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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원수)를 다루는 바람직한 방법-23화 (23/31)

〈 23화 〉 미친개와 착한개와 견주

* * *

유빈이었다면 어떻게든 두 사람을 진정시키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럴 수 있을 만큼은 두 사람을 잘 알았다.

민재였다면 조용히 떨어져 없는 듯이 찌그러져 있었을 것이다. 그럴 만큼은 두 사람을 잘 알았다.

다년간의 교재를 통해 얻은 요령은 그 두 사람이 적절한 대처를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 둘이었다면 하늘과 진우 사이에서도 무난하게 버틸 수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도 이 네 명이 함께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것은 유한이었다. 임진우를 오늘 처음 만난 임진우 미경험자.

그는 이러한 상황에 무지했다. 뭐라도 해보겠다고 말을 걸었지만 두 사람 다 이미 유한은 안중에도 없었다.

"저, 저기! 두 분 다 진정하세요!"

아무리 필사적으로 두 손을 흔들어도 공허한 외침일 뿐이었다.

"내가 말이야."

머리칼이 곤두설 정도로 분노한 하늘이 눈을 확 치켜떴다.

그녀가 분노한 이유는 '의지가 약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아니었다. 그 부분은 사실 스스로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다.

그녀가 진우의 말을 참을 수 없었던 이유는 하필 그 말을 한 것이 '임진우'라는 인간말종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쩌자고 후배한테 소개했냐고? 그러게 말이다. 내가 왜 너 같은 새끼를 유한한테 소개해 줬을까.

일단 똥 묻은 개가 짖는게 기분이 나빴고, 자신이 겨 묻은 개가 되어버리는 상황에 마음이 상했다.

"분명히 말했지! 말하는 꼬라지 좀 고치라고!"

'좀 더 노력해 보는건 어떠냐.', '의지를 좀 가져라.'같은 수준이었다면 불편하긴 해도 어렵잖게 넘어갔을 것이다. 꼰대처럼 자기 잘난 맛에 훈수두는 걸 하루이틀 보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후배의 면전에서 이런식으로 까내리면 화가 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뭘? 있는대로 말하니까 찔려?"

유빈 가라사대 '이 새끼 말본세 안 고치면 언젠가 칼부림 한번 난다. 레알.'

실제로 임진우의 스토킹이 선을 넘었던 무렵, 하늘이는 호신을 위해 나이프를 휴대한 적도 있었다. 본인은 쓸 일이 생기지 않았던 것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지난 번 유빈이 그토록 말했던 '듣는 사람 기분 좀 생각하라'는 조언은 진작에 잊어버린 듯 했다.

"유빈이가 그렇게 말했으면 몰라. 넌 뭐 잘났다고 그래?"

"허? 유빈이든 나든 결국 똑같은 말이잖아. 너 사람 차별하냐?"

똑같을리가 없잖아 병신아. 하늘이는 가까스로 자제심을 발휘했다.

지금은 이런 멍청이를 상대하는 것 보다 시야 한구석에 웅크려서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바르작거리는 골든리트리버를 챙겨줘야 했다.

눈짓으로 잠시 기다리라고 신호를 보낸 하늘이는 유한의 팔을 잡아 일으켜주었다. 유한을 보내고 둘만 남는 것은 진우로서도 바라 마지않는 바였다.

"유한아, 미안해. 오늘은 이만 돌아가줄래? 다음에 다시 놀자. 먼저 가."

"하지만... 그럼 선배는요?"

유한의 시선이 하늘과 진우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그의 눈에는 두 사람이 살벌하게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늘이는 생각했다.

살벌하긴 한데 언제나 있는 일이라고.

"걱정 마. 우린 항상 이러니까."

정말 열받게도 그랬다.

유빈이 상대일 때의 진우는 항상 중간에 말을 말자며 끊어버린다. 그러나 유독 하늘이가 상대일 때는 그런 식으로 멈출 생각을 안했다.

어느쪽이 더 나은가? 그런 물음에 의미는 없었다. 그냥 나가 죽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응?"

"...네에."

개처럼 싸우는 모습을 후배한테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좋은 모습만 보여줘도 모자란 것이 인간관계 아닌가.

모처럼 만난, 눈빛에서 꺼림직한 기운을 느끼지 않은 남자애였다. 애가 착하고 순해서 앞으로 친하게 지내고 싶었다.

...게임도 잘하고. 나중에 점수를 올릴 수 있게 도와달라고 슬쩍 말해 볼 생각이었다.

