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 친구에서 원수가 되는 과정
* * *
[부탁할게.]
문예창작동아리의 부장인 민재는 최근 신입생들에게 조언을 해주기 위해 각자가 쓴 글을 제출하도록 했다.
받은 글은 종류도 느낌도 제각각이었다. 수필을 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소설을 쓴 사람, 조금 엉뚱하게 논설문을 쓴 사람도 있었다.
아무래도 혼자 판단을 내리는 것보다는 둘이 나을 것이라 생각한 그는 유빈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분량은 어느 정돈데?"
[가장 긴게 A4로 10장 정도야. 되게 열심히 써서 보냈더라고.]
"으엑. 단편 소설 분량은 되잖아."
[너무 바쁘면 거절해도 괜찮은데...]
"됐어. 오늘 공부는 마무리했고, 머리도 식힐 겸 읽어보지 뭐."
마침 오늘 해야 했던 숙제는 학교에서 끝낸 상태였다. 그가 글을 읽는 속도를 생각하면 자기 전에 얼추 다 읽을 수 있었다.
"감상은 나중에 한꺼번에 정리해서 보낼게."
[감사. 나중에 음료수라도 하나 사줄게.]
"그럼 나야 좋고."
책상 위에 노트북을 올린 그는 메일함에서 4개의 파일을 차례로 다운받았다. 민재의 말대로 가장 긴 소설이 하나. 그 외에는 그 소설의 절반 이하 정도의 분량들 뿐이었다.
유빈은 그 중에서 가장 먼저 소설을 선택했다. 긴 것부터 읽어볼 생각이었다.
흰 화면을 빽빽하게 채운 검은 글자들. 문예창작동아리의 신입생들 중에서도 가장 열의가 있는 학생이라는 것이 글머리부터 전해졌다.
"엔터를 너무 안 쓰는데. 문단이 안 나눠져 있어서 읽기 불편함..."
조언해 줄만한 내용은 바로 바로 기록했다. 독서량이 많은데다가 온갖 교내 글쓰기 대회마다 상을 타는 유빈. 그 단편 소설만으로도 해줄 말이 많았다.
계속해서 읽어보니 평소에도 소설을 쓴 것 같은 티가 났다. 대사도 자연스럽고 문법적으로 잘못된 문장이 거의 없었다.
잘 쓰네.
후배가 쓴 글이라길래 어느 정도 감안하고 읽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유빈아, 아직 안 자니?"
"네."
한창 집중하고 있던 때에, 유빈의 어머니가 불쑥 방 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유빈은 놀라지 않았다. 발소리로 누가 온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너무 늦지 않게 자라."
오늘이야 그렇게 늦게 잘 필요는 없었지만 평소에는 새벽 3시는 되어야 잘 수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원인은 학원 숙제였다.
누군 늦게 자고 싶어서 늦게 자는 줄 아나. 신경질적으로 반응한 그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너무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었다.
어머니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한 말일테니까. 여기서 대꾸해봤자 날선 반응이 돌아올 뿐이었다. 유빈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지만 그는 간과하고 있었다. 유빈이 아무리 순종적이어도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서 마음에 안드는 점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공부는 알아서 하고 있을거라고 믿고 아무 말 안하겠지만."
그 표정은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얕게 잠긴 목소리에서는 숨기지 못한, 정확히는 숨기지 않은 분노가 뚝뚝 묻어나왔다.
그녀는 으름장을 놓았다. 제 딴에는 위협적인 선고라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그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게 결과를 보고서도 아무 말 안하겠다는 건 아니다."
뭘 하고 있는 건지는 묻지도 않고, 노트북 앞에 앉은 그를 보자마자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
유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입을 열면 금방이라도 토악질을 할 것 같았다.
내가 무슨 말을 들은거지?
오늘 숙제는 진작에 끝냈고, 공부도 했고, 설거지도 했다. 어차피 30분 후면 잘 생각이라 잠시 친구에게 부탁받은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는거야?
이유는 없었다. 단지 공부를 하고 있지 않은 모습이, 노트북을 앞에 두고 있는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노트북을 킨 이유는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적어도 그녀에게 있어서는.
