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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원수)를 다루는 바람직한 방법-22화 (22/31)
  • 〈 22화 〉 괜히왔다

    * * *

    유한은 생각했다. 홍유빈, 도서부의 부장 형은 대단한 사람이라고.

    대화를 하다보면 언제나 말하는 바가 논리적이고 명료했다.

    업무를 할 때는 깐깐하고 엄하지만 그건 그가 가진 책임감과 성실성이 그렇게 드러난 것으로, 본래 성격이 무겁거나 무서운 것은 아니었다.

    다른 선배들이 놀 생각만 하고 일을 대충했기 때문에 더 그런 태도를 보이는 듯 했다. 다른 동기들은 그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빈을 무서워 했지만 그렇다고 싫어하지는 않았다.

    도서부원으로서 옳은게 누구인지는 분명했다. 일을 안하는게 잘못이지. 유빈도 동아리 활동 시간이 아니면 딱히 무언가를 시키거나 꾸중하지는 않았다.

    그 밖에도 공부를 잘 하고, 열심히 했다. 동아리 활동 후 남는 시간에도 틈틈히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을 길지 않은 시간 동안에도 몇번이나 봤다. 아까 들었던 성적대로라면 유빈은 유한이 아는 어떤 사람보다도 공부를 잘했다.

    간혹 모르는 문제를 가져가면 쉽게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잘 못 알아들어도 거절하거나 짜증을 내는 법이 없었다. 몇번 같은 부분을 반복해서 물어봐도 익숙하다는 듯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어른스럽다. 기껏해야 1살 차이가 날 뿐이지만 유한은 그렇게 느꼈다.

    그리고 지금.

    유한은 유빈에게 다시금 감탄했다. 희번덕 치뜬 무시무시한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마음 속 깊이 진심으로.

    "네?"

    약간 멍하게 반문한 유한을 앞에 두고 진우가 되는대로 비웃음을 터트렸다.

    "홍유빈 그 새끼도 참. 어쩌자고 후배한테 얘를 소개한건지 모르겠네."

    "뭐? 내가 뭐 어떤데 그래."

    "굳이 직접 말 해줘야겠냐? 후배 앞에서 괜히 존심 상할텐데."

    이 사람이랑 친하게 지낸다니. 어쩌면 부장 형은 부처가 아닐까. 유한은 빛살처럼 지나간 지난 몇시간을 떠올렸다.

    #

    먼 발치에서 반가이 손을 흔드는 하늘을 발견했을 때만 해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김하늘과 놀 수 있다. 아직 일개 후배에 불과한 주제에 감히 데이트라고는 생각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다가가면서 발견한 그런 그녀의 옆에 서 있는 사람. 조금 험상궂은 얼굴과 큰 체격이 특징적인 남자였다.

    처음에는 그냥 옆을 지나가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깨달았다. 예정에 없던 일행이 늘어났다고.

    짧은 스포츠 머리를 쓱 쓸어올린 새로운 선배가 인사를 건네왔을 때, 유한은 속으로 신음을 삼켜야 했다.

    임진우.

    유빈이 조심하라고 말한 그 사람이 바로 눈 앞에 있었다. 단 둘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실망보다 걱정이 앞섰다.

    유빈이 조심하라고 말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설마 때리진 않겠지?

    체격이 단단하고 다부진 인상의 연상. 자연스럽게 유한은 일진, 학교폭력, 조폭 등의 단어를 떠올렸다.

    그러나 그런 우려와는 다르게 진우는 활짝 웃는 얼굴로 악수를 청했다.

    세상에, 악수라니. 그런 식으로 인사를 하는 또래는 처음 만나봤다.

    어쩌면 생각보다 격식을 차리는 상대일지도 모른다. 딱 봐도 체육계 같고.

    "저, 선배? 이분은..."

    "아, 오늘 너랑 본다고 하니까 자기도 오고 싶다고 그러더라고. 괜찮지? 얘도 유빈이랑 친해."

    그건 저분이 오기 전에 물어 보셨어야죠.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도로 내려갔다. 단순한 친구 상대라면 한 소리 해도 부족하지 않은 상황이지만 이 사람은 예외였다.

    찡긋. 이럴수가. 선배가 자신에게 매혹의 눈짓을 날렸다.

    누가 그랬던가. 반한 사람이 진거라고. 미안함 반, 장난스러움 반이라는 성분의 윙크에 유한의 표정근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다 괜찮아요, 선배. 드릴게요, 내 마음의 프리패스.