어깨를 슬쩍 토닥여주니 그제서야 느릿느릿 움직이기 시작하는 유한.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던 진우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는데 생각보다 더 친근해 보였다. 마음에 안들었다.

"누가 보면 내가 괴롭힌 줄 알겠다?"

기가 찬다는 듯, 진우가 턱 끝으로 유한을 가리켰다. 여린 강아지는 아직도 벌벌 떨다가 흠칫 놀라 발을 헛디뎠다.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았다.

그 모습을 언외로 한껏 비웃어준 그는 '좋아하는 사람이 상대라도 잘못된 점은 분명하게 지적하는 자신'의 면모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유빈이 그런 그를 보았다면 속으로 한마디 했을 것이다. 소설 좀 그만 읽어, 라고.

스스로가 주인공이라는 온전한 믿음. 그것은 건전한 자기애의 범주를 세 발자국, 정확히 말하자면 그 백배 정도 넘어있었다.

이런 그의 정신 상태를 가장 간단하고 명확하게 정의한 단어를 꼽자면.

중2병이었다.

본질적으로는 자신의 오른팔에 흑염룡이 잠들어있다고 망상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었다.

보아라, 연적인가 싶었던 사내 놈이 보여주는 저 한심한 꼴을! 최대한 숨긴다고 숨겼지만 실실거리고 있는게 훤히 보였다. 그는 모종의 우월감을 느꼈다.

선량한 후배를 상대로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게 제 3자의 눈에는 얼마나 꼴사나울지. 그건 그가 고려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인식이 한발 늦었다.

"역시. 안돼."

"응?"

무력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유한은 입술을 짓씹었다. 여기서 도망가는 것은 쉬웠다. 말을 꺼낸 것도 하늘이고 언제나 있는 일이라고 하지 않는가.

얌전히 집에 돌아가서 한숨 푹 자면 다 잊고 웃는 모습으로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로?

그는 임진우를 잘 몰랐다. 조금 안타깝지만 김하늘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이렇게 싸우는게 정말로 항상 있는 일인지 알 수 없었다.

하늘이 그를 배려해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다. 정말 그렇다면 이 자리를 떠나는 것이야말로 최악의 선택이었다.

식은땀이 턱선을 타고 흘렀다. 조금 따뜻했던 날씨가 이 순간만큼은 찌는 듯한 더위로 다가왔다.

그녀를 두고 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저 임진우와 마주할 정도의 깡은 없었다.

결국 그는 도망치기로 했다.

"죄송해요 선배!"

"뭐? 야, 잠깐!"

여전히 어깨에 얹어있던 그녀의 손을 잡아 당긴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워하면서도 내심 진우를 상대할 생각에 기가 질렸던 그녀는 무심코 따라 뛰기 시작했다.

"야, 너네!"

"죄송합니다!"

뒤에서 들려오는 진우의 호통. 그러나 유한은 멈추지 않았다.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은 진우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두 개의 뒤통수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

"와."

입에 물고있던 빨대가 컵속으로 툭 떨어졌다. 시아는 제가 본 광경이 워낙 생경해서 눈두덩이를 슬쩔 문질렀다.

"풋, 푸훗, 크, 흐..."

맞은편 자리에 앉아있던 유빈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으려다가 반쯤 쓰러져 있었다. 엎어진 몸이 간헐적으로 들썩였다.

"저걸 도망치네."

"하, 하아. 요즘 쟤 덕분에 많이 웃는다."

진우와 하늘, 유한이 식사를 했던 분식집의 옆에 위치한 카페. 두 사람은 카페 안에서 일련의 사건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늘과 진우가 정면으로 충돌하기 시작했을 때는 아무래도 한탄을 금치 못했다. 기껏 놀러 나와서 상대 속을 긁는 그 작태가 참 불쾌했다.

새끼 강아지처럼 오들오들 떨던 유한을 주의깊게 살피면서 개입하는게 나을까 고민하던 무렵, 상황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골든 리트리버는 말이지."

유빈이 돌연 말을 꺼냈다. 맥락을 알 수 없는 첫머리였지만 시아는 잠자코 들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견종이고 성품이 온화해서 천사견이라고 불리기도 해. 시각장애인 안내견으로도 많이 쓰이고."

"그런데?"

"근데 이녀석은 원래 사냥견이야. 대형견종이라 전투력도 뛰어나고 인간 이외의 상대라면 이빨을 드러내기도 하지. 산책중에 다른 집 애완견을 물어죽여서 소송이 벌어지는 일도 있거든."

