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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원수)를 다루는 바람직한 방법-20화 (20/31)
  • 〈 20화 〉 어머니를 욕 할수는 없잖아

    * * *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 숨결이 닿아 간지러웠다.

    "별 일 없었어."

    귀를 쓱 문지르며 평정을 가장한 대답에 시아의 눈매가 불만스럽게 일그러졌다.

    지금 수업은 중간고사 진도를 다 나가서 자습 시간이었다. 시아는 유빈의 짝인 강예림에게 양해를 구해 자리를 바꾼 상태였다. 물론 걸리면 혼날 짓이었다.

    평소 '귀엽고 소극적임'이라는 평가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법이 없던 그녀였다. 본래라면 이런 행동은 2학기 기말이 끝난 뒤, 선생님을 포함한 모두가 풀어진 뒤에나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몇 없는 예외였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원인은 눈 앞의 이 남자, 홍유빈 때문이었다. 아침부터 저기압이더니 두통에 현기증까지 있는 만신창이. 그런 주제에 꿋꿋하게 자리에 앉아서 잠도 안자고 문제집과 씨름을 하고 있었다.

    그것 자체는 언제나 있었던 일이라고 해도 오늘은 유난히도 힘들어 보였다. 아무리 피곤해도 그걸 내색하지 않으려고 하던 그가 고통스럽게 일그러지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봐, 지금도.

    바삐 노트 위를 달리던 샤프가 불현듯 멈추더니 끝 부분의 심이 부러졌다. 순간적으로 찾아온 어지러움에 힘이 들어간 탓이었다. 툭, 투둑. 튕긴 샤프심이 책상 모서리에 떨어졌다.

    유빈은 그마저도 익숙하다는 듯 동요 없이 샤프심을 갈아끼웠다. 그걸 보고있는 시아는 속이 터졌다. 오죽하면 공부를 시켜야 할 담임마저 좀 쉬어가면서 하라고 당부할까.

    몇번 더 물어보고, 찔러보고, 간지럽혀도 봤지만 묵묵부답인 유빈. 시아는 결국 본인에게서 이야기를 듣는 것을 포기했다. 심통이 난 그녀는 책상 위에 폭 업드려서 유빈을 빠안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책상이 차가워서 기분 좋았다.

    그 명백히 불만을 품은 시선을 무시한 채, 유빈은 숙제에 몰두했다. 차가운 태도를 고수하는 건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녀가 자신이 겪은 일은 모르길 바랬다. 하늘이야 워낙 진우와 얽히는 일이 많아서 바로 알아챘지만 시아는 달랐다. 그녀에게 진우는 짜증나는 같은 반 남학생 정도일 뿐이었고, 그렇게 친하지도 않았다.

    유빈이 어떤 취급을 당했는지 알면 그녀는 함께 화를 내줄 것이다. 복수하겠다는 그의 말에 찬성하며 잘 생각했다고, 자신도 돕겠다고 해 줄 것이다.

    그래서 유빈은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건 결국 시아를 끌어들이는 일이 될 테니까.

    애초에 사람의 감정은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늘과 한이를 이어주겠다는 계획부터가 반즈음은 운에 맡겨 있었다.

    "정말 말 안해줄거야?"

    "별 일 없었다니까."

    하늘이는 더 이상 연애를 하기 싫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어쩌면 그가 이렇게 머릿속으로 온갖 계획을 짜고 있는 것은 다 헛짓거리 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후려 칠까?

    그 후에는 개처럼 맞겠지만 적어도 얼굴에 한방 날리는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잘 하면 두대 정도는 더 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순간적으로 강렬한 유혹을 느꼈지만 곧 그만 두었다. 아무리 화가 났어도 아픈건 싫었다. 그가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아픔은 예방접종을 위한 주사기 바늘 정도였다.

    폭력은 나쁜 것이다. 그는 얌전히 단념하기로 했다.

    빙글. 손 위에서 샤프가 한바퀴 돌아갔다.

    "요즘도 딱 언제나처럼 힘든 정도고, 오늘은 피로가 쌓여서 좀 그런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부모님이랑 무슨 일 있었어?"

    "절대 안 믿네."

    그렇게 안 좋아 보이나. 유빈은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서 거울을 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분명 아침에 씻을 때는 평소처럼 곧 죽을 것 같은 면상이었는데. 어라, 그게 문제인가?

    어쩐지 평소보다 공회전하는 사고에 고개를 황급히 흔들었다. 멍한 기분이었다.

