 항상 그러고 있는데 능숙할만도 하지.
"으윽. 생각 보다 오래 걸렸네."
고양이처럼 등을 쭉 핀 시아가 몸을 이리저리 뒤틀었다. 지루하진 않았지만 오래 앉아 있다보니 좀이 쑤셨다.
"다 마셨지? 내가 가져다 둘게. 끝나면 뭐할래?"
"아 땡큐. 뭐 할 시간이 돼? 해가 지고 있는데 집 가서 저녁 먹어야지."
"뭐어?"
컵을 수거대에 올려두고 잽싸게 돌아온 그녀가 인상을 팍 찡그렸다. 그녀는 아직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지금까지 기다리게 해놓고 해산은 너무하잖아. 같이 저녁 먹자."
2시간 가까이 노닥거리기만 했다. 그녀는 좀 더 놀고 싶었다. 하지만 유빈도 할 말은 있었다. 그는 애초에 놀 생각이 없었고, 이미 그렇게 말 했었다.
"처음부터 말 했잖아. 놀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기다리지 말라고. 그리고 나 돈 없어."
돈이 없다. 그 말에 시아가 자신의 지갑을 꺼내 들었다. 나오기 전에 받은 5만원권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고등학생 둘의 한끼 식사를 충당하기에 부족함 없는 돈이었다.
그녀가 히죽 웃었다.
"내가 내줄게."
"감사히 먹겠습니다."
넙죽. 유빈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자존심은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 그의 안에서 금전적 자존감이란 어머니 뱃속에 두고 온 개념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이 자존심이라는 것을 퍽 중요하게 여기는 모양이었지만.
갑자기 표정이 밝아진 유빈은 재빠른 움직임으로 가져온 모든 물건을 가방에 정리했다.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좋은가. 용돈이 언제나 풍족해서 빈곤을 겪어본 적 없는 시아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뭐 먹을까?"
"난 얻어먹을 뿐이니까 네가 먹고 싶은거로 정해."
"혹시 싫어하는 거 있어?"
"없어. 안 그래도 얻어먹는 입장인데 뭔들 싫겠니."
어차피 요즘 들어서 뭘 먹든 입맛이 없었다. 학업 스트레스 때문인가 하고 한 두마디 얹어봐도 어머니는 뭔 엄살을 부리냐는 눈빛으로 듣고 흘릴 뿐이었다.
힐끔 쳐다본 오른 손목은 손목보호대가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샤프를 쥐고 있던 손은 간헐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저릿저릿했다.
"딱히 먹고 싶은건 없는데."
"먹고 싶은게 없는데 저녁 먹자고 한거야?"
"그치만."
입술을 비죽거린 그녀가 툭 내뱉었다.
"아직 집에 가기 싫은걸 어떻게 해."
뭐라 답해주기 애매한 말이었다. 시아도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닌지 더 말을 붙이진 않았다.
그녀의 본심을 들을 때마다 유빈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슬그머니 차오르는 동질감을 느꼈다.
물론 같은 환경에 놓였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집에 가기 싫다'는 그 마음만큼은 그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게. 나도 집에 가기 싫어."
집에 간다고 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숨 쉬듯이 목을 조여오는 어머니와 반쯤 방관하는 자세를 고수하는 아버지. 잠을 자는 시간을 빼면 휴식이란 존재할 수 없었다.
언젠가 모든 고생이 끝을 맞이한다면, 그 후에는 그곳을 '집'이라고 여길 수 있게 될까.
"그럼 옆에 분식집이라도 갈래? 적당히 먹기에는 좋을 것 같은데."
"좋아.
결국 그들이 선택한 것은 낮에 하늘이 일행이 들렀던 분식집이었다.
"떡볶이 순대 튀김."
"완벽하군."
의견은 완벽하게 일치했다.
유빈은 주린 배를 쓰다듬었다. 입맛이 아무리 없어도 이런 분식이나 패스트푸드는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법이었다. 그만큼의 조미료가 들어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장 인생이 고달픈 청소년들에게는 고마운 일이었다. 건강은 둘째 문제였다. 맛있으면 됐지.
"매운 맛으로 위에 치즈 뿌려주세요."
매운 맛에 치즈 토핑 추가. 유빈이 가장 좋아하는 조합이었다.
"누님, 사랑합니다."
"진짜?"
"...아, 농담은 농담으로 넘어가주라."
말 한번 잘못했다간 큰일 날 기세였다. 아니, 은혜로운 치즈 토핑이라면 절까지는 할 수 있지만.
