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 네게 기대할게
* * *
"자, 회의를 시작하자."
"네?"
주말 오전. 도서관 지하의 휴게실. 오래된 환풍기는 진작에 제 기능을 상실해 탁한 공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옆 테이블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는 것을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유빈. 유한은 그런 그를 앞에 두고 긴장에 굳어 있었다.
"형, 저는 왜 부르신 거에요? 회의는 무슨 말이구요?"
아침에 걸려 온 전화 한통. 다짜고짜 도서관 휴게실로 오라는 부장 형님의 호출이었다. 영문을 모른채 도착한 그곳에서 한창 공부를 하고 있던 유빈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난 말이야."
"네."
도서관 휴게실은 비밀스런 이야기를 하기에 충분한 장소였다. 그의 친구들 중에 주말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할 만큼 기특한 인물은 없었다.
그나마 민재라면 책을 빌리러 올만 했지만 휴게실은 볼일이 없는 한 들르지 않았다.
주변은 적당히 시끄러워서 다른 사람들이 대화를 들을 일도 없었다. 애초에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에게 관심이 없었다.
"원래는 너의 연애에 크게 간섭할 생각이 없었어. 그래서 목요일에 소개만 시켜줬던거고."
"네..."
"하늘이는 연애를 할 마음이 없어. 이전에 몇번 남녀관계로 데인 적이 있어서 거의 해탈해버렸다고 해도 될 수준이야. 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고."
너무 예뻐서 문제인 사람이 있다니. 유빈은 그런 경우가 있을 것이라고는 하늘을 만날 때까지 상상도 못했다.
"그래서. 너를 너무 도와주면 하늘이에게 미안한 짓을 하는게 아닐까 생각했거든."
"그 이야기를 제게 해 주시는 건, 제가 선배를 좋아하면 안된다고 말씀하시려는 건가요?"
가녀린 후배의 눈망울이 크게 흔들렸다. 자신보다 체격으로 따지면 더 큰 녀석이지만 분노도, 원망이나 반발도 없이 울상을 짓는 얼굴이 어찌 가녀리지 않을 수 있을까.
어쩌면 포기를 말하려는 것 같은 모습.
하지만 그렇다고 유한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 것은 아니었다. 풀이 죽은 골든 리트리버는 아직 꼬리를 말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어도 될까요?"
"내가 마음대로 대답해 줄 수는 없어. 하늘이 본인이 허락한게 아니라면."
이렇게 설명해 주는 것도 본래는 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유빈은 타인의 개인사를 마음대로 떠벌리 고 싶지 않았다.
"그렇네요."
입을 꾸욱 다문 유한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침울한 기색이 역력했다.
"넌 아직 하늘이랑 그렇게 친한 것도 아니잖아? 만난 건 이제 겨우 두번이지? 사실상 첫눈에 반한거고."
"네. 그렇긴 해요..."
"잘 생각해 봐."
김하늘과 맺어지는 건 수 많은 고난이 약속된 가시밭길을 택하는 것과 같았다. 설령 이어지더라도 누구나가 상상하는 아름다운 연애와는 거리가 멀 것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아무리 하늘이 예쁘고 온갖 남자가 꼬인다지만 그것만으로 관계가 파탄에 이르는 것은 이상했다.
즉 김하늘에게도 문제는 있다는 뜻이다. 다만 상대 남자들이 워낙에 이상한 놈들이었기 때문에 부각되지는 않았던 것 뿐이었다. 그녀에게는 사실 정상적인 남학생이 상대였다고 해도 곧 헤어지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결점이 몇가지 있었다.
만약 이대로 둘이 이어진다고 해도 첫 만남 때 씌워진 콩깍지가 떨어졌을 때, 유한은 여전히 하늘이를 좋아할 수 있을 것인가?
유빈이라고 해서 한이를 잘 아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유한과 대화를 나눈 것은 뽑을 때의 면접, 세 번 있었던 동아리 시간, 그리고 목요일 점심시간 두 번 뿐이었다.
유한이 어떤 인간인지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은 가지지 못했다. 그가 정말로 하늘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면 지금 선을 긋는게 모두를 위한 일이었다.
"단순히 사이 좋은 선후배로 남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거야."
"선배는."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거죠?
속에서 슬그머니 반항심이 고개를 들었다. 떠오르는 것은 그가 감히 좋아한다는 감정을 품은 연상의 여학생. 한 학년 아래인 자신도 알 정도로 유명한 미인이었다.
첫사랑. 그래, 첫사랑이었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가슴 벅찬 떨림.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한동안 떨림을 숨길 수 없었다.