    "그거야말로 자주 있는 일이잖아. 이제와서?"

    "으응..."

    시아는 석연치 않다는 듯 신음을 흘렸다. 작게 볼을 부풀리려고 했으나 책상에 눌려 있어서 실패했다.

    "그럼 하늘이한테 물어볼래."

    아침에 하늘이와 대화하는 것을 본 모양이었다. 유빈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꼭 알아야겠어?"

    "알고 싶어."

    "왜?"

    "내가 널 도울 수 있다면 날 더 좋아하게 될 수 있을테니까."

    지극히 그녀다운 이유였다.

    "나 같은 녀석에게 그런 말을 하면 못써. 가슴이 두근거리잖아."

    "어머, 잘됐네. 그걸 바랬거든."

    다른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문제를 풀던 그의 손이 멈췄다. 아까처럼 어지러워서가 아니라 문제를 다 풀었기 때문이었다.

    힐끗 종이 위를 확인한 시아가 속으로 기겁하면서 시선을 돌렸다. 문제 풀이 과정으로 빽빽했다. 하필 수학이라니.

    그녀는 특별히 공부를 못한다고 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수학은 예외였다.

    책상 위를 정리한 유빈은 마음을 돌렸다. 그래, 어떻게 해서든 알고 싶다면 말해주면 된다.

    지나치게 개입하려고 하면 그때 그가 말리면 되는 일이었다.

    "진우가 나한테 무슨 짓을 하든 잘 참아왔는데, 어제 딱 한마디 들으니까 참을 수가 없더라고. 그것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았어."

    "뭐라고 했는데?"

    "어제 밤에 전화를 했는데, 나더러 싸가지가 없데."

    "Pardon?"

    안 쓰던 영어까지 쓰는 걸 보면 시아가 상당히 어이없어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속닥속닥 떠드는 사이에도 대외적인 이미지를 위해 표정을 고정하고 있던 그녀. 그 가면 한 구석에 금이 간 것 같았다. 슬슬 휘어져서 웃음을 흘리던 눈꼬리가 확 치솟았다.

    "누가 누구더러?"

    "걔가, 나한테."

    "뭐라고?"

    "싸가지 없다고."

    자신의 입으로 다시 말해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이래보여도 상당히 예의를 지키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말을 들으니까 얘가 날 친구로 생각하는게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어. 써먹기 좋은 부하나 도구라고 여기는게 아닐까 싶었지. 그래서..."

    입 밖으로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부모님이나 동생, 하늘이에게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시아에게 그런 속마음을 마음편히 내뱉을 수 있는 것은 어째서일까.

    누군가는 알아주길 바랬다. 내가 이렇게 힘들다고 푸념이라도 좀 하고 싶었다. 유빈은 새삼스럽게 자신이 정말 별 것 아닌 18살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꼈다.

    어른스러운 척, 착한 척 해도 본질은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어.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지. 그 전에 어머니한테 한 소리 들은 것도 있고 해서. 그대로 쓰러져서 잤어."

    네가 그렇게 매달릴 정도로 대단한 사람은 아니라고. 솔직히 부담스럽다고. 유빈은 그렇게 느끼는 스스로를 자각했다.

    친구에 대한 우정, 어쩌면 움트기 시작했을지 모르는 호의의 밑바닥에는 그런 감정들이 숨어 있었다.

    그는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 착한 행동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을 볼 때는 언제나 미간에 주름을 잡는 어머니. 그녀가 바라는 것.

    홍유빈은 좋은 친구이자 착한 아들이어야 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이번에도 그냥 넘어갈거야?"

    "아니. 친구도 아니라면 더 어울려 줄 필요는 없지."

    만약 홍유빈이 어머니의 바람대로의 아들이었다면.

    어제 마주했던 악마의 표정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는 어머니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은 호시탐탐 그의 목숨을 노리는 마귀의 얼굴 뿐이었다.

    "이번에는 조금 다를거야."

    미안하다.

    유빈은 속으로 진우에게 한 마디의 사과를 남겼다. 그것은 진우에게 배풀 수 있는 마지막 양심이었다.

    검게 타오르던, 깊고 깊은 감정의 한 가운데에 있는 것은 진우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굳이 비율로 따지면 1 : 2 정도였다. 어머니의 탈을 쓴 악마가 그의 안에서 똬리를 틀었다. 음침한 웃음소리.

    이 복수는 말하자면 화풀이였다. 착한 아들이 되지 못한 그가 되먹지 못한 친구를 샌드백 삼아 휘두르는 주먹.