가족끼리 분식집 오면 그런건 꿈도 못 꿨다. 뭘 먹고 싶다고 말한는 것부터가 눈치보면서 사는 유빈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애초에 동생이 매운 걸 싫어해서 자주 오지도 못했다.
"그럼 넌 매운거 언제 먹어?"
"치킨이나 볶음밥은 내가 먹을 몪만 따로 빼서 소스를 뿌리지. 탕수육도 난 부먹파인데 동생이 찍먹파라 맘대로 못뿌려."
가족한테 치이는 와중에 동생까지 배려해야하다니. 불쌍해서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네가 다 먹어도 괜찮으니까 맘껏 먹어."
"아니, 얻어먹는건데."
"난 원래 많이 안 먹으니까 됐어."
마음 같아서는 음료수도 시켜주고 싶었지만 나중을 위해서 아꼈다. 저녁 먹고 음료수나 마시자는 핑계로 좀 더 붙잡아 둘 생각이었다.
유빈이 익숙한 손놀림으로 손목보호대를 풀었다.
"괜찮아?"
"아마. 조금 아플 뿐이야."
슬며시 젓가락을 쥔 오른손. 가볍게 까딱거리고 있었지만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유빈은 나지막히 혀를 찼다.
"손목 보호대 괜히 풀었나."
욱씬거리는 손목은 제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하루종일 샤프를 잡았으니 제 역할은 다한게 아니냐고 불평하는 듯 했다.
그렇다고 젓가락질도 제대로 못하면 저녁은 어떻게 먹으라고. 안타깝게도 이 분식집에는 포크가 없었다. 아니, 어떻게 포크가 없지?
젓가락으로 찍어서 먹어야하나 고민하던 차에, 시아가 조용히 순대 하나를 집어 내밀었다.
"아."
"...네?"
"아."
"저기, 누님.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두 팔이 다 부러진 것도 아니고 다른 방법도 있는데 받아먹고 싶진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부끄러웠다.
더 밀어붙인다고 해줄 것 같지 않으니 시아도 얌전히 물러났다.
"칫. 구두쇠."
"그런 건 사귀고 나서 하십시다..."
"그게 언젠데."
"언젠가는?"
"어휴."
우물우물.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푹 쉰 시아는 불만스럽게 순대를 씹었다.
좀만 더 하면 넘어올 것도 같은데. 이 모태솔로 초식남은 다 받아주는 듯 하다가도 한발 뒤로 빼곤 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오른 손으로 몇번 더 시도해본 유빈은 결국 불편한 왼손을 선택했다. 젓가락으로 떡볶이를 찔러서 먹고있는 모습이 짠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못 먹을 것도 아니었다. 유빈은 은근히 바라보는 시아의 시선을 모른척 하며 식사를 마쳤다. 범이 든 것을 아는데 괜히 수풀을 찔러볼 만용은 없었다.
"중간고사 준비는 잘 돼가?"
"나?"
시아의 눈꼬리가 움찔 떨렸다. 공부, 공부라.
솔직히 말하면 전혀 안했다.
"이제 1주일 남았잖아. 어때?"
일반적인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이 얼마나 있겠는가. 하물며 서울의 강남 같은 동네도 아니고, 그저 그런 경기도의 한적한 동네에 불과한데.
시아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전혀, 하나도, 완전히 손도 안댔다.
"어쩌려고 그래."
"성적 잘 안나와도 상관 없어."
"아, 그래."
본인이 그렇다는데 더 할 말은 없었다. 그놈의 공부 때문에 개고생을 하고 있는 유빈이 어쩌겠다고 길동무를 늘리겠는가.
"근데 왜? 나 공부 잘 안하는거 알잖아."
"아니, 모르는 거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라고 말하려 했지. 필요 없겠네."
"애초에 그런 말 안해도 숙제는 자주 도움받고 있긴 하지."
다른 과목이라면 교과서 내의 본문을 되짚기만 해도 숙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수학이나 영어는 달랐다.
본문을 배끼는 것과, 이해해서 써먹는 것에는 어쩔 수 없는 차이가 있었다.
"배끼게 해주지는 않지만."
"도와주는 거랑 답을 가르쳐주는 건 다르지. 본인의 노력을 들이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건 날먹이고. 그런 자세로 도와달라 그러면 도와주기 싫잖아."
"역시 넌 좀 특이한 것 같아."
"난 내가 한 노력의 결과를 그냥 가져가는게 싫을 뿐이야. 이게 그렇게 특이한 생각은 아니잖아?"
그거야 그렇지. 하지만 그렇다면 그냥 거절하면 되잖아.