처음에는 감기라도 걸린 줄 알았다. 자신이 어디 잘못된 것은 아닌가 생각했을 정도로 그 변화는 극적으로 찾아왔다.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하늘과 친해 보이는 유빈을 찾아갔다.
이름도 모르는 상태에서 한번 본 것만으로 사랑을 논하다니.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가벼운 것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가 아는, 그때까지 상상해왔던 사랑이란 좀 더 숭고하고 아름다운 감정이었다. 긴 시간을 들여 서로에 대한 마음을 키운 한 쌍이 맺어지는 것.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랑이었다.
그에 반해 유한이 느낀 것은 들불처럼 일어 다음을 약속하지 못하는 감정. 그 순간을 빛내기 위해 타오르는 캠프 파이어처럼 뜨겁고 거친 불꽃. 어디서 온건지 알 수 없는 유성이었다.
유성. 그랬다.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 그 찬란한 흑발을 목도했을 때. 지나치듯이 눈을 마주했던 황홀의 순간. 유한은 비처럼 쏟아지는 별을 마주했다.
어찌 눈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유한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필연이었다.
그러니 존경하는 선배의 말에 대한 답 또한 필연이었다.
"죄송합니다."
정면에서 거절을 들었지만 유빈은 한 점 동요도 없었다.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머금은 그가 물었다.
"뭐가?"
"저는 포기할 수 없어요.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그래요."
불끈. 어느새 쥔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제가 마음을 돌릴 수 없을지도 몰라요.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차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거절을 당한다 해도 그걸 말하는 건 김하늘 선배에요. 형이 아니라."
"그 과정이 서로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고 해도?"
"그러니까 이건 제 이기심이에요."
설령 남는 것이 재 뿐이라고 해도.
장작은 불태우기 위한 것이었다.
"선배가 상처입지 않길 바래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그래도 전 포기할 수 없어요."
"우와. 충견계 순진 연하 다정공이라고? 이런 사람이 현실에 있을 줄은 몰랐는데."
"네?"
"큼큼. 아무것도 아니야. 일단 네 이야기는 알겠어. 하지만 네 생각중에 한가지만 정정해도 될까?"
유빈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거미줄에 걸려든 가련한 나비를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난 네게 포기하라고 말 한적이 단 한번도 없어."
"네?"
"그러고보면 인정해 버렸네? 하늘이를 좋아한다고."
"...네?"
분명히 그렇게 해석될 여지가 있게 행동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덥썩 미끼를 물 줄은 몰랐다. 멍하니 대화를 되새김질하는 유한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하하하!"
"우, 웃지 말아주세요!"
"아, 진짜 웃기다. 오랜만에 크게 웃었네. 덕분이다야."
마음껏 오해해준 덕분에 조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유빈은 기특하다며 유한의 머리를 해집었다.
"야, 내가 아무리 친구라지만 부탁받지도 않은 주제에 일일이 찾아가서 좋아하지 말라고 하겠어? 그건 오지랖 이전에 건방진 짓이야."
그와 비슷한 짓을 하고 있는 임진우는 분명 정상이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유빈은 다시금 (전)친구의 무도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일부러 헛갈리게 말한건 네 속내가 궁금해서였어. 그리고 좀 놀려주려고."
"혀엉..."
"미안."
전혀 미안하다고 느끼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럼 다시 맨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갈까. 무슨 회의인가, 그거야 당연히 너의 연애사업 계획에 대한 회의지."
"하지만 형이 아까 제 연애에 간섭하지 않으려고 했다고 하셨잖아요."
"마음이 바뀌었어. 개인적인 이유가 이번에 생겼거든."
"개인적인 이유요?"
유한이 고개를 기울였다. 도대체 무슨 사정이 있으면 남의 연애를 돕게 된단 말인가. 그로서는 상상도 가지 않았다.
"네가 알 필요는 없어. 중요한 건 내가 널 돕겠다는 거지."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어도?"
"하지 않았어도. 굳이 싫다고 한다면 안할게. 싫어?"
자신의 힘만으로 사랑을 성취하고 싶다는 마음은 분명히 있었다. 어린아이 특유의 치기어린 반발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이루고 싶었다.
"싫진 않아요."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못해 오히려 그만큼 간절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빈은 속으로 '청춘'이라는 두 글자를 떠올렸다. 자신에게는 죽어도 가까워질 수 없는 단어였다.
"내가 몇가지 지뢰를 알려줄게. 그것만 안 밟아도 많이 도움이 될거야."
"지뢰요?"
"지난 몇번의 사건으로 하늘이가 마음 속에 만들어둔 '절연 기준'이라는게 있거든."
"엑."
농담 같지만 진짜였다. 그 예시로 '게임을 하는 것에 간섭하지 않기',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기' 등이 있었다. 어긴다고 당장 연을 끊는 것은 아니지만 호감이 눈에 띄게 팍팍 깎였다.