김하늘은 인간이다. 홍유빈은 인간이다. 윤시아도 인간이다.

그런데 임진우는 인간인가?

"지금까지는 착각하고 있었던 거야. 임진우가 인간이라고. 하지만 주인(김하늘)에게 감히 을러대는 미친개를 보고서 전의를 다진거지."

"전의라고 하기에는 도망쳤잖아."

"아직 미친놈인지 미친개인지 제대로 판단을 못했거든. 유한은 그냥 임진우가 무섭다고 도망친게 아니야. 성격이 착하면 애초에 싸우는 것 자체를 무서워해."

상대가 사람이라 싸우기 싫어서, 무서워서 도망을 쳤다. 하지만 그도 곧 이해할 것이다.

임진우를 사람 취급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흐."

"우와, 지금 정말 사악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거 알아?"

"알아."

사실 다소 의식해서 웃기도 했다. 뒤에서 음모를 꾸미는 복수의 화신이라면 이정도는 되어야하지 않겠는가.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정말 재밌는걸 봤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던 유빈은 보고 싶다는 시아를 단골 카페로 불렀다. 지금도 그는 문제집을 펼쳐두고 있었다.

간간히 떠들면서 시간을 보내던 와중에 골든리트리버와 광견의 목줄을 쥔 견주를 발견했던 것이다. 과연, 목줄을 채워도 위험한 건 변함이 없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주인 쪽이 묶여있는 것처럼 보였다.

굳이 따지고 보면 주인보단 포로, 인질이었다.

"기껏 나왔는데 공부만 하고 있는거야?"

시아가 불만스럽게 문제집을 두드렸다. 거꾸로 보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그녀는 풀 엄두도 못 낼 문제들이 수두룩했다.

"난 원래 공부하러 나왔어. 집은 힘들거든."

"집이 힘들어?"

"정확히 말하자면 30분 단위로 확인하러 오시는 어머니가 불편해서 그래. 도서관이나 카페는 에어컨도 있어서 시원하잖아. 우리집은 30도 넘기 전에는 절대 안 틀거든."

"으엑."

시아는 몸서리를 쳤다. 무슨 감옥에 갇힌 죄인도 아니고 그렇게 감시를 받아야 한단 말인가.

"괜찮아?"

그녀가 그렇게 물었을 때, 유빈은 잠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고민하고 있는 걸까. 시아는 어쩐지 유빈이 당황했다고 느꼈다.

"...솔직히 말하면 괜찮지 않아. 하지만 언제나 그랬으니까, 괜찮아."

"그게 뭐야."

"뭐긴."

이번에는 아까와는 달리 체념 가득한 쓸쓸한 웃음. 그는 카페인 가득한 커피향에 둘러싸여서 짙은 다크써클을 쓸어내렸다.

"내 18년짜리 인생이지."

말하고 보니 생각보다 비참했다. 다시 생각해보면 유치원 다닐 때와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빼야 하니까 대충 10년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했다.

괜찮냐고 물어봐 주는 사람도 참 오랜만이었다. 온기어린 한마디가 이리도 낯설줄이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시아는 유빈을 특별한 관계로 엮고 싶어했지만 이미 유빈은 그녀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와 있는 시간에만 유일하게 마음의 위안을 얻고 치유받을 수 있었다. 마치 유빈만을 믿을 수 있는 시아가 그렇듯이.

두 사람은 알게 모르게 닮은 부분이 있었다.

"걱정해 주는 것 만으로도 고마워."

"정말 별 것도 아닌걸."

"그러게. 별 것도 아닌데 말야. 그걸 해주는 사람이 진짜 없다."

공부하다 새벽에 흐느껴 울 때. 수업 중에 책상을 부숴버리고 싶을 때.

세상따위 망해버리라고 수 십번, 수 백번 저주를 퍼부을 때도.

결국 사람의 온기를 원하게 되더라. 인간은 결국 그런 생물이라고 유빈은 자조했다.

"너도 그리 맘 편하게 지내진 못하고 있을텐데. 나한테만 신경 써도 돼?"

이 와중에도 자신을 걱정하다니. 시아는 손가락을 쭉 뻗어서 유빈의 어깨를 쿡 쿡 찔렀다.

"난 너 말고 신경 쓸게 없어. 넌 자기 생각이나 해."

"알았어, 알았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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