"하."
결국 다문 잇새로 흘러나온 것은 한숨조차 되지 못한 단말마였다. 제 하고싶은 말만 뱉고 사라진 어머니의 잔영이 감은 눈꺼풀 뒤로 아른거렸다.
유빈은 검은 충동이 뱃속에서 날뛰는 것을 느꼈다.
악마가 속삭였다. 모조리 때려 부수라고. 네 울분을 풀 방법은 그것 뿐이라고. 곁에 천사는 없었다. 오로지 악마 뿐이었다.
흐느끼듯 고개를 책상에 처박으면서도 그는 냉정했다. 밥 먹여주는게 누군데? 이 노트북이 얼만데?
지금 이 순간 분노에 맡겨 날뛰어도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의 지배 하에 있는 애완 인형에 불과했다. 그가 오롯이 가진 것이라고는 이 머릿속 생각 뿐이었다.
어쩌면 이것도 모조리 어머니의 것일지도 모르지. 그는 조소했다.
거칠게 해집은 머릿속에서 과거의 대화가 되살아났다.
'엄마를 위해 이정도도 못해줘?'
'그럼 엄마를 위해 공부해.'
'그렇게 말하면 내가 서운하지.'
그랬다. 그는 착한아이여야 했고, 지금까지 키워준 보답을 해야했다. 그건 앞으로도 변함 없을 일이었다.
설령 그것이 강요된 효도라고 할지라도.
멍하니 앉아있던 그의 눈에 노트북 화면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 내용은 조금도 읽히지 않았다.
"썅."
그는 아무도 듣지 못하게, 혹시 문 밖에 누군가 있을까봐 조용히 욕을 입 안에서 굴렸다. 그냥 소리라도 지를 수 있다면 좀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밤이었고, 가족들이 있었으며, 이 시간에 외출은 금지되어 있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게 도대체 뭐가 있지? 그는 자문했다. 답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없었다. 그런 건.
"뭣 같아서 해먹겠냐."
나름 재밌게 읽던 소설도 이제는 단순한 글자의 나열일 뿐이었다.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노트북을 거칠게 닫은 그가 불을 끄고 누웠다.
휴대전화가 울리면서 문자가 왔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지만 그는 무시했다. 어두운 방 안에서 화면이 깜빡거렸다.
갑작스러운 스트레스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지만 지친 심신은 수면을 요구했다. 잠이야 오지만 머리가 아파서 푹 잠들지도 못한 채로 수십 분.
"아파..."
찌릿한 머리에 침대 위를 대굴대굴 구르던 그가 벌떡 일어났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화를 낸다고 마땅한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행동은 자는 것이다.
하지만 알고 있어도 그는 몸을 누일 수 없었다.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서 어둠 속만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휴대전화로 향했다.
"누가 보낸건지나 볼까."
지금이라면 어떤 내용이라도 비웃어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잠깐이라도 머리를 비울 수 있다면 무엇이든 상관 없었다.
발신인은 진우. 내용은 한 문장 뿐이었다.
[이 문자 보면 전화 해줘.]
갑자기 전화하라고?
벌써 12시에 가까웠지만 진우라면 아직 일어나 있을 시간이었다. 가족들이 자고 있겠지만 방 문은 닫혀있으니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혹시 몰라 이불을 뒤집어쓴 유빈은 바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응답이 돌아왔다.
[여보세요?]
"왜. 무슨 일이야."
[낮에 하늘이랑 피씨방 갔다가 들었는데, 신입생 한 명 소개시켜 줬다며?]
유한에 대한 이야기였다. 언젠가 건너 건너 알게될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생각보다 빨랐다.
"아, 유한이. 마침 나랑 같은 목요일 당번이라 얼굴 본김에 인사 시켰지."
[인사만 했어?]
"어. 오늘은 일이 바빠서 틈이 없었어. 하루종일 업무처리 했으니까 이름이랑 얼굴만 서로 알걸."
일부러 그렇게 했다.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어서 유빈은 그렇게만 말했다.
진우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그는 마치 그럴리가 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정말이야?]
"왜 그래? 그럼 거짓말이겠냐?"