    마음속으로 온갖 주접이 들끓었다. 김하늘이 들었다면 기겁을 했을 것이 분명했다.

    "네에."

    저도 모르게 늘어진 말꼬리. 그런 스스로에 화들짝 놀란 유한이 정신을 다잡았다.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니 어딘가 험악한, 재미있다는 듯이 비틀린 진우의 눈빛을 발견했다.

    등줄기가 쭈뻣 설 정도로 짙은 정욕. 남자의 시선은 명백히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자, 그럼 바로 가자."

    자연스러움을 가장한 손이 하늘의 어깨를 감쌌다. 유한의 눈썹이 꿈틀, 불편함을 숨기지 못하고 떨렸다. 무심코 튀어나가려고 한 손은 이성에 가로막혀 흔들렸다.

    "떨어져, 알아서 갈 수 있어."

    "아, 그래 그래."

    뻔한 수작이었다. 그에 대응하는 하늘이는 어깨에 얹어진 손을 툭 쳐냈다. 이쪽은 이쪽대로 익숙한 태도였다.

    조심해. 유빈이 남겼던 한마디가 또 한번 뇌리를 스쳤다.

    진우를 조심해. 대충 어떤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애초에 하늘이에게 연애감정이 없는 유빈, 시아와는 달랐다. 명백한 연적. 그리고 유한보다 하늘이와 친근한 관계.

    경계의 대상으로 삼기에는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였다.

    "어떻게 할래? 일단 점심부터 먹을까?"

    "시간상 그게 나을 것 같은데, 한이는?"

    "네, 저도 그게 좋을 것 같아요."

    "뭐 먹을래? 치킨?"

    진우는 당연하다는 듯이 치킨을 가장 먼저 물어보았다.

    항상 함께 다니는 친구들­진우, 민재, 시아, 유빈, 하늘­사이에서는 그것이 하나의 형태로 자리잡아 있었다. 일단 모두가 치킨을 좋아하는 편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늘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치킨을 먹고 싶지 않았다.

    "치킨은 얼마전에 먹었어."

    "그래?"

    힐끗. 진우의 시선이 유한을 향했다. 어쩐지 곱지 못한 눈빛에 유한이 움츠러들었다.

    "넌 뭐 먹고 싶은거 있냐?"

    "저는..."

    이 근처 상가에는 맛과 가격이 적당한 가게가 몇 개 있었지만 지금 마땅히 떠오르는 곳은 없었다. 섣불리 골랐다가 안좋은 인상을 남기면 평생 후회할 것이 분명했다.

    우물쭈물거리며 생각을 거듭하던 유한은 무심결에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에도 맡은 적 있었던 향기가 그를 이끌었다. 고소하면서 깊은, 풍부한 커피의 냄새.

    아무 말 없이 걷기 시작한 유한의 뒤로 두 선배가 따랐다. 어딘가 추천할 만한 가게로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의식하지 않고 끌려간 그의 시선이 작은 카페에 가 멈췄다. 오전에 유빈이 마시던 커피와 완전히 같은 향기가 그곳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기야?"

    "네?"

    진우가 등을 툭 건드리는 순간에서야 한이가 정신을 차렸다.

    일났다. 식사를 하잡시고 데려온 곳이 카페라니. 먹을 것이 없진 않겠지만 식사에 잘 어울리는 장소는 아니었다.

    "괜찮네. 너도 괜찮지?"

    "어. 들어가자."

    두 사람의 시선이 묘하게 어긋난다 싶은 유한은 주위로 고개를 돌렸다.

    카페 옆에 분식집이 있었다.

    "아..."

    아무렴 잘 풀렸으면 됐다. 유한은 처음 와본 분식집이 맛있기를 빌며 두 사람을 따라 들어갔다.

    #

    다행히 맛있었다.

    첫 입을 먹을 때까지 바짝 긴장하고 있던 유한은 사르르 풀어진 마음으로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그럼 이제 뭐할래?"

    "어차피 갈 만한 곳은 노래방이나 피방 정도 뿐이잖아. 골라."

    "그럼 피방으로."

    선택에 망설임은 없었다. 김하늘이 무엇보다 좋아하는 것, 그것은 게임. 오늘 들어 가장 활기찬 모습이었다.

    그녀가 단호하게 결정을 내리니 남자 둘은 군소리없이 따라갔다. 여왕님이 원하신다는데 반대가 나올 일이야 있겠는가.