"대충 5개 정도 어기면 게임 오버. 디 엔드. 수고하셨습니다. 안녕히가세요. 너의 연애는 슬픈 끝을 맞이하겠지."
"형, 묘하게 즐거워 보이는데요."
"기분 탓이야 기분 탓."
그렇게 말하는 유빈은 실실 웃고 있었다. 가련한 후배는 장난감이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일단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가르쳐줄게. 가장 명심해야 하는 거야."
"가장 중요한 것."
어쩌면 복수의 본격적인 시작일지도 모르는 한마디. 유빈은 또박또박 끊어 내뱉었다.
"임진우를, 조심해."
어째서일까. 그를 언급하는 유빈의 표정이 전에 없을 정도로 진지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눈빛에서 슬픈 기색이 느껴졌기 때문일까.
처음 듣는 이름이지만 단단히 뇌리에 박혔다.
"임진우... 요?"
"있어. 그런 쓰레기가."
쓰레기라고 부르는데에 망설임은 없었다
"있다가 오후에 하늘이랑 놀기로 했지?"
"어? 어떻게 아셨어요?"
"하늘이한테 들었어."
가방에서 보온병을 꺼낸 유빈이 뚜껑을 돌려 열었다. 짙은 카페인의 향기. 진하게 내린 커피가 찰랑거렸다.
"가면 아마 임진우도 있을거야. 어떤 녀석인지는 굳이 말 안할게. 내가 가르쳐주면 너무 욕만 할 것 같아서 안되겠어."
욕만 할 것 같다는 건 무슨 말일까. 냉정침착하고 일에 엄격한 부장 형의 인상에 '사석에서는 생각보다 털털함'과 '말투가 직설적이고 장난기가 있음.'이라는 문장이 추가되었다.
"우선은 하늘이를 잘 지켜봐. 하늘이의 외모 이외의 부분에서도 매력을 느낀다면 그건 단순한 콩깍지에서 초 합금 강철 콩깍지가 될 수 있을테니까."
"부장 형은 되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냉정했지만 차갑지는 않았다. 살갑다는 인상은 없었지만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자주 눈가를 찡그리고 짙은 다크써클을 문지르곤 하는데 무섭거나 사납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본래 가지고 있는 인덕 탓일까.
"이상한 사람이네요."
"이상하다는 건 뭐야. 기왕 왔으니까 물어볼 것 있으면 물어봐.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다 했으니까 흥미 없음 돌아가고."
자신이 할 말은 다 했다며 커피를 벌컥 들이킨 유빈은 다시 참고서를 펼쳤다. 이른 오전부터 앉아 있었던건지 그 옆에는 이미 풀이가 끝난 문제지가 쌓여있었다.
"형은 공부 잘해요?"
"못하진 않아."
"1학년 기말 성적은 어땠어요?"
"전과목 평균 1.4등급."
"...네?"
"평균 1.4였어."
1학년 전체 학생 중에서 평균으로 따지면 2위였다.
"못하진 않는다고 할 수준이 아니잖아요!"
"야, 이 정도는 노력하면 할 수 있어. 우리 학교 애들 중에 공부 열심히 하는게 몇명이나 된다고."
등급은 상대평가이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과 비교해서 성적이 높으면 높은 등급이 나온다. 그런데 이 학교는 일반적인 인문계 고등학교로 한 반에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은 약 3명 내외 뿐이었다.
"그리고 각 과목에서 따지면 등수는 그렇게 안 높아. 어떤 과목이든 그 과목을 잘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니까."
"그래도 대단해요."
"공부하다가 모르겠는 거 있으면 가져와. 1학년 범위면 문이과도 나눠져 있지 않으니까 대충 설명해 줄 수는 있어."
"네!"
유한의 성적은 평균에서 조금 아래인 수준. 간단한 숙제도 막히는 경우가 꽤 있었다.
잠시 유빈이 문제를 푸는 것을 보고 있던 한이 유빈의 옆에 붙어 있던 작은 체구의 여학생을 떠올렸다.
"그러고보면 전에 같이 있던 분은 누구세요? 선배 맞죠?"
"아. 윤시아. 2학년이야. 도서관에 자주 오는 편이니까 앞으로도 몇번 보겠네."
"혹시 여자친구에요?"
"어......"
부정하기에는 찔리는 구석이 너무 많았다. 그렇게 호의를 받고 있는데 덮어놓고 아니라고 해도 되는 것인가. 유빈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럴 때 쓰기 좋은 말이 있지 않던가.
"썸이야."
머릿 속의 시아가 아니라고 정강이를 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세히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개인적인 사정이 얽혀있는 것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