[...솔직하게 말해봐. 거짓말이지?]
"진짠데."
[아 진짜, 지랄하지 말고. 아닌거 다 알거든?]
허허, 지랄이라니. 이 새끼가 진짜 왜 이래?
너털웃음을 지었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눈꼬리가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을 뿐더러 기분도 나빴다.
유빈은 잿더미나 마찬가지였던 정신이 열을 받는 것을 느꼈다. 전화를 해달라고 해서 해 줬더니 대뜸 하는 말이 이 모양이였다. 슬금슬금 분노가 졸음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갑자기 지랄은 뭔 지랄이야."
[아까 '유한도 우리가 자주하는 게임을 좋아한다니까 다음에 부르는 건 어떠냐'고 하늘이가 말했어.]
이 야밤에 왜 전화를 부탁했는지 의문이었는데, 이로서 분명히 알게 되었다.
지금 진우는 눈이 돌아가 있었다.
유빈은 찬물을 뒤집어 쓴 기분이었다.
[인사만 했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 아니면 네가 말했어?]
"아니. 난 처음 듣는데."
[그러니까 인사만 한게 아니잖아 새끼야!]
순식간에 열이 오른 목소리에 유빈이 반사적으로 전화기를 귀에서 떼어냈다.
귀가 쨍했다. 설마 밖에도 들리진 않았겠지.
그는 정말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인사 이외의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만들기위해 그가 얼마나 노력했던가.
진우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그가 모르는 곳에서 유한과 하늘의 접점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즉 그가 들였던 모든 수고는 뻘짓에 불과했다.
[솔직하게 말해봐.]
"솔직이고 뭐고 내가 아는 건 그게 다야. 학교 끝나고 어쩌다가 둘이 만났나보지."
[이 씨...!]
"아니, 왜 나한테 와서 이래? 내가 아는 건 그게 다라고! 몇번 더 말해줘야 해?"
슬슬 유빈의 말투에도 짜증이 섞이기 시작했다. 재 안쪽에 남아있던 불씨가 바람을 맞고 훅 타올랐다.
어머니의 자기중심적인 시각, 아픈 머리, 피곤한 몸, 거기에 자신을 거짓말쟁이로 몰고 가는 진우까지.
친구라는 녀석이 눈꼽만큼도 그를 믿지 않고 있었다.
[하. 졸라 싸가지없네.]
"뭐?"
싸가지가 없다는 말은 아랫 사람이 윗 사람에게 하는 언행이 예의가 없다는 뜻이다.
즉 진우는 절친이니 뭐니 말은 했어도 속으로는 유빈을 자신의 아래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
뇌 속의 퓨즈가 끊어졌다. 아마도 그것은 정신줄, 혹은 인내심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그 후에도 진우가 악을 질러댔지만 그는 듣고있지 않았다. 더 이상 들을 이유가 없었다.
"...꺼져."
유빈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힘 없이 늘어진 손에서 미끄러진 휴대전화가 바닥에 떨어졌다. 쿵.
남은 것은 지독한 배신감과 허탈함 뿐이었다. 힘 없이 이불 위로 쓰러진 그는 그 상태 그대로 눈을 질끈 감았다.
걔는 널 더 괴롭힐거야.
시아의 말이 이명처럼 맴돌았다.
그래, 내가 멍청이였지.
애초에 상대는 자신을 친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의리를 지킨다고 했던 행동들은 하나같이 의미 없는 광대짓에 불과했다.
아니. 지켜보는 사람이라고는 시아 뿐이었으니 광대조차 아니었다.
"그래. 좋다 이거야."
그는 이제 진우가 친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밉살맞은 친구에게서 친구가 빠지면 무엇이 남는가?
그건 그저 미운 상대. 원수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원수에게 줄 호의는 남아있지 않았다.
유빈은 서서히 기절하듯 잠드는 와중에도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복수. 그래, 복수를 할 방법을 찾기 위해서.
가증스러운 상대를 어떻게 하면 괴롭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시간이 지나 마침내 해가 떴을 때.
일어난 유빈의 눈동자는 서늘한 빛을 띄고 있었다.
* * *