    "아무래도 난 착한 사람은 되지 못할 것 같아."

    "이제와서?"

    "응. 이제와서."

    "어떻게 할건데?"

    "일단 김하늘이랑 유한이 친해지게 만들거야."

    "그리고?"

    "걔네들이 꽁냥거리는걸 진우한테 하나하나 알려줘야지."

    "우와아."

    복수라기보단 괴롭히는 것에 가까운 짓이었다. 유빈이 악의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시아로서는 신선하게 느껴지는 일면이었다.

    "아마 진우라면 둘 사이를 방해하려고 하거나, 나를 통해 훼방을 놓으려고 하겠지."

    "정말? 그렇게까지 할까?"

    "무조건. 절대. 정말로. 진짜."

    유빈은 확신과 함께 단언했다.

    "나중에는 나한테 뭐라고 할거야. 자기가 하늘이를 좋아한다는 걸 밝힐 수는 없으니까 '왜 저런 녀석을 착한 후배한테 소개시켜줬냐'는 투겠지."

    "자기 친구를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진우도 대단하다."

    "이미 나한테도 몇번 비슷하게 말 했어. 그런 여자애랑 왜 친하게 지내려고 하냐고. 자기는 친해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으면서 참 이상한 소리 한다. 그치?"

    그렇게 혹평을 하면서 자신은 가까워지려고 별 짓을 다한다. 누가 봐도 모순적인 태도였다.

    "그리고 최후의 최후에는 진우가 직접 따지겠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연애는 안하려고 한게 아니었냐고. 물론 하늘이랑 한이가 사귀게 되었을 경우의 이야기야."

    그것만큼은 유빈이 예상할 수 없었다.

    그는 조금 머리가 좋을 뿐 사람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면전에다 대고 한 마디 해줄 수 있으면 좋겠네. 맞을지도 모르니까 안 할거지만."

    "내가 도울 만한 일이 있을까?"

    "넌 옆에서 팝콘이나 먹어."

    "하지만 나도 그 녀석한테 한 방 먹여주고 싶단 말이야."

    시아도 진우에게 쌓인 것이 많았다. 그녀는 주로 유빈과 붙어다녔고, 자연스럽게 진우와도 자주 마주쳤다.

    대화 좀 하려다가 분노로 가면을 벗어던질 뻔한게 몇번이었던가. 그녀에게 동기는 충분했다.

    벌떡 몸을 일으키고 허공에 주먹질을 하는 시아의 모습은­그녀에게는 상당히 실례인 이야기지만­앙증맞아 보였다.

    "진정해."

    "진정하게 생겼어?"

    휙 돌아본 그녀는 싱긋 웃어보이더니 핫케이크 위에 올라간 시럽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 빌어먹을... 음, 큼. 잘 걸렸다!"

    "목소리로 얼버무리려고 해도 의미 없는 수준 아니야?"

    "조용히 넘어가.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는 건 나뿐만이 아닐걸?"

    시아는 손가락을 하나 둘 꼽다가 두 손을 쫙 폈다. 가는 열 손가락이 눈 앞에서 흔들렀다.

    "적어도 열명은 넘어. 내가 아는 범위에서만."

    "그렇게 원한을 품은 친구들이 많아?"

    "내가 모를 뿐이지 더 있을 거라고 생각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하늘이였다.

    한창 때의 여고생이 연애를 돌보듯 하기까지 얼마나 큰 우여곡절이 있었을 것인가.

    진심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녀는 입버릇처럼 진우가 죽어버리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다. 호신용이라며 나무로 만들어진 나이프를 가지고 다니면서 몇번 진우를 찌르려 했던 적도 있었다.

    장난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유빈은 심각하게 계획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만약 그가 진우를 살살 긁다가 그 영향이 엄한 방향으로 터지면 큰일 난다.

    하늘이가 정말로 진우를 찔러버린다면?

    진우는 그래도 싸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잘못하면 하늘이가 범죄자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꼭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줘.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알았어, 알았어."

    하늘이에게 직접적으로 무언가 말해주는 일은 유빈보단 시아가 적합하긴 했다. 동성이라서 가질 수 있는 연대감도 있을 것이었다.

    두 사람이 마주보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그때. 시아의 머리 위로 출석부가 떨어졌다.

    "아야!"

    "그만 떠들어라 욘석들."

    담임 등장. 생각보다 목소리가 커졌나보다.

    두 사람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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