거절하지 않고 달라붙어서 이해할 때까지 설명해주니까 특이하다고 하는 건데 본인은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그런데 그래서 결국."
화제는 결국 돌고 돌아 원점으로 돌아갔다.
"하늘이가 유한이의 감정을 눈치채지 못한 이유는 뭘까?"
"대충 뭔진 알 것 같은데."
"진짜?"
"아니, 뭐. 추측일 뿐이지만."
그렇게 덧붙인 유빈이 젓가락을 내려 놓았다. 나름 배도 찼고 할 이야기가 좀 길었다.
"애초에 말이야. 사랑한다, 좋아한다 이런 말을 쓰지만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을 순 없는 거잖아."
진우의 사랑이란 넘치는 자기애의 범람이다. 사랑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기에 독선적이고 난폭하다.
시아가 말하는 '연인'이란 철저한 계산 아래에서 이루어진 갈망이다. 유빈의 존재를 붙잡아두기 위한 집착과 냉혹이다.
"고작 두 개 사례를 들었을 뿐인데 벌써부터 살떨리네."
그렇게 너스레를 떤 유빈은 자연스럽게 유한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래. 그 순박한 후배는 과연 어떤 사랑을 하고 있을 것인가.
동경에서 비롯된 선망인가, 불꽃처럼 타오르는 열정인가, 그도 아니면 가련함에 취한 보호욕인가.
"그런 걸 몽땅 뭉뚱그려서 '사랑'이라고 단순하게 파악할 수 있다면 지금의 하늘이의 태도가 설명되지 않아."
"그게 다 다르게 느껴질거라는 뜻이야?"
"그러니까 진우와 유한을 대하는게 다르지."
물론 악감정이 있는만큼 다르기야 했겠지만 지금처럼 유한과 친하게 지내진 않았을 거라는 말이었다.
"당연히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상황을 끼워 맞추는 것 뿐이지만 아마 그럴 거라는 말이야. 그리고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것 보다 하늘이는 진우를 싫어하겠지."
"왜?"
"그 끔찍한 집착이 눈으로 보이는데 좋을 리 없잖아. 그게 어떻게 보일지야 상상의 영역이지만 그 새끼랑 마주칠 때마다 검고 질척하고 끈적거리는게 보인다면..."
"으엑."
흡사 이름을 말할 수 없는 바퀴와 같은 무언가. 듣기만 해도 역겨워서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사실 다른 사람이 보면 누가 봐도 한이는 하늘이를 좋아하는게 보이는데 정작 본인만 모르고 있으니..."
"지금까지랑은 다르네."
"나로서는 잘된 일이니까 됐어. 꼴 좋다 임진우."
"그런데 그거. 계속 신경쓰였는데."
"뭘?"
시아는 당황하다 못해 입을 떡 벌리던 진우를 떠올렸다.
자기가 좋아하는 여성을 눈앞에서 채였다면 그 인간 말종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진우가 유한이를 괴롭히지는 않을까?"
운동으로 다져진 근육은 사실상의 흉기였다. 순박한 후배의 명치에 주먹이 박히는 광경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빈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안 할걸."
"왜 그렇게 생각해?"
"그 놈은 결국 '멋진 내 모습'에 반한거야. 즉 누가보기에도 잘못된 행동은 안한다는거지. 물론 그것도 몇 가지 예외가 있긴 하지만."
애초에 자신이 하늘을 좋아한다는 비밀아닌 비밀을 숨기려고 하는 그가 그렇게 공공연한 행동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만약 그 예외가 일어나면 어떻게 해?"
"뭘 어떻게 해. 경찰 불러야지."
유빈은 얼마 전 단체 채팅방에 올라왔던 사진 하나를 떠올렸다.
구멍난 벽.
동생이 화나게 해서 벽을 때렸더니 그렇게 됐단다. 미친 놈 같으니.
"아무리 그래도 당장 뭘 하지는 않을거고, 몇번 저러다가 꼭지가 돌면 의자 정도는 집어던지겠네."
"진짜?"
"저 놈은 작년에 책상도 집어던졌던 놈이야."
사유는 동아리 활동 시간에 모인 친구들이 죄다 딴짓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한결같이 미친 놈이었다. 제발 일관성 좀 버려라. 유빈은 그렇게 뇌까렸다.
그래도 뇌는 있는지 바닥에 내려쳐서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그가 가진 폭력성의 일단을 드러내기에는 충분했다.
"일단 당장은 다른 것부터 신경 써야하니까 난 모르겠다."
"다른 거?"
"중간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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