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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원수)를 다루는 바람직한 방법-19화 (19/31)
  • 〈 19화 〉 착한 놈이 화나면 무섭다

    * * *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응?"

    우연찮게 교실에서 마주한 두 사람은 기묘한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이른 시간. 자리에 있는 학생들이 거의 없는 상황. 유빈은 정말 인사 외에는 아무런 말 없이 하늘이를 보고 있었다. 쏘아 본다고 표현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였다.

    "유빈? 왜요?"

    "......아니요."

    어제 진우와의 통화는 하늘이 유한에 대한 것을 진우에게 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에게 화를 내는 것은 잘못된 일이었다.

    유빈은 화가 났지만 그렇다고 이성을 놓지는 않았다. 그녀가 진우를 상대로 다소 안이했던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걸 탓할 수는 없었다. 후배를 알게 되었다는 말 하나에 진우가 미쳐버릴 것이라고 그녀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러므로 그의 분노는 오롯이 진우를 향하는 것이 옳았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유빈은 힘 없이 내뱉고는 유령처럼 창백한 안색으로 제 자리를 찾아갔다.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자마자 엎드리는거야 언제나 있는 일이었지만 오늘은 유독 더 피로해 보였다.

    얘가 왜 이러나 싶었던 하늘이 살며시 다가가서 앞 자리에 앉았다. 귀가 밝은 유빈이라면 그녀가 왔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어제 무슨 일 있었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단지 그대로 말했다간 하늘이가 미안하게 여길 수 있었다.

    모든 문제의 시발점은 진우였다. 그녀가 불필요한 죄책감을 가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는 슬쩍 말을 돌렸다.

    "유한이 있잖아요."

    "네."

    "어떤 것 같아요?"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한이요? 착하고 성실한 것 같던데요."

    "담에 부를 생각이 있다고 했다던데요."

    "네. 마침 하는 게임도 같아서 오늘이나 다음 주 즈음에 부르려고요. 진우가 말했어요?"

    "연락처는 아세요?"

    "네. 어제 하굣길에 만났을 때 교환했는데요."

    과연. 하굣길에 한번 더 만났구나.

    그렇다면 눈을 마주쳤을게 분명한데 그녀는 유한에게 별 거부감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유한의 호감을 읽지 못한걸까? 아니면 알고서도 친하게 지내려고 하는걸까?

    "혹시 부담스럽지는 않아요?"

    "부담이요? 유한이가?"

    슬쩍 떠보는 질문. 아니나 다를까 하늘은 의아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너무 말을 잘 듣는 느낌은 있지만 귀엽지 않아요? 부담스럽다는 생각은 안했는데."

    "그런가요."

    적어도 한이를 멀리하려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유한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듯 했다.

    "그럼 됐어요."

    "유한이가 뭐 했어요?"

    "아니요."

    유한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 하필 하교 시간에 그걸 마주치냐는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었지만 어떻게 그걸 잘못이라고 하겠는가.

    계속해서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하늘이의 눈빛에 밀린 그는 간략하게만 덧붙였다.

    "지금까지 친구라고 생각했던 녀석이, 사실은 친구가 아니었다는 걸 깨달아 버려서요. 내가 그렇게 멍청했나 하고."

    "그건..."

    "그냥. 그랬어요."

    하늘은 자세한 설명을 듣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유빈은 모두에게 친절했고, 누구와도 싸운 적이 없었다. 그런 그를 헌신짝처럼 취급할 사람은 하늘이 아는 한 단 한명 뿐이었다.

    "진우죠?"

    "......"

    무언의 긍정. 하늘은 입술을 사려물었다. 진우가 일으키는 문제의 대부분은 그녀도 연관되어 있었다.

    "혹시 저 때문인가요?"

    "아니요."

    유빈은 그제서야 고개를 들었다. 부스스한 앞머리가 흘러내리면서 이마를 덮었다.

    아직 전등도 키지 않은, 조금 어두운 교실 안에서.

    졸음과 울분으로 충혈된 눈이 아침 해의 빛을 받아 빛났다.

    지금까지 그녀가 봐 왔던 유빈이와는 어딘가 분위기가 달랐다.

    "아니에요."

    단언하는 목소리는 확신을 담고 있었다. 그는 오히려 진우의 탓이 아니면 곤란했다.

    그가 느끼는 이 풀어낼 곳 없는 감정은 방출구를 찾아 요동치고 있었다. 깊은 배신감은 그것을 한 방향으로 이끌었고, 그는 결심했다.

    임진우에게 복수하겠다고.

    그런 그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흔들릴 일이 있어서는 안됐다. 유빈은 스스로가 쉽게 마음이 약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사람을 쉽게 용서했고, 쉽게 화를 풀었다. 지금까지 진우와 계속 친하게 지냈던 것도 그런 성격 덕분에 가능했다.

    이제는 진우를 용서해서는 안된다. 그래서는 복수를 할 수 없었다.

    진우는 그에게 있어서 완전한 적이 되어야 했다.

    뒤를 잇는 말은 찐득찐득한 불쾌감과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은 고통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찡한 눈두덩이를 비벼 누른 그가 읊조렸다.

    "잘못한건, 그 새끼니까."

    이것은 책임 전가인가?

    아니.

    이것은 부당한 원망인가?

    아니.

    이것은 내가 속 좁고 편협한 사람이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인가?

    아니.

    빠득. 악문 잇새에서 살벌한 소리가 울렸다. 먹먹해진 가슴을 움켜쥔 그는 다시 고개를 책상에 쳐박았다. 그 누가 상대라고 해도 이런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서늘한 책상이 열받은 머리를 식혀주는 것 같았다. 말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늘은 유빈이 더 이상 말 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느꼈는지 조용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평소라면 머리를 대자마자 잠이 들었을텐데 오늘은 눈을 감아도 정신이 말끔하게 깨어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복수를 위한 수단을 찾고 있었다.