    본인이 알았다면 노발대발할 생각을 품고, 두 남자는 마님 뒤를 따르는 머슴처럼 걸었다. 둘 다 코가 꿰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어떤 의미에서는 머슴보다 누렁이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뭐할거야?"

    "언제나 하던 그거지. 한이도 한데."

    '그거'란 1년 전에 서비스를 시작한 FPS 게임을 말하는 것이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홀린듯이 빠진 하늘이는 친구들 중에서도 가장 긴 접속시간을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유빈이는 두 번밖에 못 해봤다. 집에 있는 컴퓨터는 아버지가 취한 조치로 인해 일반적인 게임을 구동할 수 없었다.

    PC방? 갈 수 있을리가 없었다.

    친구들 중에 게임을 못하는 것은 그 뿐이었다.

    "그래?"

    "네. 친구들이랑 자주 해요."

    그렇게 말은 하지만 사실 유한은 상당히 자신이 있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그가 가장 게임을 잘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게임 내에서) 온갖 활약을 펼친 끝에 열렬한 환호를 받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런, 행복한 상상을 해 보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가 무슨 상상을 했든 임진우가 있는 시점에서 그것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없었다.

    "야, 이 씨발아!"

    쾅! 화를 참지 못하고 키보드를 내려치는 소리에 유한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세 사람이 하고 있는 게임은 6명이 한 팀이 되는 게임이었다. 그 말은 즉, 이 셋 외에도 3명의 누군가와 함께 게임을 하게 된다는 듯.

    그리고 온라인 랜덤 매칭의 특성상 그게 항상 정상인은 아니었다.

    인게임 보이스 메신저를 통해 대차게 싸우는 두 사람. 쩌렁쩌렁한 고음에 옆 자리에 앉은 하늘이 다 고통스러울 지경이었다.

    [아, 진짜 답답하네. 저 안함. 수고요.]

    안 그래도 패색이 짙었던 게임에서 한명이 그렇게 나가니 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진우는 피씨방의 책상을 걷어차며 일어났다. 거칠게 머리를 긁는 옆에서 하늘이 진우의 팔을 찰싹찰싹 때렸다.

    "야 이 미친놈아. 여기 피씨방이야."

    "어쩌라고, 개 빡치네 저 새끼."

    가끔 벌어지는 익숙한 상황에 하늘이 한숨을 흘렸다. 이놈의 다혈질 양아치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분노를 고스란히 발산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부르지 말걸.

    하늘의 시선이 두려움에 떠는 유한을 슬며시 외면했다. 괜히 이런 인간이랑 아는 사이로 만들어서 미안한 기분마저 들었다.

    집중되는 주위의 시선. 피씨방 아저씨의 시선이 매서워지자 세 사람은 도망치듯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나온 상황. 하늘의 심기가 불편한 것도 당연했다.

    하늘이 원망스럽게 노려보는 것을 태연하게 넘기며 앞장선 진우가 던진 물음이 사단의 시작이었다.

    "너 공부하겠다는 건 어떻게 됐냐?"

    "공부? 무슨 공부?"

    "왜, 수학이나 국어 같은거 공부한다며."

    "아, 그거."

    2학년으로 올라오면서 1학년 때 성적을 돌이켜본 그녀는 스스로가 너무 놀았음을 깨달았다.

    미술계열 진학을 지망하고 있지만 성적이 그렇게 바닥이어서야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조금씩이라도 뒤쳐진 학력을 매꾸기 위해 공부하겠다고 선언한 것이 약 2달 전의 일이었다.

    "잊고 있었구나? 내가 그럴 줄 알았다."

    "아니야. 하고 있었어."

    "얼마나? 그래봤자 문제집 한권도 못 끝낸 거 아니야?"

    "으음."

    그건 사실이었다. 안하던 공부가 그리 쉽게 될 리 있나. 문제집 펴고 글자를 들여다 보면서 세월아 네월아.

    정신 차려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덮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으이구. 내가 그럴 줄 알았다. 공부 하지도 않을거면 그런 소리를 말던가. 의지가 너무 약한 것 아니야?"

    "시끄러. 네 알바야?"

    "유한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네?"

    여기서 이야기는 첫머리로 돌아간다.

    "홍유빈 그 새끼도 참. 어쩌자고 후배한테 얘를 소개한건지 모르겠네."

    "뭐? 내가 뭐 어떤데 그래."

    "굳이 직접 말 해줘야겠냐? 후배 앞에서 괜히 존심 상할텐데."

    유한은 직감했다.

    오늘의 이 모임은 정말 되는 것 하나도 없는 귀문이 될거라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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