    유빈이 어렵지 않게 개입할 수 있는, 무엇보다도 진우에게 잊지 못할 상처를 안겨줄 수 있는 일.

    그 답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연애. 사랑이었다.

    사실 임진우의 사랑은 이미 실패가 확정되어 있었다. 하늘이는 죽어도 진우와 사귈 생각이 없었다. 이대로 졸업까지 기다려도 졸업식날의 고백 후 여지없이 거절 당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과거 유빈은 진우를 '사랑을 사랑하는 멍청이'라고 평한 적이 있었다. 이는 진우가 '일편단심으로 하늘이를 사랑하는 자신'에게 도취되어 있는 것을 비꼰 말이었다.

    만약 이대로 그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될까?

    진우는 바득바득 하늘이에게 집착할 것이다. 한 사람을 일심으로 바라보는 것이 '멋지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결론적으로 차이고 이어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어도 그는 계속 하늘이를 살피고 신경 쓸 것이다. '나를 찼어도 그녀를 위해 노력하는 나'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그 사랑은 연락이 끊어지든 물리적으로 멀어져서 끝나든 그에게 있어서는 아름다운 사랑의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유빈은 그런 결말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의 연애를 위해 자신을 마음대로 휘둘러 왔으면서 친구로도 여기지 않은 더러운 남자.

    진우의 말에 상처받았던 수십번의 경험이, 배려 없는 장난에 아팠던 몸이, 독선적인 대화에 느꼈던 스트레스가 하나 둘씩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다시 생각해보니 용서할 수 있을 건덕지가 하나도 없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기분이 더 나빠진건 어째서일까.

    "야, 유빈."

    등을 툭 치는 손길하며 던지는 목소리하며. 어느 것 하나 신경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건 거친 언행 때문일까 아니면 미운 상대의 행동이기 때문일까.

    "...뭐야. 잘 때 깨우지 말라고 말 안했냐?"

    "잠깐 할 말이 있으니까 일어나봐."

    어제의 이야기의 연속. 유빈은 이 다음에 진우가 어떤 말을 할지 알고 있었다. 언제나 똑같은 패턴이었다.

    머리를 벅벅 긁은 그가 툭 내뱉었다.

    "그, 미안했다."

    면목 없다는 태도로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 유빈이 책상 밑에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예상대로.

    "내가 어제 말이 심했던 것 같아. 미안. 오해가 있었어."

    다혈질인 성격 탓에 있는대로 화가나서 떠들다가 전화가 끊기니까 아차 싶었겠지. 유빈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는 걸 나중에서야 깨달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 이후에 하늘이에게 물어서 유빈이 결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진우는 일단 잘못을 인정하면 깨끗하게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인정 안하려고 버티다가 흐지부지되는 일이 많아서 그렇지. 지금까지 유빈은 진우가 사과하면 그냥 받아주었다.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은 유빈은 손을 내저었다.

    "...됐어. 다음 부터는 그러지 마."

    "어. 정말 미안."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겉으로는 떨떠름하지만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했지만 그는 진우를 용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사과를 받아서 기분이 더 나빠졌다. 완전히 미운털이 박혔기 때문일까.

    망쳐주겠다.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저주의 말이 혀 밑에 이슬처럼 내려앉았다.

    너의 고등학교 생활이 아름다웠던 청춘의 추억으로 남을 수 없게. 두고두고 너 새끼의 인생에서 유리파편처럼 날카로운 한조각이 되도록.

    너 스스로 날 배신했다는 사실을 깨닫지조차 못했다면 그걸로 좋다. 아무것도 모른채 그 알랑한 도취에 사로잡혀 뒤져라.

    고개도 들지 않는 모습에 많이 졸려한다고 생각한 진우는 마지막으로 유빈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자겠다고 업드려 있는데 참 잘하는 짓이었다.

    "아무튼 그래. 잘 자라."

    저 양심도 없는 놈을 향한 복수를 위해는 한 가지 중요한 전재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김하늘과 유한의 관계성이었다.

    그에게 무엇보다도 비참한 마지막을 선사하기 위해서는 드라마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착각에 빠져있는 그를 일깨울 필요가 있었다.

    아름다운 순정이라고 믿어왔던 자신의 감정이 더럽고 끔찍한 집착에 불과했다는 것을 코 앞에 들이밀기 위해, 자신이 하늘과 유한의 사랑 이야기의 조연일 뿐이었다는 걸 이해시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복수가 된다.

    유한은 분명히 하늘이에게 호감이 있었다. 그렇다면 하늘이는 유한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하늘이에게 유한을 소개한 것은 연애에 대한 거부감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둘 사이가 잘 되면 좋고, 아님 말고 정도의 생각으로.

    이제는 아니었다. 그는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붙여 놓기로 했다. 사귀는 것이 가장 좋은 경우지만 불가능하다면 두 사람이 친해지면 친해질 수록 좋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해서.

    책상 위, 몸으로 덮은 어둠 속에서 스산한 날숨이 새어나왔다. 시린 증오가 김처럼 스며들었다.

    평소에 착한 사람일수록, 화를 내면 무서운 법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말에 얻어맞은 직후 당한 배신은 유빈에게 살면서 느껴본 어떤 고난보다도 커다란 엿을 선물했다.

    어머니는 미울지언정 복수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 모든 원망은 자연스럽게 진우에게로 향했다.

    생각을 정리했더니 좀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천천히 느껴지는 졸음.

    "아."

    그때 종이 울렸다. 피로에 등골이 당긴 유빈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결국 잠을 자지 못한채 조례를 맞이한 유빈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갚아야 할 원한 목록에 한 줄이 추가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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